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가씨가 이 편지를 받았다면, 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설령 살아남았다고 해도 어디 하나 떨어져나갔거나 흉측한 몰골이겠죠.
남들이 물어보더라고요. 인간 주제에 왜 엘프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지.
어차피 죽어봤자, 산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헛된 행동이 될 뿐이라고.
상관없습니다. 이건 제 욕심이니까요.
절 좋아하지 않는 아가씨는 이젠 없지만, 이 나라는 아가씨와 함께한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 일로 아가씨가 절 사랑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매몰차게 이별을 고했는데 아가씨가 밉지 않냐고요?
밉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밉고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아가씨를 아직도 제 마음 속에 품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추악하고 징그럽다는 걸.
솔직히 이별 고했을 때, 아가씨, 아니, 당신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가문의 명예, 아버지의 인정 그리고 엘프 모두로 인정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짐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니, 엘프와 인간의 교제는 좋은 인상을 못 받기 때문에
언젠가 아가씨가 제게 선을 긋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나 잔인해서 외면해버린거겠죠.
그러니 아가씨도 절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절 좋아하고 있다면
당신도 그 때를 그리워한다면....
나를 잊어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줘. 행복해 줘. 난 당신이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
아직도 기억 나.
"당신 같은 미녀에게 죽는다면 여한은 없습니다."
현상금 벌겠다고 사나운 맹수를 처리한 후 멋대로 엘프의 영지로 들어와 호숫가에서 목이 축이던 상처투성이인 당신의 모습이.
침입자를 죽이려고 했던 나에게 했던 말까지.
그리고 학교 동급생들이나 아버지한테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빼앗길 바에 주는 게 낫다며 엘프만 받을 수 있는 엘프의 비약을 준 내 모습까지.
이걸 먹으면 빨리 나으니까 꺼지라고 말했었지.
아직도 기억 나.
5살짜리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검술을 12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 해, 당신을 만난 호숫가에 앉아 울고 있는 날 위로해준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나.
당신이 알려준 검술과 궁술 덕분에 엘프에게서 인정 받은 그 감정이.
모두에게 인정 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아직도 기억 나.
당신이 아니면 안될 거 같아 당신에게 꽃을 주며 고백한 그 날이.
그 때 당신은 수줍은 모습은 잊을 수가 없어.
아직도 기억 나.
당신에게 선을 그은 날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맘에,
모두에게서 더 인정 받고 싶은 맘에,
당신에개 온갖 모진 말을 내뱉은 내 자신이.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날 더 이상 '당신'이라고 부르지 말했던 말까지.
당신도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진심으로 사는 말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자기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당신을 내치는 건 알았겠지.
그걸 몰랐다면 그렇게 웃으면서 보내지 않았을거니까.
그래서 영원히 날 미워할 거라 생각했어. 나 따위 잊고 새 인생 살거라 생각했어.
그냥 또 맹수 잡는 떠돌이 현상금 사냥꾼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인연이 된다면 우리가 처음 만날 때처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근데 어째서 최전선, 그것도 성을 지키는 근위병이 된 거야?
당신은 군 같은 딱딱한 규율 있는 거 싫어한다며.
그래서 거기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아직도 기억 나.
마족들의 공격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내게 선을 그으며, 자신보다 나를 더 걱정한 당신의 모습.
예전처럼 당신이라 불러달라는 갈라진 내 목소리.
그리고 당신을 잊으라는 잔인한 유언까지.
당신이 내 곁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당신만이 나 자체를 봐주고 있었다는 걸.
인정 받고 싶어했던 아버지, 가족 그리고 빌어먹을 왕은 내 좋은 모습만 보고 날 인정했다는 걸.
그리고 당신이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을 사지로 내보낸 건 나라는 거 말이야.
내가 당신의 곁을 지켜줬더라면,
당신 말대로 명예를 버리고 당신 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난 당신을 위해서라도 공적을 취하해달라고 했지만.
"성씨도 없는, 그것도 인간인 평민에게 공을 취하할 순 없다!"
다들 당신을 외면하기 바빴어.
당신의 편지 말대로 어느 누구 하나 당신의 업적을 알아주지 않았어.
성을 지킨 것도 모자라, 남들 다 도망갈 때, 당신 혼자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마족군을 막았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도 알아주지 않았어.
그제서야 알았어. 인간이 엘프를 싫어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고결하다고, 고결한 종족이라고 노랠 부르지만 어느 종족보다 더럽고 고결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많이 후회했어.
명예, 아버지의 인정, 그리고 황가의 인정까지 다 부질 없고 의미 없는데 사랑하는 사람까지 내치면서까지 집착한 것을.
당신이 내게 언제 말했었지. 엘프의 긍지 높은 명예를 얻겠다고 개고생하는 날 보고 엘프도, 인간도 없는 단 둘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자고.
엘프의 자존심이나 명예 따위 잊고 살자고.
그 때 온갖 고생만 할 거 같아, 당신 같은, 평민의 삶, 그것도 떠돌이의 삶은 죽어도 싫다고 말했지만
지금 당신이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난 '네.' 라고 말할 자신있어.
그랬다면 지금 쯤 난 이 차갑고 축축하고 딱딱한 감옥이 아니라 당신을 처음 만난 곳처럼 호숫가가 바로 앞에 있는 곳에서 당신 옆에 자고 있을테니까.
내가 여기 있는 이유? 뻔하지.
왕에게 대들었단 이유로,
왕 앞에서 인간 편을 들며 막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당신에게 엘프의 비약을 준 이유로.
