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소녀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발바닥을 박차며 달리는 즐거움을 잃었다.

중력을 이겨가며 하늘을 향해 허리를 펼 수 없고, 다리에 힘을 주어 세상을 내려볼 수 없고, 풀잎이 스러지며 간질이는 무게감을 느낄 수 없으며, 대지를 내달리며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에게 땀을 훔쳐지우는 경험을 더는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시퍼렇게 날 선 칼날에는 역설적으로 새빨간 핏방울이 선을 그렸고, 소녀의 발목 뒷축은 본래 한 줄기 이어졌을 힘줄이 끊어져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소녀의 인생 역시, 오늘로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열아홉을 마주한 생일이었다.


아아, 어제의 소녀는 어떠했나,

꽃다운 열여덟 소녀는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대지를 달렸다.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일꾼에게 미소를 보여주며 한 청년에게는 홍조를 띄우던 요정같던 아이.

굳건히 내딛는 두 다리로 소녀는 들판을 바라보며 미래 앞길을 꿈꾸었고, 날아가는 비둘기떼를 쫓아 자유를 상상하며 나래 펼쳐 달려나가, 건강히 자라난 소녀에게 내일은, 두렵지 않은 마땅히 발딛힐 탄탄대로였다.


그리고 찾아온 오늘, 소녀의 미래는 절단났다.


왜? 의문은 중요치 않다.

수 년째 이어져온 전쟁이 닿지 않은 이 마을은 운이 없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우연히 흘러들어온 패잔병조차 동화되온 마을은 페허속 작은 쉼터였으니, 여기는 아직 인륜을 보전한 희망의 씨았과도 같았다.

단지, 온 나라가 무너져내렸기에, 그나마 손 닿지 않은 이 땅이 다음 목표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는 불행이 아닌, 그저 예정되었던 운명에 드디어 도달했음이니, 한탄하려거든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의 헛된 믿음에 매몰되어버린 주민들 자신의 판단을 원망하라.


그렇게 아름답던 소녀는, 예정되었으나, 이뤄질 수 없는 운명에 놓여있던, 오늘의 생일-성인식을, 꿈꾸던 미래와는 정 반대의 현실로 마주한 채, 처녀를 맞이하게 되었다.


본래 오늘 정오는, 성년을 맞이한 소녀를 축하하며 연회를 벌이고, 모르는 이 없는 파트너의 청혼을 받으며 미래의 가정을 약속하는 희망의 봉오리를 틔워낼 하루였을 것이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순백의 원피스를 차려입고, 어머니께서 꺾어오신 백합꽃을 가슴에 품고, 청년에게 꽃반지를 선물받은 뒤, 생애 첫 입맞춤을 나누며 콩닥이는 가슴에 잠 못 이룰,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될 하루.


그 하루는 새빨간 핏빛으로 얼룩졌다.


이제 막 도달한 처녀의 옷섶에, 마주하던 청년의 핏줄기가 가로질렀다.

날아든 화살에 청년은 목이 꿰뚫렸다.

부릅떠진 두 눈, 죽지 못해 끅끅대는 목울대, 피거품이 일어나는 입가.

절망스런 광경에 처녀는 얼어붙어, 새하얗던 백합꽃은 어느새 불길한 혈화초로 물들었고, 순백의 원피스는 피거품에서 피어난 초목 뒤로 숨겨졌다.


충격속에, 한 어른이 청년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아마 처녀는 세상을 떠나갈 이를 위한 위로의 입술을 넘겨주었을 터.

어른의 대처는 이해 못할 잘못은 아니었으나, 결국에는 오히려 처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선택으로 남으리.

그렇게 처녀의 운명은 단 하나의 처음조차 스스로 선택치 못할 비극의 끝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병사들은 잔혹했고, 수많은 울부짖음이 대지를 울렸다.

연인을 잃은 채 갖 성년을 맞은 처녀는 그 누구보다도 비통히 울었고, 갑작스러운 불운에 정신을 놓을듯 날뛰었다.

평범한 포로였다면 즉결처분. 그러나 처녀는 상당히 가치로왔고, 솜씨 좋게 휘둘린 단검에 처녀는 발목 힘줄을 끊겼다. 바야흐로 정오였다.


붙들던 병사가 멀어지자, 처녀는 주저앉아버렸다.

아파, 아까는 심장이 멎을 듯 아팠는데, 지금은 다리까지 화끈거려.

