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탕의 난리가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엉망인 상태에서 교복을 차려 입은 채 교탁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대감, 불신, 의구심등등 저마다 다른 표정을 보이면서도 시선은 한 곳에 집중 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두 교복을 입은 것과 대조되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정좌를 하고 있는 솔피는 이전의 포악한 모습은 사라진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옆으로 몬붕이 교복을 다시 차려 입은 채 서 있었다.


"얘들아. 지금 이 옆의 옥순이가 너희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기회를 가진다고 한다."


 한 바탕 솔피를 참교육한 이후로 정말로 반성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피어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호되게 혼났던 세실리아가 그녀를 노려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야, 너 진짜 반성한 거냐?"


 고압적인 태도로 돌아온 걸 보면 쟤도 참 골때린다. 하고 학생들이 혀를 찼다. 그만큼 세실리아가 솔피에 대해서 당한 게 많다는 소리였지만 솔피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고압적인 태도로 돌아가는 건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실리아의 질문에 솔피는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세실리아는 주먹을 쥐며 머리 위로 손을 들어올렸다. 물론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이 시늉만 할려고 했는데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히익! 아, 아냐!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겁에 질려서 변해버린 표정이 이렇게 순해보이던 얼굴이었던가? 


 막으려는 모습을 취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자 몬붕이는 세실리아를 제지하며 솔피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러면 제대로 사과를 해야지?"


 충분히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사과를 위해서는 실행에 옮겨야 했다. 솔피는 다시 한 번 정좌 자세를 고치면소 상반신을 숙인 채 학생들을 향해 사과의 의미를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 옥순이는 다시는 여기 있는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솔피의 절에서 학생들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사이에서 저래놓고 또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냐는 불신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건 두고봐야 할 일이다.


 솔피 참교육이 종료되면서, 초코가 몬붕이에게 와락 껴안아들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자기 때문에 소꿉친구가 힘들고 위험한 일에 휘말릴 뻔했다는 죄책감에 연신 사과를 하며 울지만 몬붕이는 그런 초코를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며 위로해줄 뿐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못보일 꼴 보여준 것 같다며 역으로 사과도 하지만 감정에 복받쳐서 콧물을 흘리며 어린애처럼 우는 초코를 달래는 것에 굉장히 애를 먹었다.


 반은 다시 한 번 평화를 되찾았다. 소꿉친구인 몬붕이와 초코는 평소처럼 같이 등교하고 하교 할 수 있었고, 사랑이 깊어지면서 몸을 섞는 것에 성공했다.


 솔피에게 사용했던 약은 초코가 받아들이기 무리라고 생각해서 솔피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한 알 이후로는 더 이상 양이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허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책상에 고히 봉인 중인데 최근들어서 다시 꺼내야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솔피쪽에서 자꾸 몰래 몬붕이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안 그래도 큰 체구임에도 그 몸을 숨기겠다고 몸을 숙이거나 엎드리거나 하지만 아무리 해도 티가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솔피의 스토킹을 눈치 챈 몬붕이가 그녀를 결국 따로 불러내고는 왜 자꾸 귀찮게 할 거냐면서 따지자 얼굴을 붉히며 양손의 검지 끝을 부딪히면서 우물쭈물 거릴 뿐이었다.


 겨우 입을 여나 싶었는데 나비 날개짓하는 수준의 크기로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정녕 얼마 전까지 반을 지배하려 들었던 그 솔피의 모습이란 말인가?


"좀 크게 이야기해봐. 잘 안 들린다고."


 성격이 좋아도 답답하게 굴면 속이 터지기 마련인데 계속 목적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냥 가버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솔피는 작게라도 입을 열었고 그 말은 몬붕이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거 더 해줘... 약 먹고..."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약을 먹고 한 번 더 해달라는 부탁을 듣자 머리가 하얘졌다. 간접 고백이나 다름 없는 거 아닌가? 그래도 몬붕이는 하얘지는 정신을 붙잡고 그녀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안 돼. 내가 너 좋아서 약까지 먹고 그렇게 했던 건 줄 알아? 반성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박아댔는데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됐어. 못 들은 걸로 할테니까 돌아가."


 그때는 어쩔 수 없더라도 지금 초코와 함께 사귀는 입장이 되었는데 옥순의 난입을 허가할 수는 없었다. 대놓고 바람피우겠다고 선서하는 셈인데 그럴 배짱도 없었고. 더군다나 약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을 다 먹고 나면 솔피를 제압할 수단이 없어진다. 역으로 주종관계가 바뀌지나 않으면 다행일텐데.


