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같은 강호! 딸꾹! 무공 따위 배우는게... 아니었어!! "


축시를 지나 인시가 가까워질 무렵, 주점 거리에 한 사내가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 히끅! 사제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날 무시하고, 사형이라는 것들은 갈구기만 바쁘니... 어디가 무 고 어디가 협 이냐.. 젠장!"


여기 주정뱅이의 이름은 지란, 별호는 주존자(酒者)이며, 운남 창산시 제천문 소속 무인이다.


참고로 검보다 술을 존귀하게 여긴다 하여 이런 웃기지도 않은 별명이 붙여졌다.


"이 개만도 못한 세상! 확 망해버리..."   "큰일날 소리를 하는구만 젊은이"


"...?"


"말이 씨가 된다고, 세상 망할 뻔한걸 지켜본 나로썬 그닥 달갑지 않은 말이야."


" 아니 노인네가 나이 쳐먹었으면 뒷방에서 ..."  "술 한잔 하고 가겠는가? 내가 한잔 사겠네."


"뒷방에서 저랑 같이 한잔 하시죠 노인장. 술 하면 저 지란입니다. "


"허허.. 재밌는 젊은이구만"


지란이 노인을 따라 주점으로 들어가자 의외로 안은 정갈한 분위기였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방 구석엔 오래된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아니, 이 거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웬만한 주점은 내가 전부 꿰고 있는데..."


"최근에 개점했다네. 보다시피 구석진 곳에 있어 손님은 잘 안오지만 말이야. 그보다 술 한잔 들게"


노인이 몸소 병에 담긴 술을 잔에 따라주자 취한 와중에도 지란은 황송하듯이 받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노인장, 노인장도 한잔 받으시죠."  "그럼 사양하지 않지, 어자피 손님도 없으니"


그렇게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안주도 없이 마시던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왜 술을 좋아하는가?"


"술 좋아하는데  뭐 별 이유가 있습니까?  마시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주변인들이 다 떠나가도 이놈은 돈만 내면 내 곁에 오잖습니까? 그리고 취해있는 동안은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어 좋지요."


"허, 아직 앞날도 창창하고 젊어보이는데 현실이 괴롭다니?"

 

"젊으면 뭐합니까, 저보다 더 젊은 놈들은 진작에 절 추월하고, 저보다 늙은 놈들은 아득히 먼 곳 에 노니고 있는데.

제가 말입니다? 예? 이래봬도 어릴 땐 제가 신동 소리 듣던 놈입니다. 남들은 삼류의 경지일때 저 혼자 이류였으니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죠. "


"그런데?"


"그런데 이놈의 벽이, 빌어쳐먹을 벽이 십년을 두드려도 깨져, 저보다 한참 아래이던 녀석들이 어느새 일류 무인이 되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확실히, 남들은 저 앞에 있는데 나 혼자 뒤쳐져 있으면 그만큼 외로운 게 없지, 그래도 그 화를 술로 달래는 건 좋지 않네. 마음속 불이 술을 먹고 훨씬 더 커지거든, 이 세상이라는게 강과 같아. 멀리서 보면 장강의 줄기마냥 거칠고 빨라 보이지만 처음은 작은 시냇물이거든." 


"거 시작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거창하게도 하시는구만, 근데 나 같은 놈은 다시 시작해봤자, 이미 글렀습니다. 노인장 술이나 한병 더 주십쇼."


"나야 더 마시고 싶지만 늙은 몸이 술은 여기까지 하자는군, 오랜만에 술 좋아하는 이를 만났으니 내 선물 하나 주지.

자, 이 술은 자기 전에 딱 한잔만 마시게. 이거 꽤 귀한 술이라네"


범상치 않아보이는 술병을 챙겨주며 노인은 신신당부 했다.


 "뭐 마시고 자면 좋은 꿈이라도 꾸게 해주는 술입니까? 아니 그보다 노인장 향 불을 좀 꺼야 할것 같습니다. 뭔 연기 때문에 한치 앞도 잘 안보이니... 노인장?"


