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편

2편

3편

4편

5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부적으로 아이를 갖게 될 리가 없잖아.”

 

‘해월신당’에서 돌아오는 길, 남편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랑하는 남자지만 내가 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무심하게 말하는 것이 서운했다. 심지어 그는 내가 두 번 연속으로 유산하자, 그냥 아이 없이 딩크로 살자고 말하기까지 했다. 딴에는 나를 위한 말이었겠지만, 오히려 그 쿨한 태도가 나를 더 빈정 상하게 했다. 친구들 얘기만 들어봐도 보통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남편 쪽이고, 여자는 망설이는 게 보통이라던데. 임신하면 몸도 망가지고 책임도 늘어나니까 가능하면 자유를 더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헌데, 우리 집은 정반대였다. 남편은 형제나 부모에 관한 콤플렉스 없이 사랑만 받고 자라서 그런지 가족의 소중함을 모른다. 고아의 삶이 어떤 건지, 의지하고 의존할 곳 없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화가 났지만 싸움이 커질까 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신녀님이 준 부적을 쥐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기분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지하게 된다.

 

‘최근에 큰 충격을 받았구나? 자네의 몸이 거부하고 있어. 아이의 혼이 들어오는 것을.’

 

친구의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신녀님은 나와 남편을 앞에 두고 몇 가지 사실을 신통하게 맞추더니, 내내 미심쩍어 하는 남편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집사람, 즉, 나와 단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고. 남편이 자리를 뜬 뒤, 그녀는 내게 몸을 가까이하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자네의 몸이 아이의 혼을 거부하니까 수정이 되더라도 아이가 완성되지가 않는 거야. 원래 아이가 태어나려면 육(肉)과 더불어 혼(魂)이 결합해야 하거든. 더 안 좋은 얘기 들려줄까? 계속 아이의 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녀가 정기 주고받기만을 반복해서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야.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요즘 자페아가 많이 태어나는 이유도 성적 타락이라는 거 알고 있었나?’

 

나는 겁에 질려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괜히 온 건가?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머릿속은 신녀님의 말을 부인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당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나는 어엿한 지성인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나이도 이제 서른이다. 주변에선 다들 아직 내가 젊다고, 오히려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는 말까지 하지만 안심되진 않았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슬슬 노산이다. 과학적으로는 말이다. 요즘은 트렌드가 다 늦은 결혼이라곤 하지만 육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노산은 위험하다. 앞서 두 번의 유산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십대에 이미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을 텐데. 그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도와주세요, 신녀님.’

 

내 간절한 말에 신녀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의 문제만은 아니야. 자네가 그렇게 마음을 닫게 된 건 자네 남편 탓이 커. 남편의 취향이 괴팍하지? 그걸 듣고 자네가 충격을 받은 거고. 내 말이 틀린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용한 신녀님이다. 미신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맞추다니. 남편도 나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갖기 위해 신혼 때부터 최소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 심할 때는 이틀에 한 번 섹스를 요구했다. 남편이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운동도 권유하고 보양식이라는 보양식은 다 먹이면서. 

 

내가 강압적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노력했다. 남편에게 아기 씨앗을 달라고 요구만 한 게 아니다. 그가 피로한 날에는(사실상 대부분이다) 내가 적극 나섰다. 남편은 누워만 있어도 내가 열심히 위에서 움직이면서 사정을 시켰다. 남편은 우리 관계가 기계적이라고 성토했지만 상관없었다. 즐기는 섹스는 나중에 해도 된다. 그러다 보니, 결혼 후 언제부턴가는 남편의 정액을 보지 안에 담고 잠들지 않으면, 양치를 안 한 것처럼 찝찝했다.

 

‘자네는 여러 명의 남편을 둘 팔자야.’

 

신녀님의 말에 나는 경악했다. 여러 명의 남편? 과부가 될 팔자라는 말인가? 중학생 때부터 내 꿈은 한결같았다. 가족들과 멀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친구의 말이나 소풍 때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친구를 보면 늘 부러웠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됐지만 내 아이에게는 그런 고독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아이는 둘 정도 낳아서 남편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 나는 고아였지만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잠시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건강하다. 언젠가 어느 도사님께 사주를 봤었는데, 남편과 나는 궁합이 잘 맞고, 서로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했었다. 남편이 상당한 고집쟁이라 고생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내인 내가 지혜롭게 잘 맞춰주면 어느 부부 못지 않은 잉꼬 부부가 될 거라고 했다. 또 그도, 나도, 장수 팔자라고 했으니 사고 날 일도 없다. 과학적으로는 그의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최소 일흔에서 팔순까진 사셨다. 내 부모님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나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다. 남편은 듬직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나를 잘 다독여주었다. 겉으로만 차분하지 사실은 늘 불안의 소용돌이에서 살고, 살아온 나와 달리, 남편은 진중하고 중심이 곧추 서 있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일 것이다. 

