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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거주구역 맞슴까? 근데 문이 날아갔는데... 저희 가까이 가도 괜찮은검까?"

"우리는 안 들어가. 여기까지 태워준 것 만으로도 해줄건 다 해줬어. 내려."


감사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기에 나와 아저씨는 재빨리 내렸고 녀석들도 인사 따위를 받을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나를 향해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드는 모지리 이병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차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밤이 찾아온지 오래였고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불길하게 우리를 향해 달빛을 비췄다.

부숴진 문을 지나 거주구역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인기척 없이 황량한 집들을 둘러보았고 허탈함이 밀려오자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하, 하하... 대체... 무슨 일이..."

"잠깐. 누가 있다."


반쯤 폐허가 된 상가 건물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저씨는 팔을 뻗아 내 앞을 가로막았고 등에 멘 산탄총을 꺼냈다.

그러자 건물 틈새에서 배달부 아저씨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반가움에 아저씨들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감격의 재회 따위는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총구가 나를 포위했고 놀란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철만이 아저씨는 한치의 동요도 없이 천천히 나를 앞서가더니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고 다른 아저씨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총 내려."

"철만아... 아니, 이철만 지부장. 지금 당신의 아들은 마물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어. 부디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일단 총부터 내려. 알고 있겠지만 나는 똑같은 말을 두 번 이상 말하지 않아."


차갑고 공허하지만 살기와 분노가 가득 담겨있는 철만이 아저씨의 눈빛을 본 다른 아저씨들은 혀를 차며 총을 내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를 혼란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내 앞으로 종이 몇 장이 흩뿌려졌다.

부드러운 보랏빛 털이 덮인 귀와 꼬리, 북실북실한 손, 장난스러운 웃음. 체셔가 찍힌 사진을 바닥에서 집어든 내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네 아들이 데려온 그 고양이 마물이... 내통자였어. 크레모아의 격발장치를 고장내고, 문을 지키는 경비들을 기절시켜 습격의 대응을 막았지."

"잠시만요, 설명할 수 있을 거에요. 체셔, 어디 있어! 잠깐 나와봐!"

"소용없을 거다. 우리가 이미 샅샅이 뒤졌는데도 완전히 사라졌어. 돌아간 마물들 무리에 합류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겠지."

"그리고 그 마물을 이 거주구역에 데려온 너의 진의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거야. 너는 어째서, 무슨 생각으로 이 곳에 마물을 데려온 거냐."


체셔가 크레모아의 격발장치를 만지고 있는 사진, 경비들을 뒤에서 습격하는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혜선과 대화하는 사진까지.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 아니, 변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라를 만나서 데려오는 길에 체셔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아니면 모라가 있는 저택에 갔을 때? 아이들을 고아원에서 구해줘서 아파트를 빌려줬을 때?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자 반쯤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에서 원망과 분노 섞인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재산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혹은 목숨을 잃었다. 나 때문에.


"애들은... 애들은 괜찮나요? 그것만 알려주세요."

"꼴에 죄책감은 있나 보군. 이 녀석 말하는 거지?"


아저씨들 중 한 명이 상가 구석에 숨어있던 남자애를 일으키자 소년은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저씨의 손길에 힘없이 일어섰다.

평소 남매가 꼭 같이 붙어 있었는데, 여동생이 어디 갔을지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소년의 눈은 공허했다. 마치 시체처럼 텅 빈 눈동자는 허공만을 응시했고 눈물은 짜내다 못해 말라 버렸는지 눈가에는 분명한 눈물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내가 버리고 왔잖아, 아니야. 그 애는 죽었어... 거짓말!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마물들에게 납치되고 돌아온 이후로... 쭉 이 상태야. 처음에는 목이 터져라 소리만 지르더니, 이제는 중얼거리기밖에 하지 않아. 불쌍한 녀석..."

"가족인데...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하하, 흐하하하..."


소년의 표정은 울음과 웃음을 계속해서 오갔고 입은 의미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게 전부 나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내 손으로 나를 거둬주고 내가 살아온 곳을 이렇게 만들었다.

철만이 아저씨가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나와 눈을 마주치자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네가 모라와 체셔를 데려왔던 날, 기억하니."

"... 예, 기억합니다."