대접받은 술잔을 비우고 노인에게 말을 걸려 하자 어느새 자욱히 깔린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있었다.


"명심하게 하루 한잔이네, 그리고 병을 다 비우면 인시 무렵에 취한 채로 거리 끝을 돌아다녀 보게. 날 만나는 방법이야."


"노인장? 노인장? 존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


지란과 같이 술을 마시던 노인은 어느새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점점 감기던 눈을 뜬 지란은 어느새 술 한병을 안고 침소 위에 있었다.


"지랄 사형, 사범님께서 집합하시랍니.. 푸후! 무슨 술냄새가... 밤새 마신겁니까?"


" 이 썩을 놈이 그래도 내가 사형인데, 존함 똑바로 안 부르냐? 엉?"


"만년 이류수준에 사형 취급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십쇼. 그보다 사범님께서 집합하시랍니다."


급하게 세안을 하고 검을 챙겨 온 지란은 문파원들이 모여있는 연무장으로 달려나갔다.


"지란! 네놈은 또 술이냐!"


한 치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사범의 말에 지란은 고개를 숙였다.


"사제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네놈은 검진 합을 맞춰볼 자격도 없다! 따로 수련하여 기량이나 더 쌓아라!"


"끄응.. 알겠습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사제들의 비웃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지란은 허수아비 앞에 섰다.


"어제 분명 취한 채로 웬 노인한테 술을 얻어먹은 기억은 있는데, 그 뒤엔 어떻게 된거지? 만취한채로 문파에 돌아온건가?"


(운기)중식까지 시간이나 때울 겸 대충 허수아비를 목검으로 두드리고 있던 지란은 무언가 다른 점을 느꼈다.


'응? 숙취때문에 힘도 잘 안들어갈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아픈 골을 부여잡고 검을 두드릴 생각에 아득하였으나 몸이 상쾌하고 힘도 더 잘 들어가는 것이 영약이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설마 어제 마지막으로 마신 술이? 에이 설마, 어떤 미친놈이 영약을 처음보는 놈한테 주겠어. 숙취 없으면 좋은거지.'


몸에 묘하게 힘도 돌고 어느 때보다 상쾌한 정신으로 허수아비를 두드리자 지란은 점점 수련에 빠져들었다.


"랄.. 형!  ,지랄 사형!"


"어....엉? 뭐야!"

 

"뭐긴 뭡니까, 벌써 오시입니다. (운기)중식 시간 끝나겠어요."


"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다고?"


"지랄 사형, 뭔일 있습니까? 뭔 허수아비가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두 시진 동안 쉬지도 않고 두드리고 있습니까?"


"두 시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튼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중에 숙수들 붙잡고 억지 부리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취침 전, 지란은 침소에 들기전 노인의 조언이 생각났다.


"명심하게, 자기 전 하루에 딱 한잔만 마셔야 하네."


"보통 이런 조언은 어겨봤자 나만 손해지. 노인장이 도깨비인지 신선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짜 술 준 사람 치곤 나쁜 사람은 없으니."


전용술잔에 술을 따라 한잔 들이킨 지란은 침소에 들었다.


꿈속에서 지란은 낭인이었다.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때로는 은자 한냥에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지키기도 하였다.


대단한 문파에 속한 것도, 신병이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검은 같은 경지의 무인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빨랐다.


극한의 쾌검을 추구하여 검광이 번뜩이면 누군가의 목이 떨어뜨리던 그의 별호는 능광검(凌光劍).


그는 평생 낭인으로 살다 죽었으며, 죽기전 초절정의 경지를 이뤘다.


"허..허어억!"


'여긴 어디지? 난 분명 초절정의 경지를 이루고.... 아니 허수아비를 두드리다가...'