 

우리 의견이 갈리는 것은 딱 하나, 아이를 갖는 문제였는데, 그것도 섹스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갈등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여러 명의 남편을 둘 팔자’는 내가 과부가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그럴 리가. 남편은 부모도 없이 자란 나의 배경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나처럼 가진 것 없는 여자와 선뜻 결혼해주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뼛 속 깊이 감사를 느끼고 있다. 그를 배신할 일은 없다. 다행히 타고난 게 무덤덤해서인지 딱히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헌데, 최근 남편이 내게 한 제안은 비정상의 극단이었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진심이야? 나는 따져 물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세 번 정도 같은 말을 했다. 마지막엔 술에 취해서 꽤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도 진심으로 화를 냈다. 한동안 충격에 빠져 각방을 썼을 정도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건 맞을까? 세상에 특이 취향의 성벽이 많다는 얘긴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피우는 걸 보고 싶다니, 이건 

 

무슨 정신병자일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신녀님이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망설였다. 여기서 그냥 인정하면 남편은 뭐가 되냐고. 남편의 취향은 남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야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물론 그의 욕망에 부응할 생각은 없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로 임신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입양처럼. 그렇게 생긴 아이는 남편과 나의 사이를 돈독하고 끈끈하게 만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려니 했지만, 신녀님께도 말씀드리는 게 그의 얼굴에 먹칠하는 건 아닌가? 부부 관계라는 것은 둘만의 일이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다. 내 엉덩이에 점 세 개가 있다는 걸, 다른 남자가 안다는 건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그걸 주제로 남편과 그 남자, 혹은 남자들이 얘기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니. 있을 수 없다.

 

‘이건 운명이라 바꿀 수가 없어.’

‘… 여러 명의 남편을 두는 것 말인가요?’

‘그래. 그건 받아들여야 해.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지? 그러려면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돼. 남편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그래야 자네 안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거야. 그게 있어야, 즉, 남녀의 교합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야 아이의 혼이 들어올 거고.’

‘남편을 여럿 둔다는 건, 제가 바람을 피우거나, 그런단 말씀이신가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 따위 피우고 싶지 않다. 불륜이라니, 최악이다. 그런 걸 하는 사람은 내가 평생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불륜을? 왜? 뭣 때문에?

 

‘전 남편을 사랑해요!’

‘사랑하지만 만족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야.’

‘남편이, 저한테… 만족을 못한다구요?’

‘자네와 마찬가지로.’

 

남편이 내게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다름 아닌, 신녀님에게도 말하기 민망한 최악의 성벽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솔직히 말하면 남편과의 섹스는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의 정액이 보지 안에서 질퍽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잠드는 것이 내 유일한 즐거움이긴 했지만, 그 과정까지는 지난하고 지지부진했다. 남편은 지나치게 오래 끌거나 지나치게 빨리 쌌다. 주로 후자였다. 게다가 반복되는 섹스에 남편도 내가 지루해졌는지 언제부턴가는 애무도 같은 방식으로만 했다. 체위는 내가 정상위나 여상상위 정도만 고집한 게 있긴 하다. 솔직히 나는 그와의 섹스에서 쾌감을 원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으려면 자위를 해도 된다. 그것도 굳이 하고 싶진 않지만. 우선은 아이를 갖는 게 먼저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에. 유일한 내 관심사는 남편의 정액이 더 끈적거리고 농밀해지는 것이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보양식을 먹이고 운동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정액은 물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만 짙었고, 자지도 오래 만져주지 않으면 발기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남편 탓만 하고 싶진 않지만, 그의 정력 상태가, 불량한 정자가 불임의 원인일 수도 있으니.

 

‘교합을 즐겨야 돼.’

‘… 즐겨야 된다고요?’

