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계의 항구를 지나고, 차원문을 넘어서, 저 멀리 마족의 화산이 보인다.


밤이 지나고 낮이 밝아오는데, 하늘은 여전히 적색과 회색 연기가 가득하다.

저 멀리, 화산재가 튀어오르는 광경이 한 가지를 말해준다 - 마족령 연해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갑판 위에서는 악마 하나와 인간 하나가 담소를 나눈다.


"그래, 이번엔 인간 일곱?"


"예, 순수한 연놈들로 준비했습니다요."


금테 안경을 쓰고, 째진 눈과 군데군데 파먹힌 듯한 콧수염을 가지고 비열한 쥐새끼같이 웃음짓는 남자를 보며, 악마도 같이 웃는다.


아마 천사 형사 하나가 뒤를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증거를 잡고 노예들을 구출하려고.

허나 어쩌나, 노예 상선은 한참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을.


"증거는 당연히 남겨두지 않았겠지?"


"물론입죠, 제가 몇 번이나 거래했지 않습니까요."


'멍청한 자식. 네놈 같은 인간 팔아먹는 놈들이 없었어도 인간계는 더 오래 버텼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비열한 자를 숙청할 날이 오겠지만, 당장 인간 노예가 급한 악마는 겉으로는 꾸민 미소를 쉽사리 지우지 않는 것이었다.



일등 선실 내에는 술 냄새가 가득 진동한다.

알라우네의 꿀로 담근 봉밀주부터 시작하여, 몇백년간 산 드리아드가 머물던 나무통을 살짝 그을려서 담근 버번 위스키

레프리콘들이 머물었다던 곳의 허브로 담근 리큐르, 금가루를 뿌려 장식한 코냑...


방금 칠한 페인트 냄새와 술 냄새, 목줄을 찬 파피용들의 춤, 그리고 그것들을 즐기는 마족들의 흥겨움이 선실 밖으로 살짝식 새고 있었다.


저기서는 아라크네녀가 인간 남자를 어떻게 쥐어짜내나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켄타우로스남이 인간 여자를 꿰뚫은 얘기를 하고 있다.

남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 술 이야기, 돈 이야기.


온갖 세속적이과 향락적이고 방탕한 이야기가 머무는 곳 사이에

저 구석, 암정령으로 위장한 천사는 혼자 술을 한 잔 홀짝이며 날카로운 눈으로 노예상을 찾는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내 한 달 연봉을 한 잔 술로 마시는 부르주아 새끼들.'


서빙하던 브라우니는 속으로 씨근거리며 음식을 한 둘 챙긴다.


'내 친구의 열 끼 식사를 한 입에 쳐넣는 아귀같은 새끼들, 네놈들 몫을 줄여 내 친구 몫을 좀 늘여야겠다.'


넘치는 과자와 술과 고기 중에서 일부가 슬쩍, 브라우니 몸 속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다.

하프 소리와 파피용들의 춤은 멈추지 않는다.



배 밑의 지하실은 며칠 전부터 이미 불지옥에 먼저 도착해있다.


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과 시커먼 석탄들이 지옥을 재현해내면

헬하운드 화부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삽으로 석탄을 아궁이에 쳐넣어

재현된 지옥을 직접 겪어간다.


"젠장, 이러다 보신탕이 되겠어."


양동이 가득 채운 물은 삽시간에 사라진다.


"이런 씨발. 교대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삽질은 서서히 느려지고

지옥불과 같던 불길이 그냥 화롯불처럼 바뀔 때


배의 화력이 줄고 노트수가 줄어가자

항구의 선창가에 새로 들어온 남자를 주물럭거릴 생각만 하던

범고래녀 기관장은 부지깽이를 들고 화실로 내려왔다.


"뭣들 하느냐, 이 개새끼들아! 배 속력이 느려지잖아!"


욕설 섞인 질책에 다시 헬하운드녀들은 삽을 움직인다.


'젠장 이 삽으로 저 년을 후려쳐서 아궁이에 쳐 넣어 버릴까.'

'불에도 약한 년이 우리보고 지랄이야, 썅년이.'


실제로 삽으로 후려치면 삽이 부러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화는 속으로 삼키며 묵묵히 삽을 움직인다.



"물... 무울..."


바로 옆 기관실에서 불지옥이 벌어지는 사이, 화물칸은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 물..."


목이 쩍쩍 갈라진 채로, 청년은 품 안에 물통을 입 안으로 털어넣는다.

물통은, 이틀 전에 이미 텅 빈 상태다.


찬 바람이 세차게 화물을 때린다.

차게 식은 선실과 화물과

냉담한 현실이 청년을 세차게 습격한다.


"...ㅁ...ㅜ...ㄹ..."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물칸 입구가 살짝 열리고

벌레의 날개처럼 반짝이는 요정 날개를 가진 친구가 들어온다.


"미안해, 저 새끼들이 자꾸 부려먹어서 말이야."


물과, 과자와, 술과, 고기.

일등 선실 내에서 가볍게, 뜨겁게, 당연하게 즐기는 것들이

화물칸 내에선 이토록 묵직하고 차가워도 감사하게 즐기는 것이 되었다.


예의도 감사도 모조리 집어치우고

남자는 물을 들이킨다.


"눈 꾹 감고 삼일만 더 참아. 곧 도착이야."


"아... 아아..."


납치당해 팔려온 누이를 찾은 지 몇 달이던가.

배삯이 없어 소꿉친구에게 밀항까지 부탁하던 게 며칠 전이던가.


"누이를 찾고, 인간계로 돌아오면... 우리 집안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 그거, 브라우니한테는 청혼 대사라는거 알아?"


"알고 하는 말이야."


언제 누이를 찾을지 모른다.

누이를 찾아도 돌아올 길은 막막하다.

돌아오고 나서도, 그 다음엔 뭘 할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은 얘기하고 가는 청년 앞에

요정 처녀는 생긋 웃었다.


앞으로 언제 만날 수 있을 지 모르니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크리핑 코인의 금화, 챙겼고, 마족 뿔, 구속 영장, 지도..."


천사 형사는 방에서 소지품을 정리한다.


"후, 좋아."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옷에 마법진을 체크하고, 다시 암정령의 기운을 주변에 흩뿌린다.


방으로 나와 갑판으로 나오면

저 멀리에는 화산이 마그마를 뿜고 있고

선실 안쪽에서의 음악소리와 술냄새가 바깥으로 새고 있고


자기가 쫓는 악마와 남자는 소곤거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손에는 초급 마족어 회화책

겉 모습은 어린 암정령.


누가 보아도 마계로 놀러가는 암정령이다.

누가 보아도 방금 배운 단어를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꼬마애다.


악마녀와 쥐새끼 같은 노예상 남자는 슬쩍 보고, 미소를 짓고, "안녕!"이라고 마족어로 짧게 답한 뒤

눈치 채인 것인지 채이지 않은 것인지 다시 서로 대화를 재개했다.



배는 항구로 다가간다.

수없이 많은 군상들과, 목적을 실은 채로.



p.s. 내가 좋아하는 단편 소설인 노령 근해를 패러디해봄. 좋은 작품이고 인터넷에 검색하면 전문 나오니까 한번 읽어봐. 재밌음.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monmusu/6732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