"그때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지, 생각은 충분히 했을 거라 생각한다. 네 생각을 말해주렴."


꽉 쥔 주먹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금 당장 죽어버리고 싶었다. 허리춤에서 잘그락거리는 권총을 뽑아 내 머리를 날려버린다면 조금은 이 억눌린 감정이 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법이 아니겠지. 이곳에 남겨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저 치워야 할 귀찮은 시체 한 구가 늘어날 뿐이니까.

나는 주먹을 펴고 품 안을 뒤적거렸고 코트 안쪽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지자 그것을 꺼내보였다.

손바닥을 반쯤 채울 정도 크기의 은빛 메달. 배달부임을 증명하는 물건. 나는 배달부 배지를 손에 꼭 쥐었다.

배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 배지를 처음 잡았던 날도 이렇게 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가까스로 참고 있다는 점 정도.


"배달부...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곳에 얼굴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존중해주마. 가라, 두 번 다시 이 곳에 모습을 보이지 마."


허탈한 마음으로 가방을 들어올리자 아저씨는 내가 내민 배지를 무심하게 가져가며 등을 돌렸다.

내게서 떠나간다. 나의 존재 이유가, 내가 살았던 의미가, 내가 인정받고 싶어했던 자가, 점점 멀어져간다.

점점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마침내 뒤를 돌았다.

더 이상 그 뒷모습을 본다면 눈물을 참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네 물건은 따로 챙겨뒀다, 가져가. 우리에게는 필요 없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발걸음을 떼자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 첫 발걸음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아저씨들 중 한 명이 내게 가방 두 개를 던졌다.

하나는 아파트에 있었던 내 짐이였고, 나머지 하나는 강원랜드에서 도망쳐 나올 때 가져왔던 가방이였다.

내 하찮은 물건조차도 이곳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두고 갈 생각이였던 돈까지도 거부당했다.

한참을 걷던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고 내 뒤로 쇼그와 모라가 따라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너희는 괜찮아? 마물들이 습격했다면서. 심한 짓을 당하지는 않았어?"

"저희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대피를 돕고, 싸우는 것을 도운 것 때문인지 이곳에서의 주거를 허락받은 상태입니다."

"그럼 걱정은 필요없겠네. 여기에 있어줘."


내가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쇼그와 모라는 내 뒤를 쫓아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녀들의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동행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혼자 발 닿는 곳까지 걸어가다 사라지고 싶었다.


"내 말 못 들었어? 돌아가라니까."

"주인님을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 저희는..."

"닥쳐,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사라지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목에서부터 터져나왔다.

말이 끝나자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 말에 놀란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한 번 쏟아낸 마음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갈 만도 했지만 둘은 망부석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였다.


"대체 왜... 왜 안 가는 건데, 말하고 있잖아. 사라지라고..."

"지금 주인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지옥 끝까지라도 당신의 뒤를 쫓는 것이 저희의 사명입니다."


지옥 끝이라.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의 구렁텅이일 것이다.

눈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 하자 나는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따라와. 나는 너희들이 나를 쫓는 만큼 너희를 저주하고, 원망할 테니까. 웃을 때도,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괴로울 때도, 죽을 때 까지. 너희를 혐오하고 역겨워 할 거야."

".... 주인님."

"제발 돌아가줘. 내 기억이... 너희의 아름다운 모습만 남길 수 있도록 해줘. 가끔씩 너희와 함께했던 기억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게 해줘."


이 순간만큼은 답답한 방독면이 고마웠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 호소가 통했는지 내가 다시 움직이는데도 모라와 쇼그,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완전히 이곳을 떠나기 직전, 뒤를 한 번 돌아보며 웃었다.


"마지막 부탁인데, 꼬맹이를 부탁할게. 녀석이 여동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쇼그는 덤덤히 대답했지만 모라는 멍하니 내가 있는 곳을, 그리고 내가 떠날 곳을 바라볼 뿐이였다.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로 하는 곳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였다.

방독면의 눈 부분에 물방울이 맺히며 톡톡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을 가린 먹구름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차가운 빗방울을 반려 삼아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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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런가... 정보는 확실하겠지?"

