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헌병이야기: https://arca.live/b/monmusu/9729560




"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 근데 왜 굳이 숨어있던 겁니까?"


이젠 헌병본부로 쓰이는 교회 안의 의무실에선 늙은 교주가 침상에 누운 채로 간병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 간병을 하고 있는 게 교단에서 치를 떨게 증오하는 언데드 마물 리치였다는 거지만.

그 옆에선 사령관이 팔짱은 낀 채로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갑자기 마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로 처들어오더군."


"사령관님 선동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헌병 완장을 찬 켄타우로스가 의무실의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아, 그래 선동꾼 새끼들이 있었지... 켈리 중위, 그 자식들 대체 왜 그런 거래?"


덩치가 커다란 켄타우로스가 안 그래도 작은 의무실로 들어오자 갑자기 비좁아지는 느낌에 리치는 눈살을 찌뿌렸지만, 사령관과 켄타우로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켈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보고서 파일 한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전부 이 교회에서 빚을 지고 있던 작자들이었습니다. 작게는 3~4골드에서 많게는 100골드더군요. 아마 기회를 틈타서 교주를 죽이려 든 걸로 보입니다. 교주가 없으면 빚을 갚을 이유도 없으니까요. 성함락 직전에 교회를 습격한 무리들도 이 작자들이었습니다."


"허허, 고리대금업을 하셨군요 교주님. 저나 교주님이나 주신님의 천국에 가기엔 글렀습니다그려."


"백골드 빌려가면 일 년 이자가 1골드 정도인 데 뭔 고리대금업이라는 건지...그냥 나한테 못 갚겠다고 말했으면 탕감해줬을 텐데."


"하여튼 호의도 사람 봐가면서 해줘야지,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새끼들한테 해주면 안 된다니까? 그래서.. 그 새끼들은 지금 뭐하고 있나?"


"현재 연병장에 묶어놓고 있습니다."


"전재산을 몰수하고, 곤장 최대형인 30대를 때려. 마물이 아니라 마력이 없는 인간 남성이 때려야해. 그리고 성 밖으로 추방시키자고."


켈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려서 의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의무실 안의 책들이나 의료도구들을 툭툭 쳐서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하지만 켄타우로스는 원체 둔하다보니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그냥 휙 나가버렸다. 그 뒤를 리치가 마치 벌레를 씹은 거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며 땅바닥에 떨어진 책과 도구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교주님! 앗, 죄송.... 괜찮으세요!"


켄타우로스가 나가자마자 바로 그 뒤를 이어 교단의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뛰쳐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면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의학책 한권을 밟았는데, 그건 리치가 아끼던 책 중 하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녀는 교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죄송해요 교주님, 제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맞아, 아무리 남자친구랑 만리장성 쌓는 게 중요하더라도 진짜 신경쓸 건 따로 있었지."


사령관은 비야냥거리며 몸을 일으켜세우더니 수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녀의 모자 안에 숨겨져 있던 토끼 귀를 확 잡아당겼다. 고통스럽게.


"아얏 아파요!"


"잘 아네, 너 아프라고 이러는 거야. 네가 마물되고 신나게 떡칠 때 교주는 광장에서 두들겨 맞고 있었지. 이해는 해, 수녀생활로 오랫동안 처녀였는데 마물이 되었으니까 쌓인 것도 많고 하고싶은 것도 많았던 거 나도 알아. 근데 말야. 일에는 순서가 있고, 이건 사람 생명이 달린 문제였어. 교주가 죽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너는? 상상도 하기 싫을껄?"


사령관은 그녀의 귀를 놓아주었고, 수녀는 울먹거리며 얼얼한 귀를 매만졌다. 침대에 누워있던 교주는 뭔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수녀를 보았지만, 리치는 노골적으로 꼴 좋다는 듯이 실실 쪼개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책을 짓밟은 댓가를 치른 거라고 할까?


"그 아이도 혼란속에서 제정신이 아니었을걸세... 그렇게 미워하지는 말아주게나."


"네, 잘 압니다. 그런데 경고차원으로요. 둘이서 뭐 얘기할 거 있으면 계속 얘기하십시오. 요하임, 자네는 밖에서 잠깐 나랑 산책 좀 하지?"


"네, 사령관님."


리치와 사령관은 이제는 웨어레빗인 수녀와 교주를 냅두고 의무실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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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전공을 치하해야겠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령관님."