 

신녀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교합을 즐기지 않으면 아이의 혼이 들어오지 않아. 바꿔 생각해보게. 자네 같으면 매일이 잔칫날 같은 화목한 집에 들어서고 싶겠나, 상갓집 같이 침울한 집에 들어가고 싶겠나? 당연한 소리야. 아이의 혼도 화목한 집을 선호하네. 여러 남편을 두는 건 그 과정이 될 거야. 교합의 즐거움을 알지 않으면, 영원히 아이의 혼은 들어오지 않아. 그렇게 생긴 아이도 멀쩡할 리 없고. 내 말 유념하도록 해. 부적은 여기 써주도록 하지.’

 

신녀님이 준 부적을 받고 일어서려는 때, 그녀가 덧붙였다.

 

‘자네에겐 선택지가 두 가지 있네. 여러 명의 남편을 갖고 평생 그들과 함께 사는 것, 혹은 그들에게서 교합의 즐거움을 깨닫고,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권은 자네에게 있어.’

‘말도 안 되잖아요.’

 

나는 부인했다.

 

‘여러 남편이랑 함께 살다가 남편에게 돌아가라고요?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자기 아내가 다른 남편들이랑 살다가 돌아와도 받아줄 남편이 어딨냐고요.’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신녀님이 말했다.

 

‘자네 남편이 자네를 받아주리라는 걸, 알지 않나? 중요한 건 자네 마음이야.’

 

그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용한 신녀님은 정말 뭐든 알고 계시구나. 그녀가 모시는 신님이 나와 남편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체된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남편이 무심하게 말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부적으로 아이를 갖게 될 리가 없잖아.”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신녀님의 부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남편은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래, 아마 별 생각 없이 말했을 것이다. 굳이 내 기분을 망칠 만큼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악의 없음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뿐. 귀찮고 피곤할지도 모르지. 그의 눈에는 지금 우리는 고작 부적 하나를 챙기러 강원도까지 차를 몰고 온 셈이었으니까. 그는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그 무기력함은 침대에서도 이어졌다. 낮에는 무기력해도 밤에는 돌변하는 남편들이 있다는데 남편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일관되게 조용하고 차분했고, 약했다. 그에게 주말은 오직 쉬기 위한 시간. 아이를 갖는 일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이기에, 그런 것에 집착하는 나는 고리타분하고,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배운 나는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반대편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간, 하늘이 밝아지는 걸 봤다.

 

“…….”

 

그 빛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으며, 우리는 곧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남편과 나는 어느 산속에 누워 있었다. 처음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더 있겠나. 분명 나는, 우리는 해월신당에서 귀경하는 길이었다. 낯선 빛을 봤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데 차는 없고, 남편과 나만 산속에 누워 있다. 아니, 우리만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 주위엔 몇 명의 남녀가 같이 있었다. 우리처럼 부부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외국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나, 서로를 외면하기엔 주변은 낯설었다. 본능적으로 우리 모두 이곳에서 이방인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합심해야 되는 운명이었다.

 

나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부적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것을 찾아 주변을 기웃거리는 동안 남편은 성격 좋게도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상황 파악을 했다. 그게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무해한 친화력. 하지만 내게는 다른 것보다 부적이 더 중요하고 필요했다. 실제로 주변의 남녀들도 남편이나 나 이상으로 쓸만한 정보를 아는 것 같지는 않았고.

 

“이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어떻게, 좀 주변을 살펴볼까요?”

 

남편과 의기투합해서 대화를 주도하던, 짧은 머리의 덩치 큰 남자가 말했다. 옆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게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었으나 선 굵은 외모 때문에 그것이 남성미를 더욱 증대시켜주었다. 눈썹도 짙고 콧볼도 큰 편의, 약간 매서운 인상이긴 했으나 표정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 같았다. 그가 내가 두리번거리는 걸 보더니, 다가왔다.

 

“뭐, 찾는 거 있으신가요?”

“아….”

“저는 김태근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뭔가 기대를 읽었다.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친구가 많지 않다. 고아의 피해망상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건 늘 쉽지 않았다. 때문에 결혼식 때도 서너 명의 친구만이 찾아왔을 뿐이다. 당연히 남자 사람 친구는 더욱 없었고, 남편에게는 내가 다른 남자와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척 드문 일처럼 보였을지도. 남편이 눈을 빛냈다. 이 와중에, 내가 이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물론 그는 이렇게 핑계를 댈 거다. 서은아, 네가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지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괜히 해월신당의 신녀님 말도 떠올랐다. 나도 모르는 음침한 욕망이 숨어 있어 있으면 어쩌지?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돼서 내가 싫어하는 짓을 하게 되나면? 불륜을 저지를 바에야 죽고 말 거다. 나는 마지못해 답했다.