침소에서 일어난 지란은 혼란스러웠다. 본인이 능광검인지, 주존자 지란인지 헷갈렸다. 강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인게 엊그제 같았고, 거리에서 취한 채로 노래를 부르던 것 또한 생생했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던 그는 아직 새벽인 걸 깨닫고 검을 쥔 채로 연무장에 나갔다.


검이나 휘두르며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다.


"내가 그동안 검을 이렇게 쥐고 있었나?"


철 들때부터 계속 잡아온 검이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뭔가, 이렇게 잡으면 더 빨리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가는 대로 검을 바꿔 쥔 그는 어느새 몸이 기억하는 초식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지와 중지는 강하게, 약지는 달걀을 쥔듯이, 소지는 약지보단 강하지만 검지,중지모단 약하게.


어깨는 힘을 빼고 형(形)만 유지하는 식으로, 팔은 사선을 유지하고.


마치 수십년간 검을 휘둘러온 듯, 어째서 지금까지 이렇게 비효율적인 자세를 고집했는지 그는 의문이 들었다.


심상은 대나무를 상상하며, 올곧지만 유연함을 품은 장죽이 한계까지 휘어졌다가 되돌아오는 느낌으로,


직유동존(直柔同存)

곧음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존재하니,

한곡필원(極曲必源)

한계까지 굽어진것은, 필히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다


능광검법 1초식 탄섬(彈閃)


떠오르는 여명과 함께 검이 번뜩였고, 허수아비는 매끈한 단면을 내보이며 반으로 잘렸다.


한계까지 수축되었던 근육이 다시 이완되며 지란은 확신했다.


어젯밤 꾼 꿈은 분명 현실이다.



지난 2주간 지란의 하루는 정신 없었다.


꿈속에서 그는 살수였고, 녹림도였으며, 명가의 자제이자 불자였다.


매일 새벽 일어날 때마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지만, 머릿속의 초식을 재현하며 검을 휘두르니 괜찮아졌다.


오히려 초식에 몸이 따라가지 못해 남는 시간은 매일매일 단련의 연속이었다.


"요즘 지랄 사형 좀 달라지지 않았냐?"  "내 말이, 검 휘두르는 소리 살벌하더라" "몸도 더 좋아진 거 같은데?"


사제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지란! 정신 차렸구나!"  "괜찮으면 대련 한판 어떠냐?"


사형들도 자신을 은근슬쩍 챙겨주기 시작했으며


"음? 지란? 새벽에 누가 검을 휘두르나 싶더니 너였나?"  "너무 몸을 혹사하지 말고 상처 나면 이거나 발라라"


새벽에 마주친 사범님과 문파 장로님들도 좋게 봐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밤 자기 전 마시던 술이 떨어졌다.


' 인시 무렵에 취한 채로 거리 끝을 돌아다녀 보게. 날 만나는 방법이야.'


노인의 말이 생각 난 지란은 객잔에서 미리 산 화주를 잔뜩 들이킨 채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끄윽! 노인장! 어딨소! 거 술맛 좋던데 다시 한병 주시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된다네, 젊은 친구"


거리 끝에서 고성방가를 지르고 있자 어느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노인장! 아니 대협! 대체 그 술은 뭡니까! 그리고 대협은 대체 누구십니까?"


"보아하니 몽현환혼주(夢現幻魂酒)가 잘 들은 모양이군. 들어오겠나?"


"네...네! 대협!"


"대협 소린 그만하게, 난 무림인이 아니니까, 그저 한가하게 술이나 파는 노인네일 뿐이야.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게."


"대협! 아니 그럼 노인장 이라 부르겠습니다. 당신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걸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면서 노인은 가게 한구석에 있는 작은 석상을 가리켰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 후덕한 인상을 가진 채로 한손엔 술병을 들고 구름을 타고 다니는 노인, 어느 가게마다 있을 법한 장식품이었다.


"난 주선(酒仙)이라네 젊은 친구, 술은 좀 입에 맞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