"가짜 시체 만드느라 고생했지?"


리치이자 의사였던 요하임은 그동안 성 안 교회 지하실에 숨어서 계속 가짜 시체를 만들었다. 그녀의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이 특히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자네가 가짜 시체를 만들어서 진짜 마물들과 사람들이 죽지 않고 성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 물론 교회에 소규모 동굴을 설치하게 도와준 교주의 공도 있지만 말이야... 만약 가짜시체가 없었으면 곧 들켰을 거고, 성 안은 불쌍한 마물들과 그 마물들을 옹호하던 인간들의 잘린 목이 뒹굴고 있었을걸쎄."


"샌드웜 자하라 양의 공도 큽니다. 그 남편이 라메드도 그렇구요."


"하긴 둘이 없었으면 빠져나올 터널을 만들 수도 없었겠지."


말은 그렇겐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요하임한테 그 둘 부부는 도움보단 방해만 됐다. 샌드웜이 뚫은 탈출용동굴은 교회의 지하실로 연결되어있었는데, 요하임은 그 지하실에서 돼지나 각종 가축들의 시체로 가짜 시체를 만드는 작업을 하곤 했다.

문제는 자하라는 비위가 굉장히 약한 샌드웜이었고, 가짜 시체를 볼 때마다 토하고 온 몸을 뒤틀고 경련을 하는 바람에 작업이 방해되거나 들킬 뻔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라메드가 진정시켰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직 남자랑 손도 못 잡아본 요하임 앞에서 부부 두 명이 낮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는 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짓거리였다.


"뭐 군바리한테 줘야할 선물은 승진밖에 없겠지. 군의관, 이 성 안의 보건에 관련된 일은 자네에게 전권을 주겠네. 어떤가 우리의 군의관... 아니 의무사령관?"


"저는 우둔해서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요하임은 목구멍 밖으로 함성이 튀어나올 걸 간신히 막고 있었다. 빌어먹을 헌병대의 켄타우로스 새끼들이랑 재수없는 드래곤인 부사령관년까지 나를 만만히 봤겠다? 나도 이제 네년들하고 같은 급이라 이 말이야. 요하임은 군의관이었을 때도 보건관련 일은 사실상 전부 맡고 있었지만 계급이 딸려 그들에게 계속 치이고 밀렸다. 하지만 이제 그 치욕적인 나날은 끝이다!


"너무 겸손하군, 권한을 마음껏 쓰게나. 임자 뒤에는 내가 있잖아?"

 

사령관은 요하임의 경례를 받고 곧 해어졌다. 그녀는 요하임이 그동안 권력을 원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둔해서 그런 중책을 못 맡겠다고?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었다. 물론 진짜 우둔하든 말든 상관 없다. 사령관이 굳이 부사령관과 헌병대와 사이가 더럽게 나쁜 요하임에게 그런 권력을 준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셋이서 피터지게 싸우면, 사령관은 그저 고고하게 위에서 중재만 살짝해주면 다인 것이다. 즉 책임은 사실상 제로지만 권한은 무제한인 상황. 누가 이런 꿀같은 상황을 싫어하겠는가?


"부사령관 휴가 다녀왔더니 고생 좀 하겠어."


사령관은 혼자 쿡쿡거리며 길거리의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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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성관계를 하는 마물부부까지 단속하는 건 무리입니다. 군의관... 아니 의무사령관님."


"아뇨, 나는 헌병대장이 그런 일 쯤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 씨발새끼...'


헌병대장이자 켄타우로스인 알리자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틱틱대던 군의관 아니지 의.무.사.령.관. 요하임은 사령관 감투를 쓰더니 아주 자기가 왕이라도 된 듯이 지랄발광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젠 길거리에서 성관계를 하는 마물들을 단속하라고? 그러면 헌병대의 일이 2배로 늘어나는 거잖아? 이건 분명히 요하임의 사적인 제재였다. 그녀는 헌병대를 미워했으니까.