식사를 주는 간수 빼고는 작은 햇빛도 안 들어오는, 있는 거라곤 쥐와 곰팡이 밖에 없는 곳에 잡혀있지만 괜찮아.
당신을 버린 벌을 받고 있는 거니까.
우리 엘프들이 엘프의 비약을 당신에게 먹인 건 어떻게 알았냐고?
안 들킨 게 이상한 거야. 인간이, 그것도 단 한 명이. 5천이 넘는 마족군을 섬멸했으니까.
이런 허름한 지하 감옥에 갇힌 내가 불쌍하다고?
아니, 그 덕분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폐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
당신이 내 옆에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줬을까.
내가 살던 왕국을, 당신이 지켰던 왕국을, 내 손으로 직접 불태운 나를 보고.
당신이 지켰던 엘프를 내 손으로 학살한 나를 보고.
왕가와 내 가족들마저 모조리 잡아 내가 직접 참수한 나를 보고.
아버지 빼고 전부 나에게 살려달라고 비는데 얼마나 우스웠는 지 당신은 알까?
....실망했을려나. 내가 마왕이 되서. 아니, 분명 실망했을거야.
당신의 복수를 위해 마왕이 됐으니까.
비록 당신이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난 견딜 수가 없었어.
당신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는데도 자기들만 행복하면 된다는 지저분한 엘프랑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게.
내가 그들과 똑같은 종족인 엘프라는 게.
하지만 그런 내 생각도 모르고, 세상은 날 엘프를 학살한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마왕이라고 날 질타하기만 해.
덕분에 선택받은 많은 용사가 나타났고 모두 내 목을 따러 마왕성의 문을 두들겼지.
솔직히 기대했어. 당신이라면 반드시 날 막으러 올 거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모두.
당신이 아니었어.
말투도, 검술도 전부 당신이 아니었어. 살살 봐주면서 해도, 내 일격에 다 나가떨어졌으니까.
이젠 기억도 안 나. 몇 백 년동안 수 많은 용사를 죽였는 지.
결국 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어.
용사를 죽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더 많은 악행을 저질러야 당신이 용사로 환생할거라는 결론에.
결국 우리가 살던 왕국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는 엘프 왕국도 불태우고, 학살하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엘프가 살만한 곳은 다 불태웠지.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그래도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어. 모두 다 당신이 아닌 사람들만 내 목을 노렸어. 이 세상에 있는 엘프를 다 죽였는데도.
대답해 줘. 난 대체 얼마나 많은 악행을 더 저질러야 되는 거야?
얼마나 더 많은 악행을 저질러야 당신이 막으러 올 거야?
사실 용사한테 대충 칼 맞아 죽고 당신을 만나러 갈까도 생각해봤다? 아니, 이미 시도해봤어.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당신이라면 날 잠깐이라도 만나줄 거 같았거든.
왜 그랬냐며, 왜 그런 길을 걸어야 했냐며 울겠지.
내가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근데 뭔 짓을 해도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없었어.
내가 너무 강해서 그런건지, 용사가 너무 허약해서 그런 지, 그 검격은 날 죽이긴 커녕, 상처입힐 수도 없더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용사를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이는 거 뿐.
만약 당신이 내 앞에 서서 검을 겨눈다면 마음 같아선 당신을 속박해서라도, 힘으로 눌러서라도, 옛날처럼 우리가 사랑을 속삭이던 그 때처럼 현생을 누리고 싶어.
알아, 내 헛된 꿈이란 걸. 당신이라면 날 필사적으로 죽이려고 할 테니까.
날 죽이고 모든 걸 바로 잡으려 할테니까.
당신이라면 내 죄까지 당신이 안고 가려고 할 테니까.
....그래서 잊으라고 했던 거구나.
산 사람이 고통 속에 살아가야하니까.
보고 있는 사람도 고통스러우니까.
난 그 말이 원망스러웠는데... 우리만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냐고.
어떻게 잊으란 소릴 할 수가 있냐고.
근데 만약 당신이 나타나 날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그 말을 당신에게 돌려줄 거 같아.
나를 잊으라고.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지옥까지 따라오란 소리는 안 할테니 저승에 올 때, 천국에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좋으니 날 만나러 와달라고.
그렇게 말할 거 같아.
근데 이젠 지쳤어. 당신을 기다리는 것도. 용사를 죽이는 것도.
아, 당신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야. 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다만 이대로 죽지도 못 하고, 당신도 만날 수 없을 바에는.
우리가 처음 만난 호숫가에 안장된 그의 무덤의 하늘 위에 떠있는, 그의 무덤을 찬란하게 비추는 태양을 올려다 본다.
"수르드 대장군."
마왕검을 꽉 쥔 채.
"예. 폐하."
"징집령을 내려라."
"....다음은 어디입니까.'
희망 고문 당할 바에.
"인간을 멸한다. 용사가 태어나지 못 하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거하는 게 더 속 시원할테니까.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태양 빛이 점점 강렬해지지만 어째서인지 입가엔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내 선전포고가 신에게 닿았다는 소리니까.
신도 알 것이다.
난 한다면 정말 해버리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엘프이자,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마왕이라는 걸.
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긴장해.
세상의 균형을 완전히 박살나는 게 보고 싶지 않다면, 그걸 원치 않는다면.
내가 인간을 완전히 멸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를 내 앞에 데리고 오는 게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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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가 우는 소리는? 흙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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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피폐]저를 잊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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