 옥순의 부탁을 거절한 채 등을 돌리려는 순간 손목을 꽉 잡혀서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옥순이 몬붕이의 손목을 붙잡고 무릎까지 꿇은 채 사정을 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뭐든지 할 게! 그 때 이후로 아무리 자위를 해도 만족스럽지 않단 말이야! 지금도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겁고 하반신이 가려워! 뭐든지 할 게! 땅을 기어다니라면 기어다닐게! 주인님이라고도 부를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부탁이야...! 날 버리지 말아줘!" 


 손아귀가 덜덜 떨리는데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자기와 초코를 괴롭혔던 옥순이인데도 그녀가 애처롭게 사정하는 모습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지난 번에 사정없이 쑤셨던 참교육 때 이후로 조금 냉정해졌나 싶었지만 동정심 많은 것은 변함 없었다.


"...좋아. 대신 초코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거야."


 솔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코한테 허락을 받으면 해주는 거냐면서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몬붕이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초코는 이 일을 거절할 것이라고.


 초코도 솔피에 대해 한이 없지 않을테니 그 가녀린 입으로도 '꺼져'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다. 


 너무 매정한 선택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계속해서 그녀에게 붙잡혀 있으면 정말로 마음이 변해버릴 것 같았다. 이건 자신과 초코를 위한 일이라며 실날 같은 희망을 품은 솔피와 함께 초코를 찾았다.


"좋아. 대신,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어?"


 물론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는 계산은 하지 못했다.


"저, 정말로?"


 물론 놀란 것은 몬붕이 뿐만이 아니었다. 솔피도 깜짝 놀라서 조심스럽게 되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괴롭혔는데?"

"하지만 반성했잖아? 다시 애들도 안 괴롭히고? 아니야?"


 초코의 말대로 참교육 이후에 솔피는 사람이 바뀐 수준으로 착실하게 학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리 예방을 해도 틈속에서 일이 벌어지듯이 일진이 누군가를 괴롭히면 자진해서 일진을 쓰러트리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구할 정도였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반성한다고 하더라도 초코 정도면 용서 못할 줄 알았지만 초코는 활짝 웃으며 솔피를 받아들였다. 저런 작은 체구에서 뿜어지는 빛을 어떻게 가릴까. 솔피도 감명을 받았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초코의 손을 잡고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반복적인 말을 계속했다.


 내가 너무 속이 좁았나? 싶으면서도 오랜 소꿉친구인데도 초코를 너무 얕봤다는 생각에 반성을 한다.


 그보다 저렇게 화해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한데 이제부터 어쩌지?


 이제는 초코를 얼싸안고 울어재끼는 솔피와 그런 솔피의 머리를 쓰다듬는 초코를 바라보며 느닷없는 3P 예고에 몬붕이는 혹시 몰라 계속 가지고 다니는 약을 꺼내 살펴보았다. 혹시 이 약을 또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하고 찾아보지만 정말 수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깨끗한 포장지를 보면서 몬붕이는 오늘따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을이 질 무렵, 야간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직장인들이 퇴근을 할 무렵의 시간 정도였다. 지금쯤 한창 저녁을 준비하는 가정들이 있을 무렵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이지만 골목 같이 으슥한 곳은 이미 진한 어둠이 찾아왔다. 제 아무리 편견이라도 을씨년스러운 골목은 괜히 양아치들이 있을 법한 장소로 보였다. 특히 도망칠 공간이 하나 밖에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랬고 말이다.


 시선을 피해서 나쁜 일이 벌어지기 좋을 장소를 누구에게 먼저 선점했다는 것을 알리듯 교복을 풀어해친 몬무스들이 모여 있었고 달아날 수 없는 구석에는 안경을 쓴, 전형적인 오타쿠스러운 인상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체셔, 헬하운드, 그리고 한창 남학생의 키에 절반밖에 차지 하지 못하는 조그만한 데빌이 남학생을 바라보며 가학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뒤에 팔짱을 끼운 채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체셔는 대기업 회장의 딸이었다. 패거리의 정보망을 담당하고 있었다.


 달콤한 막대 사탕을 쪽쪽 빨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 헬하운드는 덩치 담당.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싸움 실력은 톱중의 톱이었다.