"예! 확실한 보고입니다! 이철만의 아들로 추정되는 배달부가 배달부직을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났다는 첩보입니다!"


중령은 탁자에 걸친 다리를 까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보고를 하러 들어온 병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내리며 이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고 병사는 큰 목소리로 경례를 올리고는 방을 나갔다.


"신 상사, 어떻게 생각하나. 응? 신 상사?"


신 상사를 찾던 중령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방 안에 신 상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마를 탁 친 중령은 장난치듯 가볍고 경박스러운 발걸음으로 대대장실을 나갔다.

언제나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던 병사들은 마치 신난 어린아이 같은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중령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 경직된 채 경례를 올렸다.

중령이 향하는 곳은 하나였다. 신 상사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그 혼자만의 개인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중령의 손이 벌컥 문을 열자 방 안에서 아련하게 사진 한 장을 바라보던 신 상사는 다급히 사진을 숨기며 중령에게 경례했다.


"신동진 상사, 있는가?"

"충성! 중령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흐음... 아니, 별 일 없네. 자네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이 방 안에서 말이지. 청소를 위해 들어온 병사 하나를 총살시킬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던데. 뭐 중요한 거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저... 개인정비 시간만큼은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중령은 턱을 짚으며 방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었고 신 상사는 그것이 불쾌하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치 신혼부부의 침실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방을 살피던 중령의 시선은 침대 옆의 협탁, 그 중에서도 협탁 위에 놓인 액자에 꽂혔다.

한 남자와 여자가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인 것 같았고 중령은 사진을 집어들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신 상사의 손이 중령의 손을 막았다.

중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신 상사를 바라보았고 신 상사는 당황한 듯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흐음... 사진 속의 남자, 자네와 닮았는데. 옆에 있는 건 아내인가?"

".... 아내, 였습니다."

"아내 '였다?' 왜 과거형을... 아, 미안하군.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혼인가?"

"아뇨. 마물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실종됐습니다."


잠시 액자의 사진을 바라보던 신 상사는 사진이 보이지 않도록 액자를 협탁 위에 덮어버렸다.

액자를 덮는 그의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고 중령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실종이라면 살아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지금이라도 수색대를 파견하는 것이..."

"제 아내는 죽었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제 아내는,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가... 유감이군. 그런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신 상사 자네가 참 믿음직스러워."

"감사합니다. 병사들이 잘 따라줬을 뿐입니다."


사진을 덮은 신 상사의 손목을 중령의 손이 빠르게 낚아챘다.

신 상사는 움찔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고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중령의 손목을 꾹 눌러쥐었다.


"그런가? 그래, 그런 것 같긴 하더군. 어떨 때는 병사들이 나보다 자네를 더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 같단 말이지."

".... 그건."

"신 상사, 자네는 참 유능한 사람이야. 내 생각보다도 훨씬. 배달부들의 거주지구가 습격받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던 것도 자네였고, 자네가 예상한 날짜에 정확히 침공이 시작됐어. 이 어찌 완벽한 통찰력이란 말인가!"

"첩보병들이 임무를 잘 수행해줬기에 가능한 예측이였..."

"그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도 자네였지! 우리는 배달부들의 전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신 상사. 때때로 나는, 이 군대를 지휘하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네. 나일까? 자네일까? 그것도 아니면..."


신동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쪽 손을 허리춤으로 슬쩍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중령은 씨익 웃으며 손을 놓았고, 신 상사는 굳은 얼굴로 손목을 매만졌다.

 

"오, 걱정 말게나! 나도 아직까지는 이 병정놀음을 그만둘 생각 따위는 없고, 머리에 쓴 감투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으니 말일세. 이 짓도 꽤나 재미있거든."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령님."

"감정이 북받친 것 같은데, 푹 쉬도록 하게."


뒤를 돌아 방을 나간 중령은 신 상사가 액자를 덮기 직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사진의 모습을 생각했다.

신부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의 낯익은 얼굴을 떠올리며 중령은 생각에 빠졌다.


"흠... 분명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단 말이지. 어디에서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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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연설 준비 끝났습니다."

"좋아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얼마나 모였죠?"

"이 주변 거주구역의 주민 대부분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형 세력들이 정탐할 사람을 보냈다는 첩보 또한 입수했고, 다른 도에서도 대표로 사람을 몇 명 보냈습니다."


