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개

나(이야기의 주요 화자)


나의 권속


언니


동생


동생의 권속


사냥꾼 협회 협회장


하얀 여자(전 가문의 권속)


흡혈귀와의 약속했던 정기 연락 시간이 되었다.


이전에 빙의당했을때 처럼 나는 손발을 구속당한채로, 눈에는 안대를 씌워져서, 나를 위해, 정확하게는 내 몸에 빙의할 흡혈귀를 견제하기 위해 방 한가운데 갖춰진 온갖 부적과 진 위로 옮겨졌다.


이번 만남을 준비하는동안 협회장은 이번 기회에 그 콧대만 높은 흡혈귀의 콧대를 꺾어놓겠다면서 아주 열성적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그 흡혈귀에 대한 우리 협회의 의심이, 적어도 합리적인 추론이었음을 그 고압적인 생물에게 새겨줄 자료를 눈 앞에 들이밀 것이라고 한다.


물론 내 눈이 가려져있기 때문에 그저 읽어주기만 할 뿐이겠지만 말이다.


속옷 바람으로 쇠사슬에 묶여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기묘한 감각이 엄습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약속대로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 의지가 내 온 몸을 차지하도록 온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내 입이 저절로 들썩이기 시작하면서, 내 목에서 나왔으리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앳되고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약속대로 배상금도 지불했으니, 여전히 괘씸하기는 하더라도, 이제는 네놈들의 얘기를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겠구나."


"후후, 감사합니다. 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오호?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는구나? ……건방지게도."


"네, 그럴 수 밖에요. 이전에 그대 가문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증거가 되는 자료가 교차 검증이 완료되었으니까요."


"이제와서 우리 가문을 다시 고발하려는게냐?"


"물론 그건 아니죠. 그렇지만 저희의 조사 상황을 알려드리기도 할겸, 그대 가문에 대한 혐의가 적어도 정당한 것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주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좋다. 한번 시작해 보려무나."



협회장이 뭔가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아마 사전에 가져다 둔 석판의 스캔본을 읽어내려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고대의 석판은, 최근에 와서야 그것이 위조된 유물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증명되었을 뿐으로,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에 쌓인 유물이었다.


협회장은 여러가지 언어를 대입해본 끝에 간신히 주술 용도에 가까운 고대 언어로 이 석판의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협회장이 흡혈귀에게 읽어주고 있는 내용은 원본이 현대 언어와는 구조가 다른 언어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고유명사와 수식어구가 가득해서 매우 난해한 내용이었다.


사전에 협회장이 알려준 내용에 의하면, 이 석판의 내용은 어떤 예언에 관한 기록이다.


그 예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먼 미래에 오래된 심장을 가진 흡혈귀의 구세주가 홀연히 일어나, 


오래된 약속을 통해 존재하는 주술로 모든 흡혈귀들을 태양의 저주로부터 구원하려 할 것이며, 


뒤집힌 심장을 가진 적대자가 그를 방해하려 들 테니 그 적대자를 조심하라.'


전체 내용을 읊은 협회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이제 아시겠나요? 이 석판의 내용중에 '오래된 심장을 가진 이가 고대의 제단을 찾아 제물들을 바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죠?


현재 이 근방에서 이름이 알려진 가문 중에서 오래된 심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된 가문은 당신의 가문 하나 뿐이고, 


때마침 이 주변에서만 흡혈귀가 개입한듯한 불온한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래도 당신의 가문이 부조리한 의심을 샀다고 생각하나요?"



눈이 가려져서 보이기 않았지만, 협회장은 아마 지금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에 찬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흡혈귀가 내 몸에 빙의하면서 나는 내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긴 했지만, 


반대로 나는 마치 내가 흡혈귀 본인인 것처럼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흡혈귀는 협회장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은 그다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어떤가요? 이걸로 충분하겠죠? 아니면 다른 자료도 읽어드릴까요?"


"……흐음, 어디 나도 한번 그 자료를 읽어볼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주변에 누군가가 드르륵 하고 바퀴를 끄는 소리, 천 자락 흩날리는 소리, 종이 펄럭거리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곧 누군가가 내 안대를 벗겼는데, 나와 같은 말단 사냥꾼으로 추정되는 발라클라바를 뒤집어 쓴 한 직원 여자가 내 안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동식 커튼 거치대가 내 주변에 둘러져 있었으며, 그것들은 전부 두꺼운 암막커튼이었다.