 눈 앞의 조그만한 데빌은 남학생의 소꿉친구였다. 허나 소꿉친구라는 것과 별개로 소악마처럼 웃으면서 구석에 쭈그린 채 혹시라도 때릴까봐 방어자세를 취하는 남학생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다.


"뭘 그렇게 쪼냐 킥킥, 오늘까지 가지고 오라는 돈 가져왔지? 아니면 못 가져와서 주변을 그렇게 돌아보면서 집에 가던 중인가?"


 발로 툭툭건드리는 강도는 조금씩 차는 강도로 변했다. 다리를 푹푹 찍을 때마다 짧게 신음소리를 내는 남학생.


"주, 주, 주려고 했어... 근데 알바하는데서 점장님이 돈을 아직 안 주셨..."


 돈을 아직 못 받았다는 말을 하려는 남학생에게 발길질은 더 거세질 뿐이었다.


"못 받아서 뭐? 너네 엄마아빠 잘 사는 편이잖아? 일주일에 10만원. 그걸 못 가져오냐 등신아?" 


 일주일에 10만원. 한 달에 4주가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한 달에 40만원이라는 지출은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큰 돈이었다. 일주일에 10만원이라는 지출이라는 이름의 삥뜯김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지났을 경우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몬붕이는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돈을 받칠 수 밖에 없었다.


"병신! 등신! 돼지 새끼! 너 때문에 이번에 한정판으로 나올 블루투스 이어폰 못 사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아악! 아악!!!"


 발길질이 거세지면서 남학생이 비명을 지르는 수준이 되었다. 허나 진짜로 수중에 돈이 없는 걸 어떻겠나.


"돈은 나보다 체셔가 더 많잖아!"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대기업 회장의 딸한테 떠넘기는 듯한 말이었다. 맞으면서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뱉은 실언이었지만 그 큰 목소리를 못 들을 사람은 없었다.


"꺄하핫! 뭐야? 이젠 네가 삥뜯는 역할 해보고 싶은 거야? 기껏해야 중산층인 네가? 우리 아빠가 어디 그룹 회장인지 다 알고 있는데? 정말 용감하네? 아이~ 무서워라~ 얼마면 되나요? 얼마면 날 무섭지 않게 해줄 수 있어요? 꺄하하하하!"


 굉장히 재밌는 소리였는지 자신의 뒷배를 이야기하며 아파하는 몬붕이의 머리를 쿡쿡 찔러대며 즐겁게 꼬리를 흔드는 체셔. 항상 정신을 갉아먹는 역할을 담당한 상황에서 몬붕이는 저항 따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무력은 가장 약하다고 하더라도, 말했듯이 대기업 회장의 딸이다. 잘못하면 집안째로 풍비박살 낼 힘이 있는 금수저중의 금수저.


 아니나 다를까, 40만원을 만들기 위해서 오타쿠스러운 외모 답게 피규어나 굿즈등을 사려고 시간을 쪼개며 하던 알바는 그들에게 바칠 제물을 벌기 위한 일이 되어버렸는데, 어느날 체셔가 남학생이 일하는 알바처에 오더니, "너 여기서 일하는구나?" 하고 의미시장한 말을 내뱉고는 사라진 다음날.


 가게 사정이 안 좋다고 점장이 사과와 함께 이번 달 급여를 다음 달에 지급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의 말과 달리 남학생이 일하는 내내 가게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체셔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리가. 덕분에 이번 주 10만원을 내기는 커녕 빌어야 할 상황이 찾아왔다.


 관심 없다는 듯이 사탕을 쪽쪽 빨다가 남학생을 힐끔 쳐다보는 헬하운드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었다. 보통 헬하운드들은 불 같은 성격과 쾌활하다 못해 뜨거운 행동을 보이기 마련인데 속성이 얼음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과묵하고 표정변화 없이 남학생을 때리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라 볼 것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그들의 리더 역할을 하는, 남학생의 소꿉친구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랐다.


"제발... 제발 그만해... 돈 어떻게든 가져올테니 제발..."


 발길질과 손가락질이 끝나자 남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엎드려 절을 했다. 바닥이 아무리 더러워도 살고자하는 본능 때문에 굴욕적인 상황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빌었다.


"이야, 돼지 새끼 절은 할 수 있었구나? 배나 툭 튀어나온 채 꼴 사납게 비는 모습이 존나 웃기네."


 꺄르륵거리면서 체셔와 함꼐 웃어보이는 가학적인 데빌. 헬하운드는 그러던지 말던지 다 먹은 막대 사탕의 막대를 남학생의 머리쪽으로 툭 던졌다.


