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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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네오-상트페테르부르크, 네오-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짐을 잘 챙기시길 바라며…


기차 안에 울리는 안내 방송 덕에 옅은 잠에서 깨어난 키키모라는 여전히 자신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바실리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바실리 님. 이제 곧 도착할 거에요.”


“음…벌써?”


그는 아직도 졸린 기색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는 그에게 자신이 접어서 치워 놓았던 외투를 건네 준 뒤, 키키모라는 그와 자신의 짐을 양 손에 들고서 말했다.


“가요, 바실리 님.”


“내 짐은 내가 들어도 되는데.”


그는 영 미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역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기계 의수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철컥거리는 미약한 기계음을 냈고, 그녀는 그런 소리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 바깥의 하늘은 이미 해가 저문 지 오래 지났기에 검게 물들어 있었고, 기차에서 쭉 자기만 했기에 저녁을 먹을 시간을 놓쳤던 바실리는 허기를 느끼고서 키키모라에게 물었다.


“뭐라도 먹고 갈까, 키키?”


“아뇨,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던 그녀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뺏으며,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뭐라도 먹고 가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역 바깥의 포장마차로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어? 너 바실리 아니니? 오랜만이네.”


포장마차에서 샤와르마를 팔던 리자드맨은 그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남편 분은 웬일로 안 나오셨네요?”


“날이 추워서 감기 걸리기 전에 일찍 들어가라고 했어. 입대했다고 들었었는데, 전쟁이 끝나서 돌아온 거니?”


“그렇죠. 샤와르마 두 개 주세요. 아, 크바스도 있어요?”


“당연히 있지. 그나저나 옆에 있는 애는 누구니? 친구?”


“비슷해요.”


이내 리자드맨이 건넨 샤와르마를 두 사람은 하나씩 손에 들고서 벤치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밀 전병 안에 싸인 돼지고기와 야채, 그리고 요구르트 소스가 제대로 어우러져 나는 따듯한 맛에, 키키모라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목 안 막혀?”


“괜찮아요.”


“그래도 이것 좀 마셔.”


바실리는 크바스 병을 그녀에게 건넸고, 키키모라는 크바스 병을 받아 마셨다.


“…술 생각 나네요.”


그녀는 크바스 병을 그에게 다시 건네며 말했다.


“나도.”


그는 병을 벤치 위에 내려놓으며 밤이 되어 밝게 빛나는 네오-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심 속에 높게 선 고층건물들은 도심 주변의 옛 건축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과 괴상한 대조를 이루며 화려히 빛나고 있었다.


“돌아오니까 느낌이 이상하네. 전쟁이 났을 때만 해도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아까 저 노점상 분과는…아는 사이신가요?”


“나탈리아 아줌마?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부터 저기서 노점을 하셨어. 그때부터 알고 지냈고.”


“…어리셨을 때부터 여기서 사신 건가요?”


“응. 여기서 나고, 여기서 자라고, 여기서 계속 살았지.”


“토박이셨군요.”


“그래. 다 먹었으면 마트 들렸다가 집으로 갈까? 술이 땡긴다면서.”


“좋죠.”


그녀는 샤와르마를 마저 해치운 뒤, 포장지를 구겨 쓰레기통 속으로 던졌다.

 



잠시 뒤, 키키모라는 짐가방을, 바실리는 양 손에 보드카가 담긴 종이가방을 든 채로 택시에서 내렸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키키모라는 한 눈에 보아도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2층짜리 단독주택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혼자 사셨던 거예요?”


“응. 외로웠겠지?”


그는 그녀에게 농담을 던지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집의 문을 열었다.


키키모라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 바실리는 집의 전등을 켰고, 이내 집 안의 전등은 집의 고풍스러운 가구들을 비추었다.


“가구 취향이…되게 고상하시네요.”


“우리 부모님 취향이었어. 아직은 쓸 만하니까 쓰는 거지…딱히 내 취향은 아니야.”


그는 현관 옆의 서랍장 위에 쌓인 먼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술이나 마신 다음에 그냥 자고…내일 같이 청소하자.”


키키모라는 그 말을 듣자 마자 자신의 혈관 속 키키모라의 피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가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서 애써 집안에 쌓인 먼지와 그 외의 것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부엌으로 향한 두 사람은 이내 부엌의 옆에 있는 다이닝 룸의 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대충 닦아낸 뒤, 그 위에 술병을 꺼내 놓았다.

바실리는 안줏거리가 든 종이가방을 들더니, 부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접시랑 잔 씻어서 올게.”


“제가-“


“오늘은 내가 할게, 키키 오늘은 네가 손님이니까.”