……준비가 철저한 것을 보니 아마 협회장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것이 분명했다.


직원이 눈 앞의 이젤에 전지 사이즈로 인쇄된 석판의 탁본을 올려두고 나서 내 뒤로 와서 섰다.



"멋대로 눈 돌리지 말거라. 정신 사납지 않느냐. 눈도 내가 깜박일 거니까 제발 힘 좀 빼거라."



흡혈귀가 내 입을 통해 나에게 말했다.


난 익숙해지려 애쓰면서도 가능한 한 얼굴에 어떤 힘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흡혈귀는 내 눈을 뒤룩뒤룩 굴려가며 탁본을 읽어보았고, 돌연 끔찍한 광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왓핫핫핫핫하! 내 그럴 줄 알았지."


"……뭐가 그렇게 웃기신가요?"


"아니 그게, 정말 우습지 않느냐? 조사를 철저하게 했다더니 순 엉터리로 했지 않느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셨을까요?"


"아직도 건방지게 입을 나불대는구나. 좋다. 설명해주마.


'오래된 피가 제물을 바친다.' 이 구절을 보고 우리 가문을 의심한거지?"


"그런데요?"


"이 오래된 피의 주격에 쓰인 문자를 아그누스, 그 머저리가 쓴 해석표에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한거지?"


"……그런데요?"


"이 문자는 분명 주격으로 쓰는 문자가 맞지만, 이 문자는 주문을 외우는데 사용하는 주문어지?"


"……."


"그렇다는건 여기선 별도 표시가 없어도 힘의 흐름 규칙에 따라 이걸 피동형으로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


즉, 이건 네 주장대로 '오래된 피가 제물을 바친다.'라고 읽는게 아니라


'오래된 피를 제물로 바쳐진다.'라고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머저리야!"


"……!"


"어디서 주문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햇병아리가 어설프게 공부좀 했다고 나불대며 가르치려 드느냐!


애초에 이 석판의 내용은 내가 천년도 전에 이미 읽어봤던 것이다!


이런 얕은 공부로 남을 의심해서 애꿏은 사람을 다치게 하였느냐!"



점점 격양되어가는 목소리가 협회장을 문책하다가 잠시 멈췄다.


폭풍 전의 고요.


곧, 내 목구멍에서 성대가 찢어질듯한 호통이 주변 모든것을 박살내려는 듯이 내질러졌다.



"이런 엉터리 자료로 뭘 논하겠다는 것이냐! 다시 처음부터 조사하거라!"



호통과 함께 흡혈귀의 기색이 내 몸에서 사라졌고, 흡혈귀로부터 해방된 내 몸은 호통의 충격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샌드백처럼 흔들리게 되었다.


잠시간의 침묵 뒤, 직원 중 하나가 나를 쇠사슬에서 풀어주었고 나는 몇십분동안 매달려있어서 저릿저릿한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몸을 추스렸다.


그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낌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려보니, 협회장이 바닥에 몸을 웅크려앉은 채 울고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괜찮을 리 없잖아요!"



너무 섣부르게 말을 걸었는지 협회장은 되려 내게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내 존재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는지, 그녀는 혼잣말로 가슴 속 울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망할 할망구! 조금 오래 산게 뭐가 그렇게 자랑이라고! 그깟 이상한 문자 좀 안다고 꺼드럭대고는! 


대체 그런 아무도 쓰지 않을 사어를 누가 무슨 이유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의 창백했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으며, 두 눈에는 울분 가득한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잠시 씩씩거리던 그녀는 당황해서 꼴사나운 표정일 내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해요. 애꿏은 사냥꾼님한테는 화 낼 이유가 없었는데."


"아닙니다."


"……하, 진짜 나는 왜 늘 이럴까."


"……."



협회장은 이제 완전히 시무룩해져서 웅크려 앉은 채 가만히 어깨를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었고, 다른 직원들은 이를 본체만체 하면서 비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사냥꾼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저기 제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보면 /행/복/의/묘/약/이 있거든요. 그것 좀 갖다주실래요?"


"하, 하아……. 알겠습니다만, 행복의 묘약이라니……."



