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만 주렁주렁 달린 빈농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몬붕.

체격이 좀 크고 건강한 것 밖에 특출난 게 없는 평범남이었지만 가슴 속에 품은 야망은 주변의 시골청년과는 한 차원 달랐지.


부모처럼 땅이나 파먹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살아봐야 거지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뿐이다.

출세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높은 사람이 되어서 턱짓으로 사람을 부리고 싶다.


사실 무궁한 재물이나 만인지상의 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니 범부의 소망일 뿐이었지만, 몬붕에게는 튼튼한 육체와 더불어 뛰어난 행동력과 전황을 보는 판단력, 급박한 상황에도 가장 빠르게 차선의 방안을 택할 수 있는 순발력이 있었지.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선 과감하게 적에게 가족도 팔아넘길 수 있는 비겁함, 온갖 치사한 술수를 고안해내는 잔머리, 유리한 상황에 누구보다 빨리 빌붙는 간신배 기질이지만.


인간과 마물의 전쟁이 지속되는 이 시기에, 농민의 아들이 출세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루트는 전쟁영웅이 되는 것이었지.

몬붕의 모국은 반마물국가였고,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던 군대에서는 자원입대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곤 했지.

몬붕은 부모와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교단군에 입대하게 돼.


치가 떨리는 병영부조리에 부상 혹은 귀족 출신의 기사들에겐 멸시를 받곤 했지만, 그 소인배 기질 덕에 몬붕은 일급 병사가 될 수 있었어. 높은 자들에게는 철저히 애널써킹을 해가며 자기가 맡은 병참 쪽에서 적당히 횡령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한편 윗선에 줄을 대는 데 쓰고, 눈치가 빨라서 전시행정은 기깔나게 잘 했거든.

위험한 전투 때는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 도망가서 숨어버리고, 전황이 정리되면 슬그머니 나타나는 짓도 했어. 물론 들키면 즉결처형 당할 죄지만 괜히 목숨 걸었다 죽기라도 하면 부귀고 영달이고 싸그리 날아가는 거니까.

어느 새 몬붕은 '통솔력도 있고 전투에서도 살아남는 능력있는 군인'으로 상부의 평가를 받게 되었지. 그리고 그런 몬붕에게 지휘관이 될 수 있는 길, 교단군 무술대회가 열리게 되었어. 참여자격은 기사와 극히 뛰어난 병사 일부에게만 주어졌고, 몬붕이 후자의 자격으로서 출전권을 쥐게 되었지.


그리고 그 무술대회의 최종승자는, 잇다른 참가자들의 배탈과 부상, 자진 시합포기 등으로 인하여 몬붕이 되었어.

일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가 재시합 혹은 자세한 경위 조사를 요청했지만 주최측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지. 혹시 결승 전 날 홍등가에서 우승자 놈과 같이 있었던 거와 관련 있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 들어왔지만, 문제를 제기했던 이가 어느 새 사라져버려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

결국 대회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는데다 출신도 빈농이라 별 볼일 없었는 몬붕은 하급 장교인 소대장으로 임명되는 데 그쳤지. 원래대로라면 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얽혀서 바로 밑 참모급 정도까지만 된거야. 나름대로 죽어라 노력한 몬붕으로선 분통 터지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적당히 받아들이고 나중에 출세각을 노려야만 했지.


그렇게 적당한 전투참여와 치열한 정치질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던 지휘관이 해임되고 용사인 새 지휘관이 몬붕의 상관으로 취임하게 돼.

전 지휘관도 적당히 썩은 인간이라 몬붕과 죽이 맞아 방산비리도 하고 성과조작도 했었지만 어디서 삐끗 해버렸는지 해임당한 거야. 

새로운 지휘관은 젊고 독실한 주신교단 신자로, 부정부패를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칼 같은 인물이었지. 당연하게도 용사이니만큼 무력도 엄청나게 강했고.

구 지휘관 응딩이에 숨어 여러가지로 해먹고 있었던 몬붕의 전성시대가 종언을 내리는 순간이었어.


취임되자마자 바로 행정감사를 시작한 지휘관.

나름 철저한 몬붕이 미리 장부에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아서 지휘관은 몬붕에게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아.


