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창고를 정리하다 보니 안에서 봉제인형이 나왔다. 


와, 이게 여기 있었네.


어릴 때 끼고 다녔던 애착 인형.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다. 


그걸 보니까 자연스레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건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상상친구'라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상상친구란, 일부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했다고 여기는 존재로, 그 당시의 경험과 상상이 합쳐져 만들어진 공상의 무언가였다. 


어릴 때는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자신이 상상해낸 존재를 진짜 친구 같은 걸로 여긴다나 뭐라나 그랬던 것 같은데. 


저 봉제인형을 보니 떠올랐다. 


내게도 그런 상상친구가 있었다.


우리 집은 맞벌이여서 부모님께서 집에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낮 시간에는 집에 나 혼자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외로웠다. 


당시 내 나이가 8살인가 9살인가 그랬을 텐데, 당시에는 시간을 때울 게 TV밖에 없었던지라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이미 봤던 것들이나 재미없는 것들만 방영한다.


친구를 불러 놀려고 해도 모두 학원에 가 있어 부를 수 없다. 


이럴 거면 나도 그냥 학원에 다닐 걸 그랬어.  


그런 생각을 하며 외로이 지낼 때였다. 


어느 날은 설움이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대체 왜 그랬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 나는 무척이나 슬프고 괴로웠다.


그래서 내 방에서 숨죽여 울던 그때. 


내 방 벽장이 열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거기서 나온 건 마치 인형처럼 생긴 누나였다. 


"슬픈... 냄새가 나서... 찾아왔어......."


누나는 그리 말하더니 다짜고짜 나를 껴안았다. 


누나의 품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마음이 편해지는 향기를 풍기기도 했다. 


그런 곳에 안겨 있기를 잠시.


어느샌가 내 안에 있던 슬픔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울음을 그쳤고, 누나는 그걸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나와 내 상상친구, 부기 누나와의 첫 만남. 



우리가 그날 처음 만난 이후로,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을 누나와 함께했다.


어쩌다 잘못해서 엄마한테 혼났을 때도, 친구와 싸웠을 때도, 하기 싫은 공부를 할 때도, 우린 항상 같이 있었다. 


누나는 그러면서 꼭 나를 도와주었다.


엄마한테 혼났을 때는 나를 껴안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타일러주었고, 친구와 싸웠을 때는 친구와 화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누나도 공부하는 건 싫었는지 공부하기보다는 함께 놀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건 내 공부하기 싫다는 생각이 누나의 그런 태도로 구현된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건 우리는 그렇게 행복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식으로 계속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헤어져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는 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머릿속 어딘가에서 내게 때가 되었다는 것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부기 누나를 만날 수 없다는 그 사실. 그것 하나만 깨달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싫었다.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떼를 썼다.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고, 함께할 수 없는 거냐고. 그때 내가 크면 결혼해주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냐고. 


처절하게 울며 옷자락을 붙잡았다. 


부기 누나는 그런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면서 말했다. 본인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누나는 그리 말하며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그건 누나와 똑 닮게 생긴 봉제인형이었다.


"정 외로우면... 이걸 나라고 생각하고 대해 줘."


진짜가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내게 필요한 건 이런 인형 따위가 아니라고.


그런 말이 입에 맴돌다가 말았다.


이제 헤어져야 하는데, 누나를 더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형을 받아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우린 잠시 말을 나누었다. 대부분은 함께했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 대화를 하는 순간만큼은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도 잊고 즐겁게 떠들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정말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부기 누나가 나를 마지막으로 꼭 안아주며 말했다. 


"만약... 네가 나를 잊지 않는다면... 내가 언젠가 다시... 너를 찾아올게......."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씩씩하게 있어줘......."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또 울게 되면 다시는 누나가 나를 안 찾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난 울지 않았다. 



왜 이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잠깐 떠올려도 이렇게나 생각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기억이 진짜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만들어질 수도 있다. 


'너가 어릴 때 수영장에서 엄마 잃어버려서 울었어', 라고 주변에서 계속 말한다면 실제로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게 된다. 


내게 있어서 부기 누나도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실재한다고 몇 번이나 상상한 끝에, 정말 누나와 함께 있던 기억이 생긴 것이리라.


그걸 생각하면 이 봉제인형이 그 부기 누나인 건가?


이 인형을 토대로 그런 상상을 했다고 생각하면 얼추 설명이 됐다. 


나는 인형을 세워두고 역할극을 했던 걸까. 


하지만 만약, 어쩌면 정말로. 


그 기억이 진짜라면. 


"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인형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며 생각했다. 


이거 어디 맡기면 새것처럼 깨끗하게 만들어주려나?


그래. 얼마가 들던 맡겨보자. 그래도 추억이 있는 물건인데.


그리 생각한 순간. 


누군가 벨을 눌렀다. 


띵동~


"네, 나가요."


문을 열어주러 나가며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지금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누가 택배라도 시켰나? 그게 아니면 교회 전도하는 사람인가? 또 그것도 아니면.......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녕......."


기억 속의 누나가. 그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혹시, 날... 아직도 기억해......?"


거기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