나는 그녀의 책상으로 가서 서랍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렇지만 서랍은 잠겨있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그렇게 몇번 덜컹거리고 있자, 협회장이 여전히 웅크려앉은 채로 거의 혼잣말 하듯 웅얼거렸다.



"문고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잡아당겨야 해요."


"그렇습니까."



과연 서랍 안에는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가 담긴 기묘한 형태의 녹색 병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건 어떤 사악한 주술로 만들어진 약물일까 궁금해 하면서 협회장에게 병을 내밀었다.


그녀는 엎드려 있다가도 내 손에서 병을 낚아채듯 빼앗아가서는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푸하~ 이렇게 마시지 않으면 살겠냐고오~"



한숨과 함께 내뱉은 그녀의 입냄새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거……혹시 술입니까?"


"그런데요오? 흡혈귀는 술도 마시면 안되나요? 술 마실 권리도 없나요오? 사냥꾼님은 참도 엄격하시네요오오?"


"아니, 저는 딱히 그런 말은……."


"이 세상에 아무도 내 편은 안들어줘어어~ 너무 억울해애애~"


"것보다 이거 잘 보니 그냥 와인이잖습니까. 대체 술에 얼마나 약한겁니까?"


"몰라요, 몰라아! 당신도오, 내가 고용한 사람이고오, 나느은 여기 주인이야아! 술 좀 마신다고 아무도 뭐라고 못해애애!"


"그러니까 저는……. 아니, 아닙니다."



나는 흡혈귀의 빙의로 피로해진 몸 상태로, 단 한잔으로 만취 상태가 된 주정뱅이 상사와 더 이상 입씨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저기요오? 이번엔 왜 무시하는건데요오? 날 봐요오. 이쪽 보라고오오오. 나아를 혼자 내버려두지마아아아……."



그랬더니 이번엔 저 혼자 시무룩해져서는 발광하다가 힘이 빠졌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늘어져버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늘어진 그녀의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야말로 한없이 주정뱅이의 이데아에 가까운 표본이 여기에 있었다.


협회장은 한참을 그렇게 늘어져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몇번 화면을 두들기더니 언제 시무룩했었냐는듯이 얼굴을 환하게 펴고 웃었다.


그녀는 돌연 손을 높게 들더니 방 안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네에~ 저어는 오늘으은 일! 쉬기로했습니다아~"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임원들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아, 도대체 누가 저 여자한테 술을 내준거야?"


"그 전에 왜 이 방에 술이 있어? 어떻게 반입한거야? 소지품 검사 철저하게 하라고 했잖아!"


"이, 이보세요, 이사님. 지금 할 일 많은거 아시지 않습니까?"



협회장은 술병을 껴안은 체 실성한듯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헤, 몰라요 몰라. 저어는 그런거어 아무것도 몰라요오~ 그럼! 지금부터 친구 만나러 가보겠숩니돠아~"


""이사님!""


"애초에 당신들은 내 일 대신하라고 내가 지금까지 키우고오 먹여살린거야아! 알아아? 그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오오~"



그 말만 남기고 협회장은 그대로 창문을 깨고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임원들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리 은인이라고 해도 매번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하면……."


"……저도 도와드립니까?"



무안하기도 했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옆에 있던 임원이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아니, 역시 됐네. 자네는 오늘 많이 피로했을테니 들어가서 쉬게."


"네, 알겠습니다."



……내 제안에 잠시나마 고민했던걸 보면 정말 절박할 정도로 일이 많았었던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들어가 쉬라고 했는데도 굳이 뻗대고 앉아서 힘 뺄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주변에 엉망으로 내던져진 내 옷을 마저 줏어입고는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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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로즈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우리 독서회에서 자주 모임을 가지던 카페로 향했다.


테이블에 우울하다는 듯 엎드려 있던 블랙로즈는 어쩐지 평상시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면서 블랙로즈의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러자마자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화악 풍겨왔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 아뇨. 괜찮아요. 저희는 친구잖아요."


"친구……. 후훗, 그렇죠. 저희는 친구죠?"


"헤헤헤."



블랙로즈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저, 죄송하지만 혹시 오늘 어머님도 따라오셨나요?"


"아뇨. 말씀하신대로 엄마 몰래 나왔어요."



사실 거짓말이다.