이혜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는 건 언제 들어도 기분좋은 소식이였으니까.

배달부들을 손봐준 직후 이혜선은 강원랜드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모든 인간 거주구역에 대민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자금, 식량, 물자를 보냈다.

또한 마물들을 중심으로 한 강원랜드의 경비 병력. 사실상 자신의 사병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빠르게 혼란을 정리했고, 범죄자들을 체포 및 처벌했다.

영악하게도 이혜선은 마물이 인간을 지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계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절을 보냈다.

자신들은 인간들과의 공존을 원하며, 이것은 그저 첫 발자국일 뿐이라고.

유일하게 그녀가 아쉬워한 것은 지금 이 자리를 만들어 준 최고의 비밀요원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혹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찾았나요?"

"죄송합니다. 배달부들의 구역을 습격한 이후로 잠적하고는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계속 수색하고 있으니 조금만..."

"아뇨, 괜찮아요.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였으니 언젠가 돌아와서 저희에게 또다시 이익을 안겨주겠죠."


사람들 앞에 서기 직전, 이혜선인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외모는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혜선은 자신의 모습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거부당한 저주받은 몸이라며 끊임없이 자조했다.

사라진 반쪽을 추억하던 그녀는 눈을 감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경호원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곧 연설 시간입니다. 주변 경호는 완벽하며 현장은 완전히 통제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람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겠죠? 그럼, 나가보도록 할까요?"

"여기, 이쪽으로. 대중들이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된 연단으로 다가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혜선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마물에 대한 공포심, 지금 당장이라도 마물들이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한 점의 희망.

사람들에게 가볍게 웃어준 이혜선은 마이크 앞에 섰고 그녀를 바라보는 모두가 긴장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시민 여러분. 우선 이 곳까지 와 주신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아직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었고, 그저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릴 뿐이였다.

이혜선은 그 반응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렸다.

저들의 눈에 서려있던 공포가 조금씩 잦아들고 그 자리를 희망이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판데믹 이후로, 우리의 삶은 예전의 것과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혼란 틈에 친구, 가족,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며 행복과 안정을 얻었던 보금자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한때의 이웃이 강도가 되어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고, 오직 폭력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힘찬 목소리와 감정이 담긴 호소. 이것만큼 절박한 대중을 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고 입에는 미소를 담았다.

그 모습을 이혜선이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녀는 좀 더 감정을 담아, 좀 더 강하게 말을 이어갔다.


"정부는 시민들을 버렸습니다. 국민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쳐야 할 집단은 자신들끼리 다투다 흩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때 경찰이였던 자들이, 한때 군인이였던 자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모습을 차마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이런 모습이지만 한때 인간이였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여러분들을 도왔고, 앞으로도 도울 것입니다."


처음에는 냉소적인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연설을 들으며 점점 마음이 움직었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판데믹 이후 십수년 동안 인간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괴물로만 알았던 마물이 자신들의 구원자를 자처한다. 이어지는 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였다.

하지만 이혜선은 이 혼란을 노렸다. 심정의 동요와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진실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흐려진 판단력 사이에 파고든다면 계획의 완성은 저절로 따라오는 부산물이였으니, 이 정도 입에 발린 소리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겠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인간과의 공존이며, 공존을 방해하고 질서를 흐트러트리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자들을 저희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본분을 잊고 시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징벌하며, 다시 이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수많은 민중들은 박수를 치며 새로운 자신들의 구원자 앞에 환호를 내질렀다.

흥분한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눴고 마물 경비병을 포옹하는 자도 있었다.

마침내 군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혜선은 연단에서 내려갔고 그녀의 뒤로 환호와 찬양의 소리가 뒤따랐다.

차에 탑승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도록 하죠.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네요."


피로가 쌓인 어깨를 주무르던 이혜선의 눈은 차량 앞좌석에 놓인 작은 차량용 액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짓하자 액자에 끼워져 있던 사진이 그녀의 손을 향해 날아왔고 사진을 집은 이혜선은 사진 속의 두 명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정장을 입은 채 뻣뻣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와 쾌활하게 웃으며 남자의 팔을 잡아당기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찍힌 사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