 머리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 막대. 


 두려움, 슬픔, 분노, 억울함.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절하는 자세를 유지한 채로 참았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다행히 3명은 그 눈물을 보지 못한 듯 했다.


"하, 시발 시간 낭비했네. 다음 주까지 20만원 준비해라. 우리도 약속 있어서 빨리 가야하니까. 너 말이야, 다음주까지 안 가져오면 진짜..."


 비록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가학적으로 웃었던 데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엎드려 있지만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년' 창관으로 보내버린다."

"...!"


 온 몸이 떨렸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세 명의 발 걸음이 사라져가자 그제야 남학생은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현실과 눈 앞의 어둠. 어느새인가 가로등의 불빛이 들어와 자신이 있는 곳이 더 어둡게 느껴졌다.


 한 방울 한 방울 흘리던 눈물이 수도꼭지가 잠금장치 풀린 것처럼 줄기를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 큰 소리로 울지 못하고 훌쩍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한탄뿐이었다.


 소꿉친구라.


 분명 모두가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처음 유치원 때 만났을 때만해도 장난기 있기는 했어도 착한 아이였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마저 같은 곳으로 진학해서 이건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데빌과 가까이 지냈었는데.


 어느 순간, 데빌은 '일진'이라는 길을 걸었다. 딱히 못사는 집도, 그렇다고 잘 사는 집도 아니었는데, 그게 그냥 좋았던 것일까. 여튼 그때까지도 데빌이 남학생에게 하는 일이라고는 장난을 치는 정도였지,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폭력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킨 남학생이 떨어트린 폰을 주웠을 때부터였다. 갤러리 안에 저장된 남학생과 처음 보는 몬무스가 찍힌 사진을 봤을 때였다.


 남학생이 부끄러우니 빨리 달라며 뺏듯이 폰을 챙겨가자, 데빌은 놀란 표정으로 그 애가 누구냐며 질문했고, 남학생은 친해진 여자애라 둘러댔다.   


 아무리 친해진 여자애라고 하더라도 단 둘이 같이 사진을 찍는 게 가능한 일이던가...? 이런 모순에 대한 지적이 한 순간에 남학생의 방패를 깨부셨고, 남학생은 최근 알바하는 곳에서 친해진 누나라고 한다. 


 얼굴을 붉힌 채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을 봤을 때. 데빌은 그 남학생이 그 몬무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남학생이 자기 입으로 부끄럽지만 한 눈에 반했다는 식으로 이실직고 해버린 다음날부터. 데빌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남학생이 짝사랑하는 그 몬무스를 빌미로 협박을 하면서 때리고, 돈을 뜯는 선 넘은 행위들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남학생은 경찰에 신고하는 일 따위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데빌에게 든든한 체셔와 헬하운드라는 동료가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기는 뭔가? 전형적인 아싸라 친한 친구도 없다. 그나마 친구였던 데빌에게 마음을 풀 수 있었는데.


 참다 못해 화를 내며 대체 왜 이러냐며 언성을 높였을 때. 헬하운드가 자신을 두들겨패 넘어트린 다음,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들었던.


"좆 같으니까."


 라는 대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서러움에 눈물바다를 만드는 걸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는 다리가 무거웠다. 알바처에서 점장이 돈을 안 주는데 어떻게 다음 주까지 20만원을 만들어야 하는가? 점장에게 엎드려 빌면서 제발 돈을 달라고 하더라도 알바 따위보다 대기업 회장 딸내미가 더 중요할테다. 평화롭게 덕질이나 하던 입장에서 굿즈 같은 것을 파는 행위는 절대로 할 수 없었으나 소꿉친구 데빌의 횡포에 하나둘 처리하다보니 이제 값이 나갈만한 것도 없어졌다. 


 도무지 가망이 보이지 않아 또 눈물이 나와 소매로 눈물을 닦다가 어디선가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쏫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런!"


 고개를 돌려보니 풍성한 고리를 자랑하는 교부 타누키가 무언가를 허겁지겁 주워서 수상해보이는 백에 약통으로 보이는 것들을 주워담고 있었다.


 매우 곤란해 보이는 상황에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남학생에게는 본능처럼 교부 타누키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약통은 모두 백 안으로 들어갔고, 교부 타누키는 감사 인사를 하며 등을 돌려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아직 수중에 하나 남아 있던 것이 있다며 돌려주겠다고 하는 남학생이나 교부 타누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건 너한테 필요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