물론 그 아이가 내 어머니라는 말도 거짓이긴 하지만, 최근의 습격도 있고 해서 만약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비밀리에 나를 따라오라고 미리 얘기해두었다.


시선을 살짝 돌려서 블랙로즈의 등 뒤를 보자 코트와 모자로 전신을 꽁꽁싸맨 수상한 여자가, 


평소 입던 재킷을 벗고 머리를 풀고 마스크를 썼을 뿐인 동생의 권속과 함께 내게 손을 흔들었다.


……저 아이 조금 바보같은 면도 있구나.


블랙로즈는 꽤 예민한 사람이엇는지 내 시선이 잠깐 다른곳으로 향한 것을 금방 눈치챘다.



"혹시 아는 분이라도 보셨나요?"


"아, 아녜요. 신경쓰지 마세요."


"뭐, 좋아요."



블랙로즈는 고개를 푹 숙인채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는 애당초 블랙로즈의 호출에 응답했을 뿐이라 별다른 할 말도 없었고, 책 이외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라 잠자코 그녀의 용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별 말이 없길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블랙로즈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바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와, 와앗? 저기요?"



블랙로즈가 갑작스럽게 내게 안겨들었다.


내가 어린 아이의 몸인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끌어안겨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그런 기분이었던것 같다.


갑작스러운 일을 내 권속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모르겠어서 그 아이의 눈치를 살펴봤더니, 그 아이는 블랙로즈의 머리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체 저 아이는 기준이 어떤 식으로 잡혀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눈치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블랙로즈에게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저기, 혹시……."



잘 보니 블랙로즈의 테이블 앞에는 와인 병이 놓여져 있었다.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점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혹시나 민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게의 점주에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점주은 잠시 그대로 서있다가 손바닥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등을 돌려버렸다.


점주는 아무래도 조금 손님에게 무른 사람인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인간 사이의 살아있는 군상극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고 있을뿐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무심결에 술 냄새에 반응이 나와버렸는지, 블랙로즈가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블랙로즈는 팔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속상한 일이 있어서 조금 마셨어요."


"그렇군요……."


"오늘 나이트퀸님에게 만나달라고 했던 이유는 즐거운 이야기나 하면서 우울한 얘기는 잊어버리려고 했던건데 이래서야 무리네요. 정말 죄송……흑……."


"와, 와앗!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 자, 눈물 뚝."



나는 다시 나이트퀸을 안아주었다.


나이트퀸이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다시 흐느끼는 사이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주변 이목을 많이 끌어버린 듯 보였다.


이목이라곤 해도 우리집 권속들을 포함한 손님 네다섯 정도에 점주 정도지만 말이다.


점주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다른 손님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오직 내 권속만이 흥미롭다는 듯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방금 전까지 관심 없다는듯이 핸드폰만 보고있던 동생의 권속조차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눈에 띄는 행동을 그만두라는 의미로 그 아이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잠시 뒤,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나이트퀸이 내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술이 들어가서 벌개진 얼굴로 콧물을 훌쩍이다가 소맷깃으로 몇번 눈물을 닦아냈다.



"……죄송해요. 나이트퀸님 같은 어린 친구한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나이트퀸님은 어쩐지 또래 친구인것처럼 마음이 잘 맞아서 저도 모르게 의지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그래선 안됐던 거였겠죠……."


"딱히 그렇지는……."



나는 혹시나 내 정체를 들킨것인가, 하다못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른 침을 삼켰지만, 


그녀는 그다지 그런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니었던건지 별다른 추궁을 해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화제는 불편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 아, 그러고보니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그게 평소의 이지적인 이미지랑은 조금 다르신거 같아서……."



내가 생각해봐도 수상한 시도긴 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내 말을 받아주었다.



"후후, 고마워요. ……그러고보니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한 적 있었나요?"



블랙로즈는 회원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기에 별달리 짐작가는데가 없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일종의……상담원 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컨설턴트라고 해야할까요?"



블랙로즈가 무릎에 얹은 손을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도 일을 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중요한 손님을 상담하기로 되어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손님을 맞이했었는데……."



블랙로즈는 생각하는 것 만으로 감정이 울컥했는지 꼼지락거리던 두 손을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제 자료조사가 잘못돼었다면서 노발대발 하면서……갑자기 책상을 엎고 난동을 피우는 거에요."


