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의 단호한 제지를 본 바이퍼는 뾰토롱한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탈환지 관리를 위해 지상을 몇 주씩 오가는 생활을 하던 지휘관을 오랜만에 본 바이퍼. 


이제는 자신과 자칼을 신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언더월드 퀸과, E.H에게 일어난 일의 전말을 아는 엔터 헤븐의 잔당들이 그녀를 방해하는 탓에, 바이퍼는 아우터 림을 감시하는 임무를 전보다 더 힘겹게 처리하고 있었다.


지휘관의 부재중에 임무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그 피로감을 지휘관에게 부리는 응석으로 해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초기지에 지휘관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더니, 지휘관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라피에게 제지당한 것이다. 만약 네온과 아니스가 있었다면 훨씬 더 시끄러웠겠지만, 각자 볼일이 있는지 부재중이었다.



"아핫, 너무 과격하게 경계하는 거 아냐? 난 지금 밀린 상담을 하려고 왔는데?"


"핑계가 허술하군. 정기적인 상담 기간은 정해져 있어, 지금 지휘관은 복귀하신 지 5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언제나 시크한 척 냉정하고 사무적인 말투를 고수하는 앱솔루트의 전 에이스... 바이퍼는 어느 4글자의 억양에서 미세하지만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감지하고, 입꼬리만을 움직여 공격적인 비소를 흘렸다.



"후후... '나와 함께' 라... 죽었다 살아돌아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한층 더 재수없어졌구나?"


"칭찬 고마워. 이제 돌아가 주겠어?"


"좋아. 그렇게 할게. 대신, 다음 상담은 무조건 내가 먼저야? 알겠지 자기? 그럼, 다음에 만나면..."



라피의 제지를 받아들이며 지휘관실의 문고리를 잡은 바이퍼는, 뒤를 돌아 지휘관에게 윙크를 날리며 하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키.스.해.줘.♡"



순간, 라피의 눈빛이 레드 후드를 사용하던 시절 만큼이나 험악한 열기를 내뿜었지만, 바이퍼는 그런 반응마저 즐기며 지휘관실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폰을 꺼내 블라를 확인한 바이퍼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바이퍼! 우리 구역에서 시체가 나왔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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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바이퍼는,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고 속으로 약간 놀라워했다. 그는 자신이 회유했었던 미실리스의 연구원이었으며, 그의 시신에는 커터칼로 그은 것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작 그걸로 대가를 치른 것 같아?'



자칼은 '이게 뭔 개소리야?'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바이퍼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크로우가 붙잡힌 뒤 굉장히 협소해진 자신들의 구역에, 바이퍼 본인이 미실리스를 정탐하기 위해 심어두었던 연구원의 시체... 이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폴리에게 간단한 심문을 받고, 경찰서를 나온 바이퍼는 이 구역질나는 기분과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중앙 정부의 판단 아래 아직은 쓸모가 있어서 살아남았을 뿐, 아직 자신이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음을...


하지만 아직 살아갈 이유, 그리고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람이 남아 있다.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진심을 이대로 가슴에 묻을수는 없었다.


그녀가 마치 속죄라도 하는 듯, 머스탱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유용한 정보를 가져오며 맡은 일을 열심히 해온 것은 모두가 그를 돌아보게 만들게 위해서였다.


그에게 상담한다면, 이번에도 자기 일처럼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며 바이퍼는 전초기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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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지휘관... 이제 슬슬..."



지휘관실에 노크하려던 바이퍼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니케의 신음 소리였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은 바이퍼는 창가 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흐릿한 창가 사이로 보이는 실루엣은 누가 보더라도 성인 남녀의 교접이었다.



"아닙...니다... 리버린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게... 아읏..!"



익숙하고도 낯선 신음 소리의 정체는 라피였다. 8시간 전만 해도 자신을 차갑게 막아서던 매몰찬 눈빛은 창문 너머로도 알아볼 수 있게 동공이 풀려 있었으며, 그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인 바디는 일상용 바디였는지 두 팔로 지휘관의 목을 감싸 매달린 채로 깊은 교접을 이어가고 있었다.



"순간... 농담으로 말했습니다... 제가... 아내고... 아니스와 네온이 아이들인 것...처럼... 상상했습니다.... 하아앗!... 그러니까... 거짓말은 하지...않았습니다...!"



바이퍼의 두 눈에 비친 라피의 얼굴은 지상에서 랩쳐들에게 당하던 니케들보다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인간 여성도 쉽게 담아내지 못 하는 여자로서의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 말이! 아니라고.... 인정...해주시는...겁니까.... 하아아앙~!....헉....헉.... 그럼, 상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조르는 라피를 다시 한번 번쩍 안아 든 지휘관은 그대로 라피를 들고 침대로 향했다. 이제 더는 창가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그저 라피의 신음 소리만이 은은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바이퍼는 잠시 창가 옆에 기대어, 메마른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 지금 그것을 다 가진 사람은 지휘관을 기만하고 괴롭히는 일에 일조한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지휘관의 곁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라피였다.


라피가 그것을 얻어낸 것은 누구보다도 정당한 결과였다. 이제 와서 그럴 입장도, 능력도 부족한 자신이 그것을 빼앗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바이퍼는 아까보다도 더 우울하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전초기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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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몇부작으로 하려다 치운거 리마스터함

근데 이번에도 딱 한편으로 못끝냄 후편있는데 언제 할지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