싫어, 저 사람들 싫어, 유진이 죽었어, 사람들이 울고있어, 시선, 나를 보지마, 눈동자, 칼날, 콧수염, 갑옷, 추워, 유진 어딨어, 움직여야돼, 빨리 여기서 벗어나서 유진을 찾아야돼, 근데 다리가 안움직여, 일어설 수 없어, 다리를 잡고 바닥에 디딯여, 힘을 주고 일어나, 넘어져, 아파, 뜨거워, 추워, 누구야, 손 놔, 나 여기서 나가야돼, 제발 날 보내줘.


마침내 정신이 한계에 달했을까, 처녀는 기어코 혼절하고 말았으니, 이제 사악한 욕망이 처녀를 가지게 되었다.


입술, 그나마 유일하게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 순정. 안타깝게도 청년은 너무 빨리 멀어져버렸고, 결국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폭력속에 빼앗겼다.

백합꽃, 피웅덩이에 버려진 채 수없이 짖밟혀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그것은, 선물해준 어머니와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원피스, 오늘을 기다리며 손수 바느질해 마련한 애정서린 의상은, 정신을 잃은채 뜯겨나가, 처녀는 순결한 모습 그대로 세상을 마주한 채 침대에 묶여버렸다.


그리고 처녀는 이 순간, 다시 한번 피를 흘리며 여자가 되었다.

소녀가 언제나 그리던 꿈같은 하룻밤이 아니었다.

처녀는 절망에 비명지르며 저항했으나, 부질없는 몸짓이었고, 강제로 범해지며, 여자는 고통속에 몸서리쳤다.

처녀를 취한 병사는 속박조차 풀어버린채 약탈을 만끽하였고, 깊은 밤, 여자는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여자는 어리석었으니, 두 발로 일어설 수 없다면 무릎과 두 팔로 땅을 기어 방을 나서려 했다. 저 문만 나가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거야, 이런 지옥 한시도 더 못있어. 

긁혀나가며 온몸에 난 생채기에 화끈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기어나가던 여자는, 문 앞에서 병사의 발길질에 차가운 현실속에 구르게 되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웠나, 일어서지도 못하고 몇번이나 다리를 세우다 넘어지는 여자를 바라보며 키득이는 저들이 정녕 같은 사람인걸까.

소녀가 마주했던 마을의 경비병은 언제나 듬직하고 약한 아이를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주었는데, 비슷한 차림을 했어도 저들은 이렇게 다른걸까.

현실에 절망한 여자는 다시 한번 혼절했고, 깨어났을 때는 지푸라기만 대충 덮힌 채 수레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여전히 옷 따위는 없었다.


여자는 이제 두번 다시 스스로 달리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걸어가던 소녀는, 전날 죽어버렸고, 남은 것은 살아오며 가꾸워온 모든 것을 빼았기고, 더는 한발짝도 내딛을 수 없는 가여린 여자에 불과했다.

여자는 비록 소녀보다 성장했지만, 이제 그 무엇도 스스로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평생을 도구에 의지하며,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동정을 먹고 연명하며, 목숨조차 저당잡힌채 하루하루 그저 끌려다니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리라.


이런 그녀는 진정으로 성인이 되었을까?

여자는 비로소 새 가정을 꾸려 새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을 준비해온 모든 것은 가여운 운명 앞에 그저 헛된 노력으로 사라졌으니, 소녀로서 쌓아온 인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려간 그녀는, 세상에 자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차라리, 두 다리라도 남았더라면.


비록 지금은 비참하나, 언젠가 전쟁을 끝나리라.

후일을 도모하고, 기회를 노리고, 정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언젠가 도망쳐 새 삶을 쌓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병사의 두번의 칼질은 그런 미래조차 끊어버렸다.


그녀는 다른 포로가 도망치는 순간에조차 하찮게 바닥을 꿈틀이다 다시 붙잡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며, 그 어떤 불운에도 도망치치 못해 주저앉은 채 온갖 역경을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리라.


혹자는 말하리라, 그럼에도 버텨낸다면, 정신을 차리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원하던 삶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이 현실은, 그저 평범했던 한 시골소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다.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모두가 제 역할에 충실하고 이웃을 도울 여유가 있다면, 인륜이 살아있다면, 그녀는 장애를 딛고 다시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혼돈의 시대.

얼마 없는 인륜은 하나 둘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고, 제 한몸 건사하기 힘든 사람들은 거렁뱅이조차 약탈하려 벼르는 현실속에, 그녀는 그저 숨을 죽이고, 온 몸을 바짝 낮추고, 폭풍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죽지못해 살아갈 뿐이다.


그래도 어린 새 생명은 잘못한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