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등산하던 내 머리 위로 떨어지며 어쩌다 같이 살게 된 그린웜

오늘은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며 쑥쑥 자라버린 이 녀석과 잠시 산책을 나가 볼 예정이다


"오랫만에 밖에 나가니까 좋지?"


"응! 쬬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울창한 숲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길가에 심어진 덤불로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잎을 하나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무가 앙상해지자, 그녀는 산책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더듬이를 쫑긋거리며 더욱 맛있는 식물을 찾아 애처로운 속도로 나아갔다. 


나도 하는 수 없이 따라다니며 지켜보는 동안 운 좋게 야생 블루베리를 발견한 그린웜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기다란 몸을 쭉 뻗고 제철인 여름을 맞아 주렁주렁 열린 블루베리를 통째로 삼키기 시작하며, 그녀는 장장 30분을 나무 주변에 머물렀다.


"옵빠. 나 배불러."


나무 몇 개를 초토화시킨 뒤에야 그녀의 폭주는 멈춰섰고, 결국 정해진 길로 단 2m도 채 나아가지 못하며 우리의 산책같지도 않은 산책은 끝이 났다.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다시 집에 돌아오는 동안 배가 꺼져버린 그녀는 깨끗히 씻은 양배추 두 포기를 먹어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었다. 


"어디 또 한 번 산책 나가나 봐라."


"헤아?"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나는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이 맹한 표정의 생명체의 초록빛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그때 다시는 나랑 산책 안 간다면서? 거짓말쟁이."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하여튼 기억력은 엄청 좋다니까."


안타깝지만 나는 그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늘씬한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아내와 요즘도 종종 산책을 다니곤 한다.


"근데 너는 꿀이라도 빨아먹어야 하지 않아? 저기 길가에 많이 있네."


"내가 왜? 오빠가 해 준 밥이 더 맛있는데."


눈동자만큼은 그린웜 시절과 비슷한 빠삐용이 귀여운 건지, 음란한 건지 모를 미소를 장난스레 던졌다.


"오빠도 내가 제일 맛있으면서 ❤. "


"야, 뭔.. 뭇하는 말이 없어."


"향기도 안 뿜었는데 아침부터 먼저 덮친 게 누구더라~?"


나는 마주보고 서 있던 아내의 허리를 잡고 높이 들어올렸다. 따스한 햇살이 날개를 펄럭이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등을 비추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된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게 첫 만남의 시작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