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개인 채널

한적한 공원,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 위.

 거기엔 보기 드문 머리색의 두 여자가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지 며칠 됐지?”

 “글쎄? 음. 잠깐만. 아마도..”

 “그걸 무슨 손으로 세어보고 앉아있어. 그냥 대충 짐작해서 말하면 될 거 아냐.”


 청발의 여자, 라피스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적발의 여자, 스피넬은 이마에 손을 짚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라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더니 빙긋 웃으며 스피넬을 바라봤다.


 “…역시 모르겠어! 첫 날의 기억이 아직도 가물가물해!”

 “기대한 내가 바보같네.”

 “아, 그래도. 내가 너랑 여기에 있는 건 오늘로 아흐레째야. 그건 확실해.”

 “그건 왜 기억하고 있어?”


 자신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스피넬에게 라피스는 되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을 왜 까먹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윽고 예상치 못한 말에 자신의 머리색과 같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낀 스피넬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길, 바보 같은 녀석.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내뱉고 있어.

 속으로 방금의 장면을 곱씹으며 달아오른 양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피스는 짓궂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평상시 스피넬을 생각하면 지금 모습은,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럴 때 즐겨두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키득거린 그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라피스와 스피넬. 스피넬과 라피스.

 이 둘은 빈말로라도 선한 사람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악행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저 ‘흥미가 동하면 하고 아니라면 하지 않는다.’란 간단한 논리.

 그리고 둘의 입장에서 이세계인 현대로 넘어왔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무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녔지만, 그것 역시 별일이 아니었다.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밤이 되고 자신들에게 저열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코웃음 칠 수준이었다. 되려 자신들에게 돈과─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색종이로 보였다.─ 카드를 ─이것 역시 그냥 장난감 같은 건 줄 알았다.─ 빼앗기고 눈물까지 빼게 만들어줬으니.

 그렇게 수중에 재화가 들어오자 여유로워진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게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 세계는 둘이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평화로운’ 세계라는 것이었다.


 거리에 누구도 무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겁도 없이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닌다거나, 적들이나 몬스터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조잡한 목책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어떤 세계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자 스피넬과 라피스는 어떤 일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은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공원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원래 저들이 있던 세계라면 민간인이건 동종업계의 사람이건 물불 안가리고 시비걸며 싸움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날 자신들을 어떻게 해보려다 되려 당한 양아치들을 빼면 이 세계에서 누구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신기한 듯 힐끔힐끔 쳐다보고 가는 게 대부분이었고 이따금 자신들에게 얼굴을 붉히며 다가오는 남자들이 있었지만 상냥하게 중지를 세워 올리는 것으로─이게 욕이라는 건 아이들을 보며 눈치챘다.─거절을 대신했다.


 그렇게 가끔 밥 먹으러 공원을 벗어나는 일을 빼면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 위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조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원인도 모르는 상태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결국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가다 보니 둘 다 의욕을 잃어버리고 하염없이 멍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멍청이들을 쥐어패고 분수를 알려준 대가로 돈을 받을 때를 빼면 점점 반송장이 되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앉아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던 중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스피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렇게 한가롭게 있는 건 이제 그만두자. 돌아갈 단서를 찾아야해.”


 갑자기 일어난 스피넬 탓에 뒤로 넘어진 라피스는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어떤게 시발점이어서 이 세계에 왔는지 알지도 못하잖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앉아있는 건 더더욱 아닌 것 같아.”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그 말에 스피넬은 ‘음….’하고 침음성을 흘리며 오른손으로 턱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라피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 다른 방법도 없는데 의욕만 내다가 또 다시 허탈해한 채로 앉아있을 셈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뾰족한 수는 찾다보면….”

 “? 찾다보면 뭐? 왜 말을 하다 끊고 그래.”


 말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스피넬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라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피넬은 공원을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 뭐냐고 진짜~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

 “PC방.”

 “응? 뭐?”

 “PC방이란 곳은 정보가 모이는 곳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아마 정보를 사고 파는 곳이겠지.”

 “어? 그래?”


 라피스는 그랬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릴 뿐이었지만 스피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거기 조합장을 족쳐서 정보를 얻자.”