"……그거 큰일이네요."


"그래, 자료가 잘못된것은 제 잘못이니까 지적할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쳐요.


그렇다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그 난리를 피울 것 까지는 없잖아요?


자기가 나이가 좀 많다고, 알고있는게 좀 있다고, 머저리라느니! 햇병아리라느니! 으흑흑……."



다시 입에 담는것만으로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지, 블랙로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자리에 엎드려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 또한 최근에 비슷한 일이 있던것을, 그것도 내가 조금 강하게 나왔던 일이 떠올라 가만히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이유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블랙로즈의 등을 어루만져줬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정말 심성이 못된 사람이네요."



블랙로즈가 엎드린 채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양심상 차마 그녀의 두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 시선을 돌려버렸고, 그 탓에 그녀가 내가 불편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 버린 것 같다.


블랙로즈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 소맷깃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말했다.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실수를 한게 잘못인걸요……. 중요한 일이기도 했고요. 거기다 그런주제에 저는 제 개인적인 일로 나이트퀸님을 불러내서 이렇게 푸념이나 하고 있고……정말이지 저란 여자는……흑……."


"아니, 그렇지는……."


"신경써주시는건 감사해요. 그렇지만 역시 제가 먼저 잘못해놓고 다른 사람한테 이에 대해 포장해서 푸념하는건 역시 비겁하게 보여지겠죠?"


"……."



블랙로즈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평생을 어린아이로 살아왔던 나와는 다르게, 비록 나보다 짧은 삶을 살았을게 분명할지언정, 나보다 훨씬 상냥하고 사려깊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지금도 내가 불편해 하는 것을 민감하게 캐치해서 나를 배려해주고 있지 않은가.


본인도 괴로운 일로 힘든 상태면서 말이다.


나는 이대로 마음속에 비밀을 숨긴 채로는 떳떳하게 그녀를 위로해줄 수 없으며,


그런 애매한 태도로는 내 위로가 진정으로 전해질 수 없다는 데에생각이 미쳤기에,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물론 있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다소의 양념은 쳐야겠지만…….



"……저기."


"네?"


"실은, 저 얼마전에 나쁜 사람처럼 군 일이 있었어요. ……마치 블랙로즈님이 말하신 손님처럼요."


"……."


"학원 선생님이었는데요. 자꾸만 이전 진도의 내용을 가르치려고 해서……답답한 마음에 멋대로 화를 내고 말았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거나 빼먹은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는 내용이라도 한번 더 들으면 그만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그 선생님은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일텐데……."



말을 마친 내 머리를 블랙로즈가 쓰다듬었다.


아마 내가 저지른 일을, 귀여운 투정을 부린 정도로 받아들인것 같다.


블랙로즈는 실제로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알게 된다면 놀라서 나자빠지게 될까?


나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네요. 분명 그 선생님은 본인이 선생님이라는 생각만으로 나이트퀸님의 마음을 제대로 배려하지 않은거겠죠.


"그렇지는……."


"후훗, 나이트퀸님은 상냥하시군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블랙로즈님에 비하면요."



블랙로즈는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해졌는지 얼굴에 드리워졌던 수심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녀는 얼굴에 후련한 듯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한뼘 가까이 다가와서 내게 살짝 고개를 기댔다.



"저, 저기요?"


"……잠시만, 이대로 있어도 될까요?"



내게 몸을 기댄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주변 눈치가 신경쓰이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녀는 조금 대담한 데가 있었다.


가족도 아닌데다, 설령 가족이라고 해도 나이 많은 여성이 어린 여자아이에게 몸을 기대는건 주변 이목을 끌지 않겠는가?


고개를 돌려서 점주를 봤더니, 이제는 노골적인 시선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따봉을 올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코를 움켜쥐고 황급하게 싱크대로 달려갔다.


내 권속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그 아이는 이번엔 나에게 쌍따봉을 날렸다.


……정말 저 아이의 허용되는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권속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자기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했던건지 그 아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 보였다.



"어딜 보고 계시나요?"



그때 자고 있는줄 알았을 정도로 조용히 기대고 있던 블랙로즈가 갑자기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황급하게 둘러대자(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다시 내게 어깨를 기대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저만 바라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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