 

“부적… 을 잃어버렸어요.”

“저런. 함께 찾아드리죠.”

“아뇨, 괜찮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대엽 씨 아내분이시죠?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진 몰라도 상부상조해야죠. 우리가 함께 곤란한 처지라는 건 알지 않습니까.”

“… 네, 그럼…”

“여러분-”

 

김태근은 타고난 리더인 모양이다. 이곳에 모인 여러 남녀를 순식간에 규합하더니 지휘하기 시작했다. 명목은 우리가 어딨는지 수색하는 것이었지만, 은근히 내 부적을 찾는 일도 ‘임무’ 중 하나로 끼워 넣어서 감사함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남편은 어느새 내 옆에 붙어서 그가 듬직하지 않냐고 강요하듯 물었다. 아니, 강요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대충 대답했다. 남편의 의도는 말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상황이 불편했다. 

 

“너무 떨어지지는 맙시다. 이해는 안 되지만, 여긴 숲속인 것 같으니까요.”

 

김태근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해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고속도로에 있던 우리가 숲속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한국이라기엔 지나치게 습하고 더운 날씨도 곤란했다. 나는 대부분 남편과 붙어 있었지만, 김태근이 가까이 오면, 그는 은근히 자리를 비켜줬다.

 

“믿을 수 있는 사람 같으니까, 같이 가자고. 힘도 세 보이잖아? 아무래도 우리는 조난을 당한 것 같아. 갑자기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기억도 없고. 이럴 땐 강해 보이는 사람의 뒤를 따르는 편이 제일이야. 혹시 서은아, 네 전화는 터져?”

 

당연히 전화는 터지지 않았다.

 

“…….”

 

그러던 중, 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됐다. 그들이 메디오리움 족이었다. 그 이름을 알게 된 건 나중이지만. 어쨌든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게, 그들은 갈색 피부에 남아메리카 사람의 느낌이 나는 인종이었다. 이목구비가 굉장히 진하고, 육체가 무척 단단해 보였다. 지금이야 확실히 안다. 그들의 몸은 무척 뜨겁다. 덥고 습한 곳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들이 믿는 태양신의 가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코에 이것저것을 달고 있기도 했으며,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총 같은 것도 아니고 꽤 원시적인 창이나 칼, 방패류였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식인종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전형적이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에 나를 포함해 여자들은 물러섰고, 김태근과 남편 등 남자들은 우리를 둘러쌌다.

 

“뭡니까-”

 

김태근이 외쳤다. 당연하게도 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걸지도 모른다. 일단 외양이 외국인이니까.

 

“헤, 헬로우? 켄 유 스픽 잉글리쉬-”

 

우스꽝스럽게도 남편이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히익-!”

 

쌩뚱맞긴 해도 나름 좋은 시도라고 생각했는데, 창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조우한 갈색 피부의 남자들은 우리를 둘러싸더니, 창을 잡고 휙휙 휘저었다. 그들 못지 않게, 아니, 그들 이상으로 키가 큰 김태근조차도 겁에 질려 물러났다가 안쪽에 모여 있던 여자들과 부딪쳤다. 그를 포함해 남자들은 용기를 냈다. 아내든, 여자친구든, 혹은 모르는 여자들이든, 남자로서 여자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큰 소리를 내며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갈색 피부의 남자들 중 하나가 김태근의 목에 창을 쑤셔 넣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웅크리고 있느라, 원형으로 여자들을 둘러싸고 있느라 대부분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김태근의 죽음을 목도한 이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그 중 남편도 있었다. 남편은 허, 허억, 하는 소리를 내더니, 뒤로 물러나다 나와 부딪쳤다.

 

“주, 죽었어-?!”

 

그것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이 우리를 흐트러뜨렸다. 우리는 몰이사냥을 당한 멧돼지나 사슴처럼 서로 엉겨붙기 시작했다. 김태근의 죽음으로 남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민들 중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는 나를 구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창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을 풀렸다.

 

나를 포함해 여자들은 줄에 묶였다. 일부 원주민들에 의해 어딘가로 이동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남편은 납작 엎드린 채, 공포에 질려, 창에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