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성은 실로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숨을 쉬는 일 이었다.

입을 벌리고, 양 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최대한 폐를 부풀려 한 겨울 숲의 찬 공기를 가득 들이켰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갈비뼈가 압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몇 초, 아릿한 고통과 함께 심장의 고동이 느껴질 때까지 숨을 참았다.


" 하아아아…… "


 그러고는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쾌락에 잠긴 듯 한 한숨 소리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한기로 달아올라 분홍빛을 띄는 소녀의 작은 입에서 체온으로 덥혀진 날숨이 뿜어져 나와 새하얀 입김으로 비산하는 모습이 퍽 야릇했다.


 물론 그런 모습을 알리 없는 현성은 실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숨을 쉬는 게 얼마 만이었지? 3년, 아니 4년 만인가.


 그렇게 삼십 분을 숨쉬기에 집중했다.

본래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행동이었으나 오랜 시간 육체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숨을 쉰다는 행위 자체가 어색한 탓이었다.


 숨을 쉰다는 행위에 익숙해진 뒤에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손바닥에 가까운 관절부터 천천히 접히는 감각이 제법 낯설었으나 재밌게도 느껴졌다.


 최소한 그가 의식의 영역에서 기억하는 몸을 움직이는 감각은 이렇게 생생하고 자세하지 않았다.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주먹을 쥐고자 하면 쥐었고, 팔을 굽히고자 하면 굽혔으니 몸의 관절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고민한 적이 없는 탓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이어지는 스트레칭을 빠르게 끝낸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생각보다 허리가 많이 굽어졌다.

무의식 속에 잠들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됐는데. 아무래도 3, 4년 사이 몸뚱어리가 제법 성장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손에 검을 쥔 순간, 날갯죽지까지 내려오는 금빛 머리카락이 사락 흘러내리며 그의 시야를 덮쳤다.


" 쯧. "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킨 그는 주워 든 검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려다 마음이 변한 것인지 바닥에 검을 꽂고, 왼팔의 소매를 죽 찢어 만든 천 조각으로 머리를 대충 묶어 올렸다.

흔히 말하는 포니테일이라는 것이었다.


' 루나가 애지중지 기른 머리카락인데 함부로 자르기는 좀 그렇지. '


 루나의 기억을 조금 더 뒤져보면 훨씬 예쁘고 단정한 머리 모양도 만들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인 자신으로써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양보한 상태였으니까.


 다시 검을 뽑아 든 현성은 가볍게 마나를 운용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할 일이 없이 상상으로 마나 운용만 주구장창 한 탓일까, 몸을 움직일 때 만큼 어색하진 않았다.

물론 이미지 트레이닝 때와 달리 코어에서 마나를 뽑아내는 귀찮은 과정이 섞여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나가 몸 구석구석을 내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가 요동치며 남아 있던 한기가 가시고 신체가 달아오를 때쯤, 현성은 눈앞의 거목을 향해 손에 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훅, 하는 소리와 쏘아진 마력의 칼날이 바람을 찢는 소름 끼치는 굉음이 숲에 메아리치더니 눈 앞의 거목이 요란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 전성기의 3할 정도인가. '


 3할. 역전 칠웅이라 불리던 과거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힘이었지만 당장 루나의 복수를 하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 그래, 루나를 쫓아낸 그 빌어먹을 남자와 가문에게 말이지. '


 눈을 감자 루나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며늘아기라며 살갑게 말을 걸어 주던 장인과 장모, 첩 따위 필요 없다며 꿀이 뚝뚝 떨어지던 시선으로 바라보던 남편, 새언니처럼 멋진 여성이 되고 싶다며 달라붙던 시누이.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는 루나를 욕하고 때리며 저택의 계단 밖으로 밀어버리는 모습까지.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몸속의 마나가 요동쳤다. 우직, 하고 검의 손잡이가 부서지며 지지대를 잃은 검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부릅뜬 눈에는 흉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불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 남자는 명망 깊은 귀족이었고, 가문의 혈통을 이을 책임이 있으니까.