'다들 자네를 우수하다 말했지만, 글쎄... 난 다르게 생각되는군.'


대놓고 면전에다 그런 소리를 하지만, 계급이 깡패인지라 속으로 씨발년 하고 욕만 할 뿐 겉으로는 아첨하는 미소를 짓는 몬붕이었지.

지휘관과 알력싸움이 계속됨에 따라 몬붕의 지위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었고, 결국 마물군과의 전투에 등을 떠밀려 몬붕 소대가 참전하게 되었어.


당연하지만 마물군에게 탈탈 털린 교단군.

교단군의 신실한 군인들은 배교하느니 자진을 택하겠다 외치고 있었고, 이에 마물들은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주었어.

나름 신앙심을 지킨다고 읖어대던 주신교단의 성서 흠송이 열락의 교성으로 바뀌는 것을 만족스레 지켜보던 데몬 지휘관에게 부하가 보고를 올렸지.


'지휘관님. 방금 사로잡은 포로 중 하나가 말입니다...'

'왜지?'

'그게... 저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주신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놈이 있습니다.'


자신이 본 주신교단 병사들은 하나같이 '믿음 아니면 죽음을!' 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포로만은 사로잡히자마자 부츠 밑바닥이라도 핥을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 구걸을 하더라는 거야.

흥미가 생긴 데몬은 그 포로가 구금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지.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게는 늙은 부모님과 다섯 명의 동생들이 있습니다! 이대로 제가 죽으면 가족들은 굶어 죽는다고요!'

'에헤이... 죽이지 않는다고 몇 번을...'


웨어울프 병사 하나가 말을 이으려는 걸 옆의 고블린 병사가 옆구리를 푹 찔러 제지시켰어. 그리고는 심술궃은 미소를 띄고 몬붕에게 말을 걸었지.


'그래그래. 살려 달라고? 살려만 주면 뭐든 할 수 있나?'

'물론입죠 마물 나으리들! 말똥 치우는 일부터 밥까지! 원하시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오, 진짜? 그럼 말이지...'


고블린이 씨익 웃고는 속옷과 함께 바지춤을 내렸어. 농후한 땀냄새와 암컷의 페로몬이 후욱 코 앞까지 끼쳐 올라왔어.


'여기 한 번 깨끗하게 청소해 볼 수 있냐? 물론 타월 같은 거 쓰지 말고, 네놈 혓바닥으로 말이지...'


웨어울프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자기도 바지를 내렸어.

땀투성이 고간을 핥고 빨라는 것에 구토가 올라오는 몬붕이었지만, 마물들이 남자들을 범한 후 잡아먹는다는 정훈교육을 기억해내고는 몸서리를 쳤어. 

여기서 저 두 마물을 만족시켜서 장기적인 쓸모가 있음을 상기시켜야 살 수 있다는 계산을 마치고는, 몬붕은 자신있는 양 가슴을 탕탕 쳤어.


'제가 그 쪽으로는 자신있습죠! 부족한 솜씨지만 제가 마물 나리들에게 천당... 아니, 뭔가 한 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두 마물들이 헤벌쭉하며 몬붕의 봉사를 기대하고 있을 때, '동작 그만' 하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어.

해피타임을 방해해서 짜증난 얼굴로 돌아봤지만, 거기에는 데몬 지휘관이 있었지.

하는 수 없이 둘은 투덜거리며 옷을 입고 나가야만 했어.


순간 살았다고 안도한 몬붕이었지만, 얼음처럼 싸늘한 데몬의 눈동자를 보고 순간 얼어붙었지. 몬붕은 저 마물이 여기서 가장 지위가 높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판단했고, 그건 정답이었어.


'네가 그 목숨구걸을 하는 놈인가보군.'


설마 긍지가 없는 놈이라고 매도하려는 건가 하며 쫄아붙은 중, 데몬이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어.


'눈물콧물을 짜내는 꼴이 아주 추하기 그지없구나.'


갑자기 매도가 들어왔지만 몬붕은 그런 거 따위 상관할 일이 아니었어.


'저는 살아남고 싶습니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게 뭐가 나쁩니까?'

'네 동료들은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조차 버리겠다던데?'

