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가난한 예술가였지. 기법이나 손재주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발상이나 표현이 예술계의 이단아와 같아서 돈을 벌기 힘들었어.

하지만 사내는 자기 예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 언젠가는 세상이 자기 예술을 알아주리라 확신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내의 작품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어. 사내는 드디어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주는 것이라 여기고 기뻐했지.

이윽고, 사내는 전시회를 열었어. 비평가 몇 명과 대여섯 명 남짓의 관람객만이 보러 온 작은 전시회였지만, 사내는 마계중앙미술관에 자기 작품이 전시된 듯 기뻐했지.

전시회가 끝난 밤, 누군가 사내가 사는 집의 문을 두들겼어. 전시회에 왔었던 랴난시였지.

사내는 자기 작품에 감동한 랴난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의 예상과는 달랐지.

랴난시는 자기가 사내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했거든.

밤중에 사내에게 영감을 속삭였다고 말했지. 그 증거로, 그녀는 사내의 각 작품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의미와 그걸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변형을 정확히 짚어냈어.

그래도 사내는 믿지 않았어. 자기 예술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남의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니, 믿고 싶지 않을 법도 했지.

랴난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그러더니 사내가 아직 어찌 표현할 지 정하지도 못한, 아직 그의 머리속에만 있는 주제를 말했지.

사내는 허물어졌어. 마음만이 아니라,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반쯤 쓰러진 채 헉헉거릴 정도였지.

그는 랴난시에게 왜 자기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냐고 물었어. 그녀는 그를 향한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지.

그는 그녀를 내보내며, 생각을 더 해야 할 것 같으니 내일쯤 다시 오라고 전했지.

그녀는 기꺼이 그러겠노라 답했어. 그녀는 그의 뮤즈였으니, 그는 당연히 자기를 받아들이리라 믿었지. 그가 쓰러진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의 자존심을 고려하면 그럴 법도 했어.


다음날, 랴난시는 다시 그의 방으로 찾아갔어.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지.

아직도 그가 고민하는가 싶었던 그녀는 그녀는 혹시 그에게 쐐기를 박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문고리를 돌렸고, 잠기지 않은 문은 삐걱거리며 열렸어.

코끝에 묵직하고 씁쓸한 냄새가 스쳤지만, 그를 향한 마음에 가득차 무시해버렸지.

그녀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섰어. 예술가의 고민은 마땅히 그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작업실의 모습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랐어.

작업실 안에 멀쩡한 물건이라고는 없었어.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했지. 이젤은 다 쓰러져있었는데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캔버스는 종이가 찢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고정핀이 몇 개씩 튕겨나가 있었지. 그리고 바닥에서 벽을 타고 천장까지 닿도록 물감으로 선이 몇 개나 그어져 있었어.

그리고 바닥의 한가운데에는 사내가 누워있었어.


랴난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지. 그가 고민중에 무언가 화가 나 이 난장을 피웠을 거라 여기고, 방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젤은 사내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쓰러져 있었고, 물감으로 그은 선도 사내에게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였어.

이 모든 난장판의 중심이 누워있는 사내인게 분명했지. 그리고 그의 예술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던 랴난시는, 이 광경이 사내에게서 무언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임을 알아챘지. 그런데, 이렇게 격렬하게 무언가를 방출했다면 그 껍데기인 사내는 어떻게 된 거지? 불안해진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 몸을 흔들었어. 그의 목이 힘없이 꺾여 얼굴이 드러나고,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지.


그는 죽어있었어.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는 곧 무언가에 부딪쳤어. 그녀가 들어온 문 바로 옆에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탁상이었지. 그리고, 이 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물건이기도 했어.

그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문진에 눌려 날아가지 않도록 보존되어 있었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의 내용을 살폈어.

종이의 앞면에는 작품의 이름을 표기하는 식으로 꺽쇠 안에 든 '진실'이라는 두 글자와 사내의 서명이 있었지. 사내는 자기 의지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걸 작품으로 이용한거야.

그리고, 종이의 뒷면은 사내의 유서였어. '진실'을 제외한 자기의 모든 작품에서 자기 서명을 도려내라는 내용이었지.

랴난시는 그제서야 사내를 이해했고,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지. 그는 다른 누군가가 자기 예술을 조종하는 걸 견디지 못했던 거야. 랴난시가 불어넣은 영감과 자기 예술을 모조리 배출하는 것이 '진실'의 의미였지. 그리하여 예술이 비워진 예술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시체가 되었지. 사내는 최후의 작품만은 랴난시의 영감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작품으로 남긴거야.

랴난시는 비틀거리며 죽은 사내의 집에서 떠났고, 그 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


누가 이런 내용의 소설 좀 써주면 안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