하지만 루나가, 이 몸뚱어리가 불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가문의 인간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며 무일푼 신세로 내쫓길 때.


' 너는 최소한 루나 편을 들었어야지. '


 루나에게 사랑을 속삭였잖아.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네 편이 되어주겠다고 했잖아. 죽음이 와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그 세 치 혀를 놀렸잖아.


 감히 내 딸한테.


 물론 진짜 딸은 아니었다. 루나는 강현성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인격일 뿐이었으니까.


 흔히 TS 소설을 보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뇌 끝에 여자로 변한 나 또한 나라며 타협하며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강현성은 달랐다. 그는 남자로써의 자아가 너무나 강했다.


 현성은 여자가 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남자인 나, 즉 강현성의 죽음이라 인식했고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의 정신은 여자가 된 몸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했고 끝내 '루나'라는 여자의 삶을 담당해 줄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성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탓일까, 루나는 그가 생각하는 '여자'라는 이상의 생물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애교가 많고 활기찼으며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했다.


 함부로 타인을 의심하지 않았고 아픔을 알았기에 힘을 가졌음에도 휘두르지 않았다.


 단 것을 좋아해 케이크 가게에 줄 서기를 망설이지 않았으며 꾸미기를 즐겨 현성이 벌어둔 돈으로 몰래 장신구나 옷 따위를 자주 사 모았다. 어차피 기억을 공유해 금방 들켰지만.


 정말 착한 아이였다. 자신을 내쫓은 가문에 복수할 생각은커녕, 모든 것을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자신의 탓으로 돌릴 정도로 미련하고 착한 아이.


 그것이 자신의 딸 루나였다. 몸을 내어주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루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이.


" 그러니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


 너무 오랜만에 말한 탓일까, 아니면 증오와 분노만이 담겨있어 그럴까. 지옥의 강철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울던 루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오직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잠들어 버린,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불쌍한 딸아이의 복수에 미친 한 명의 아버지만이 있을 뿐.


" 루나, 약속하마. 네가 느낀 고통, 슬픔,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을 그 짐승 놈들에게 되돌려 주겠다! 아니, 백배. 천배의 절망을 느끼게 해주겠다! "


 설령.


" 이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





딸아이를 내쫓은 가문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역전칠웅에서 세계를 위협하는 마왕까지 타락하게 된 강현성.

여신은 그를 막기 위해 강현성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든 루나를 깨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자신 탓에 흉험하게 변해 버린 아버지, 현성의 모습에 책임감을 느낀 루나는 여신의 제안을 받아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복수라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그의 자아가 너무 강했던 탓일까, 루나의 목소리는 끝내 현성에게 닿지 않는다.

루나는 방법을 고민하다 여신에게 제안해 새로운 몸을 얻고, 직접 현성을 만나러 가고자 한다.

하지만 루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폭주를 이어가던 현성이 어느샌가 자신의 몸에서 루나의 인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고는 루나가 죽었다며 완전히 흑화해 버린 것이다.

몸을 얻은 루나는 설득을 위해 현성의 앞에 서지만 루나가 죽었다 굳게 믿는 그는 감히 자기 딸아이로 장난질까지 친다며 루나를 공격해온다.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한 루나는 아버지를 멈추기 위해 그에게 받은 기억과 가르침을 토대로 미친 듯이 수련해 힘을 길러 맞서기로 한다.

수많은 동료와 사람들의 도움 끝에 아버지의 폭주를 멈추는데 성공한 루나는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이 나간 아버지를 있는 힘껏 끌어 안으며 더 이상 자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이고, 그 속삭임에 정신을 차린 현성이 미안하다며 루나를 끌어 안으며 본편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오랜 싸움 끝에 심신미약이 된 현성은 외전에서 루나의 가스라이팅 끝에 암컷 보빔깔개로 전락하는데…….



여자가 된 자기 몸의 약점을 다 아는 친딸(아님)한테 개따먹히는 TS된 아빠(아님) 쪽이 더 꼴리네

이 정도면 누군가 주워다 재밌게 써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