'그놈의 주신 말입니까? 하! 주신이 우리에게 해 주는 게 뭐가 있다고! 저도 근 이십 년 넘게 주신께 기도드리고 별짓을 다해봤지만 뭐 부와 명예는 커녕 이렇게 포로 신세가 되어도 아무것도 보답해주는 게 없단 말이죠! 전 지금껏 제 노력으로 모든 걸 이루어 왔습니다. 주신은 무슨... 제 애비 좆밥만큼도 안 되는 호로잡것입죠.'


자기도 모르게 제 속을 털어내버린 몬붕.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뱉은 말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어.

데몬은 흥미롭게 몬붕을 바라보았지.


'그래... 그렇게나 살고 싶다고? 살아서 어떻게 하고 싶으며, 살려준다면 뭘 할 수 있지?'

'이놈은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으면 됩니다! 아... 물론 제가 여러가지 경험이 있어서리... 어떤 일이든 적당히 시켜주신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열심히 할 수 있지요... 헤헷'


목숨의 위기가 어느 덧 기회의 장으로 바뀌자 몬붕은 자기 어필을 하기 위해 데몬의 눈치를 살피며 답을 했어. 

데몬은 흥미롭게 몬붕을 바라보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로 했지.


'넌 특별히 그냥 돌려보내 주겠다. 너희 소대도. 다만 단 한가지 조건을 달도록 하지.'

'그게 무엇입니까? 시키시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너에게는 간단한 일이다. 난 너희 교단군을 최소의 손실과 노력으로 함락시키고자 하니, 너희 막사에 몸을 담은 채 내게 도움을 주면 된다.'


첩자가 되라는 거였어.

들키면 자기만 화형당할 게 아니라 가족들도 옆에서 함께 불타게 될 중죄였지.

하지만 여기서 승낙하지 않는다면...


'...'

'그래... 그러고보니 고향에 부모와 형제들이 있다고 했지? 네 마력과 비슷한 파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아마도 금방...'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몬붕의 열렬한 대답에 데몬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어.


'현명한 인간들은 이래서 좋아. 나와 같은 배에 탄 것을 환영한다, 인간. 성공하면 나도 너도 마계에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거다.'


이렇게 몬붕 소대는 상처 없이 풀려났어. 소대원 중 몇몇은 마물에게 끌려가 버렸지만 그래도 대부분 무사히 살아 있었지.

부대에 복귀하는 중, 몬붕은 고민에 잠겼어. 

자신들은 분명,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마물전의 베테랑들로 나름 중용받게 될 거야. 다른 부대에도 대마물전에 대해 조언을 위해 불려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어.

이적행위를 들키지만 남는다면, 공을 인정받고 교단군 내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지.

마물군은 교단군보다 몇 배는 강하고, 식량 사정도 좋고 사기도 뛰어났어. 교단군 지휘자인 용사가 일기당천의 강자라지만 전쟁이란 혼자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몬붕은 비리만으로 소대장 자리를 꿰찬 건 아니어서, 뭔 짓을 해도 교단군은 마물군을 못 이긴다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었어.


이렇게 복귀한 몬붕이 충실한 교단군 코스프레를 하며 스파이짓을 하는 게 보고 싶다.

데몬에게 군사기밀을 은밀히 빼돌려주고,

식수원에 미약을 푸는 한편 포로의 열매 종자를 혼입하고,

높으신 중앙귀족 마나님에게 뇌물로 마계의 물건을 진상하면서 의심하는 이들은 데몬에게 부탁해서 '암살'을 지시하고,

마물군이 철옹성에 쳐들어왔을 때 몰래 성문의 개폐장치를 고장내는 등 내부의 적 역할을 충실히 하는 걸 보고 싶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어서,

자신의 직속 상관인 용사 지휘관이 몬붕에게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호시탐탐 뭔가 내쳐버릴 구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거지.

마물에는 용서가 없는 지휘관이라 지금 하는 짓이 들키면 살아서 부귀영화는 커녕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는 신세가 되기에 몬붕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적행위를 숨기고, 충실한 주신교의 신자로 가장해야만 해.

몬붕도 용사 지휘관이 마음에 안들고 또 두렵기 그지없지만 이제와서 첩자짓을 그만둘 수는 없어서 매일 아슬아슬하게 두 세력의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하는 거지.


이런 웃픈 개그물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