 “와! 정말 병신 같은 생각인데, 안 할 이유가 없네? 당장 하자.”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정글! 뭐하냐고!”


 라피스는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 옆에서는 스피넬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니까 항복하자고 했잖아. 이런 판은 안돼.”


 그런데도 제 화를 참지 못한 건지 채팅으로 부모님 안부부터 사는 곳까지 묻는 모습을 지켜본 스피넬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우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고 정보를 얻기 위해 여기 온 거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직까지도 분노 가득한 채팅을 치던 라피스의 목덜미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나 지금, 저녀석 사는 곳 알아내서 땅에 거꾸로 묻어줘야 하는데.”

 “나도 그거엔 흥미가 있지만, 지금 일단 우린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아. 몸도 씻고.”


 목욕탕에 가자.

 그 말에 아직 미련이 남은 모양인지 곁눈질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라피스는 아쉬운 듯 말했다.


 “…나 승급전인데?”

 “…그냥 따라와.”


 스피넬은 두 컴퓨터를 강제종료한 뒤 그대로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미련이 남은 듯 울상을 지으며 컴퓨터에 손을 뻗으며 무의미하게 ‘안 되는데.’

 하고 말하는 라피스의 모습은 처량할 뿐이었다.


 “후아.. 살 것 같군.”

 “내 승급전….”


 기분 좋은 얼굴로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스피넬과 달리 라피스는 울상을 지으며 앉아있었다.

 오후 2시라는 어중간한 시간대인 덕인지 탕에는 둘 뿐이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잠깐 서로 침묵을 지켰다.


 탕에서 나온 둘은 간단하게 몸의 물기를 닦아낸 뒤 옷을 입고서 바나나우유를 두개 구입─


 “아, 난 딸기우유.”


 바나나우유와 딸기우유를 하나씩 구매했다.


 “캬하! 키히힛. 녹는다~ 정말 좋다구.”

 “…뭐, 확실히 나쁘진 않지만.”

 “그나저나, 우리. 이제 어떻게 해?”

 “글쎄. 뭐, 한가지 조사해둔 것은 있다만.”


 스피넬은 바지 주머니에서 곱게 접어둔 종이 한 장을 꺼내 팔락였다.


 “어? 같이 게임만 한 거 아니었나. 그게 뭔데?”

 “나X위키란 곳에서 발견한 ‘다른 세계에 가는 법’이다. 놀 땐 놀더라도 우선순위 일을 먼저 해야하는 법이니까.”

 “오. 대단해! 대단해!”


 라피스는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스피넬 쪽으로 다가가 접힌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내용이 뭔데?”

 “…성급하긴. 지금부터 같이 보면 되겠군.”


 바스락 거리며 펼친 종이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무언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너, 글씨체 꽤 귀엽네.”

 “그건 중요치 않다. 자 봐라.”

 “어디보자. 준비물. 10층 이상의 건물에 있는 엘리베이터?”


 첫 대목부터 아리송한 부분이 나오자 라피스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게 왜 필요하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겠지.”

 “그건 그렇다치고. 이거 조금 이상해. 4층, 2층, 6층, 2층, 10층을 눌러야한다. 뭐지? 왜 이렇게 복잡한거야?”

 “그 또한 모르지만 해야한다면 해야겠지.”


 그 모습에 라피스는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스피넬을 의심섞인 눈초리로 바라봤다.


 “…정말 이거 되는거야?”




 “이게 되네.”


 익숙한 풍경. 거리에 돌아다니는 모든 게 익숙한 그 곳이었다.


 “흠, 뭐. 성공적이군. 내 조사는 틀리지 않았다.”


 어딘가 뿌듯해하는 모습에 라피스는 결과가 좋으면 됐지.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문득, 못다한 일이 생각이 나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스피넬. 나, 승급전은 하고 싶었는데.”


 잠깐 돌아갔다 오자.

 그렇게 말하자 스피넬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안되겠군.”


 무슨 소리냐는 듯한 라피스의 모습에 스피넬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 법은 조사하지 않았다.”

 “…스피네에에엘!!”


 나 다시 돌아갈래!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라피스의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