"우리가 점령한 성은 오랜 포위전으로 많이 불결해져있습니다. 길거리도 마찬가지구요. 굳이 감염의 위험성이 높은 곳에서 성관계를해서 파악할 수 없는 전염병을 만들 이유는 없죠. 그러니 단속을 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알리자르는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을 했다. 사실 그녀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요하임이 노처녀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아니 경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청결한 성관계가 어쩌고 저쩌고를 감히 논한다는말입니까? 라고 반격하면 의무사령관'님'은 쭈구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알라자르는 슬쩍 부사령관을 쳐다보았다. 부사령관은 회의에 관심자체가 없는 건지 턱을 손에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문제는 부사령관도 노처녀였다는 것인데. 그건 드래곤인 부사령관의 가장 치명적인 역린이었다.


'여기서 노처녀네, 섹스 해봤어? 따위 드립을 쳤다간 박살나는 건 너야 이 무식한 켄타우로스야.'


요하임도 알라자르가 뭐라고 반박할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드래곤의 역린을 건드린다? 그건 아무리 마왕 일족이어도 하지 않는 짓이다. 평소에 고압적으로 굴던 헌병대 놈들이 쩔쩔매는 꼬라지를 보니 웃음이 터져나올 거 같지만, 리치는 성구함에 자신의 영혼을 따로 담아 보관할 수 있어서 늘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요하임은 큰 감사를 느꼈다.


"그럼 별말 없으시면 길거리 단속도 추가하는 걸로 이번 회의를 마치겠..."


"어..? 내가 졸았나보군요."


부사령관은 기지개를 주욱 피면서 일어났다. 그녀는 하품을 하더니, 입을 쩝쩝 다셨다.


"미안한데, 지금 안건이 뭐였죠?"

 

"네, 길거리 성관계 금지에 대한 헌병대의 특별단속.."


"그거 굳이 막을 필요 없잖아요."


"네? 잘 못 들었습니다만."


지금 저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요하임은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부사령관을 쳐다보았다. 부사령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기 탁자앞에 놓여있는 문서를 비비적거렸다.


"길거리에서 해도 별 탈 안 나던데, 그걸 굳이 금지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인데요."


"저.. 실례지만 제가 작성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야외의 성관계는 감염확률이 무척 높습니다."


요하임은 자기 앞에 있는 연구보고서를 들고 흔들어댔다. 아니, 여기 이렇게 연구자료가 있는데 부사령관 네가 뭘 알겠느냐, 너도 해본적 없었으면서 그냥 닥치고 있지. 하면서 요하임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부사령관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제가 직접 해봤는데, 별일 없었다구요."


요하임은 물론 알리자르까지 뒷통수에 해머를 맞았다는 듯이 벙벙한 표정으로 부사령관을 쳐다보았다. 

부사령관은 그제서야 그들이 지은 표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것들이...


"제가 저번 주에 결혼했다는 거 다들 모르셨나본데..."


"저..어.. 음... 금시초문입니다만."


알리자르는 괜히 손바닥을 비볐다.


"전투 끝나고 저 일주일 휴가 다녀왔잖아요. 그때... 뭐... 고향 돌아가서... 네.."


"뭐... 그럼... 단속을 굳이... 경험자의 말도... 중요하니.."


"그... 그렇다면 단속은 취소..."


알리자르와 요하임은 떠뜸떠뜸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만약 평소였다면 신난 알리자르가 요하임을 갈구면서 회의가 격렬해졌겠지만, 부사령관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따위 회의는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니까.

회의는 뭔가 셋 다 뻘쭘한 상태에서 끝났고, 부사령관이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관사에서 낮잠을 자던 사령관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아니 휴가 중에 결혼했다면 말을 해주지! 내가 잠깐 주례라도 서줬을 텐데."


사령관은 부사령관한테 투덜거렸다.


"사령관 직책이 무거운데, 근무지 이탈까지 하려고?"


부사령관이 피식 웃으면서 탁자 위에 커피를 원샷해버렸다. 


"그래서 누가 상대인데... 설마 그 네 동굴관리인 에단?"


"....어.."


"진짜 징글징글했다 너나 에단이나... 몇 년을 미룬 거지? 9년?"


"구마왕시절까지 합치면 129년... 수면기 들어간 시간까지 치면 1129년?"


"1000년 넘게 진도가 안 나갔다니. 너나 걔나 제정신은 아니다. 난 씨발 그 친구 거세라도 한 줄 알았어."


"1000년은 빼..빼줘야지. 그땐 걔나 나나 잠에 들어있었잖아."


"구마왕시절부터 너넨 관계가 묘했지. 맞나?"


"그래 맞아. 묘했지...묘했어.."


부사령관의 뇌리에 1000여년 전 그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