그대로 부엌으로 가는 그를 힐끔 쳐다보던 키키는 그가 이내 접시와 잔을 씻더니 그 넓은 등으로 조리대를 가리고 서서 무언가를 급히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커다란 덩치로 자신이 하는 일을 가리려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며, 키키모라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바실리는 이내 두 개의 작은 잔과 접시를 두 손에 나눠 들고서 그녀에게로 왔고, 키키는 그가 접시에 무엇을 그리 급히 올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건…살라미네요?”


그는 급히 만든 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살라미 카나페를 만들어 온 것이었다.


“…그래도 술 마시는데 살라미랑 빵 조각만 집어먹긴 좀 그럴 것 같아서 빨리 만들어 봤어.”


“급하게 만드신 것 치고는 꽤 잘 만드신 것 같은데요?”


키키는 보드카의 뚜껑을 따 잔에 따른 뒤, 그에게 잔을 건넸다.


바실리는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빼 자리에 앉은 뒤, 잔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뭔가 멋진 건배사를 해 보고 싶었는데, 까먹었어.”


키키는 그 말을 듣고서 웃더니, 이내 자신의 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도 같이 잘 지내봐요, 바실리 님.”


“그래.”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부딪히고서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지나가는 보드카의 뜨거운 감각에, 두 사람은 동시에 크으-하는 소리를 냈다.


“한 잔 더 할까요?”


키키는 그렇게 말하며 살라미 카나페를 하나 집어서 입 속으로 넣었다.


“그래.”


바실리는 그와 키키의 잔에 또 보드카를 채우며 답했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열 잔이 되고, 어느새 빈 보드카 병들이 책상 위를 굴러다니게 될 무렵이었다.


키키는 어느새 취기가 많이 올라 달꾹거리고 있었고, 어느새 자신들이 사 왔던 보드카를 전부 마셔버렸다는 걸 본 바실리는 그 또한 취기가 올라와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들어 1층의 손님방으로 향했다.


2층에는 더 편한 침대가 있는 그의 방과 부모의 방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 또한 취했기에 자신이 그녀를 2층까지 데리고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층의 손님방까지 그녀를 안고서 데려간 그는 이미 반쯤 잠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고, 그녀가 덮을 이불을 찾기 위해 장롱을 열었다.


이불 위에 먼지가 두껍게 쌓인 것을 본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불을 들고서 현관 밖으로 나가 이불을 털었다.


몇 년 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이불이었지만 그것보다 딱히 상태가 좋은 침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먼지만을 털어낸 이불을 들고 다시 손님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 덕에 취했던 정신이 약간 돌아온 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이불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한편으로 그 사이에 잠들었던 키키는 밤공기를 맞아 차가워진 이불이 살에 닿자 눈을 살짝 떴다.


그녀의 눈 앞에는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그가 있었고, 여전히 술에 취해 몽롱했던 그녀는 본능에 따라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바실리…님…”


그녀가 그를 끌어당긴 탓에, 그녀는 그의 귀에 거의 숨을 불어넣듯이 말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찬 공기를 맞아 물러갔던 취기가 그녀의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 덕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낀 그는 그녀에게서 물러나려 했지만, 그녀의 팔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그를 꼭 안은 채로 그의 귀에 이어서 속삭였다.


“주인님…”


그 한 마디에 바실리의 얼굴은 한껏 달아올랐다.


기차에서 주인님이란 호칭을 들었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녀와 밀착한 상태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의 심장은 그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무겁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것에 덩달아 그의 숨결 또한 가빠졌고, 자신의 목 위로 쏟아지는 간지러운 숨결에 키키는 눈을 떴다.


그녀는 그가 참으로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자신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보고서 그의 목을 놓아주었다.


겨우 그녀의 품 속에서 해방된 그는 급히 뒤로 물러나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했지만…


“…주인님…안아주세요…”


양 팔을 벌리고 포옹을 조르는 그녀 덕에 그의 얼굴은 더욱 화끈거리기만 했다.


안 그래도 올라오던 취기는 그녀 덕에 올라온 열기와 섞여 그의 몸과 머리를 달궜고,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녀의 품 속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아래쪽, 그러니까 그녀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은 그를 흘깃 내려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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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와르마

대충 밀전병 위에다 케밥 기계에서 바로 썰어낸 고기를 양파, 오이, 토마토, 요구르트 소스 등을 함께 담아 즉석에서 만다음 살짝 구워서 만든다.


크바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구 소련 구성국들과 폴란드 등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 생산/소비되는 저알코올 양조주.

(알콜 함량이 있긴 한데, 러시아답게 도수 1~2 미만은 술로 취급 안해서 러시아에서는 미성년자도 사서 마실 수 있음.)


+러시아에서는 술안주로 별걸 다 먹던데, 난 그나마 살라미가 입에 맞아서 넣었음. 연어알 빵 위에 올려먹는건 이해 못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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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조아


오늘도 짧고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