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재는 사실 문학에서 엄청 자주 다룬 소재 중 하나임.

사실 사적 제재는 말이 사적 제재지 복수물이잖아?

그리고 복수물은 언제나 꿀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복수물이 꿀잼이라는 게 사적 제재를 많이 다룬 이유는 되지 못함.

사적 제재가 많이 다뤄진 가장 큰 이유는 사적 제재라는 개념이 실상은 정의와 폭력이라는 두 가슴 뛰는 개념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주제기 때문임.

그리고 그렇다보니 할 얘기도 어마무시하게 많고.

그래서 사적 제재에 대해 다룬 세 작품을 다루고, 각각이 사적 제재의 어떤 면을 다뤘는지를 가볍게 다뤄보도록 하겠음.


1. 복수와 정의의 불가분의 관계 - 오레스테이아 3부작


사적 제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현대인 중에는 아무도 없음.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국가의 사법 집행을 반대하지는 않음. 

이처럼 우리는 사적 제재는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국가의 폭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순응하지.

그렇다면 과연 복수와 정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가의 살인과 개인의 살인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바로 그러한 정의와 복수의 관계를 조명하는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이아 3부작임.


작품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공은 아가멤논의 아들임.

아가멤논의 불행한 가정사는 다 알테니 넘어가면, 아무튼 아가멤논의 아들인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 대가로 복수의 세 여신에게 쫓기다가, 아테네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됨.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오레스테스는 무죄를 선고 받고, 이에 분노한 복수의 세 여신을 달래느라 아테네는 복수의 세 여신에게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게 됨.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할 점은 복수의 세 여신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건데 더 이상 살인이라는 권한이, 복수가 아닌 새로운 더 그럴듯한 명분이라는 "정의"라는 명분을 얻게 됨을 의미함.

이는 또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복수의 세 여신은 올림푸스의 신들이 상징하는 "이성"과 "논리" 이전의 신인 프로토게노이들임.

실제로 작 중에서 복수의 세 여신은 아테네에게 어린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된 여신들임.

다시 말해, 복수의 세 여신이 힘을 잃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건 뒤집어 말하면 옛 전통인 "복수"가 사라지고,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거임.

결국 복수, 혹은 사적 제재와 국가는 같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기묘한 관계이며, 근대 국가는 이러한 복잡한 둘의 관계를 훨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은폐해왔다는 거임.


(죽음)(살인) 살인, 주권, 그리고 정의 - <자비로운 여신들> - 월간독갤 미니 갤러리 (dcinside.com)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걸 한 번 보는 거 추천함.


2. 감시자의 역설 - 죄와 벌

또 다른 사적제재에서 흔히 보이는 주제로는 감시자의 역설이 있음.

죄와 벌은 다들 읽어봤을 거라 생각하고 줄거리는 생략하도록 하겠음.

그렇다면 왜 죄와 벌에서 주인공인 로쟈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가 만약 자기 사상대로 비범인이었다면 사적제재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죄와 벌은 그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함.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사실 이건 죄와 벌 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작품 세계를 이해해야 함.

도스토옙스키는 기본적으로 존나게 수꼴극우에다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임.

현대 한국인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인 합리적 자유주의자랑은 극단적으로 다른, 공동체와 종교의 중요성을 존나게 강조한 사람이라는 거지.


이런 사고방식에 입각해서 도스토엡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정의를 결정하는 "초인"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한 거임.

정의를 정의할 수 있는 주체는 공동체(와 종교)이지 결코 특출난 한 개인이 아니라는 거임.

그리고 이게 사적 제재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임.

한 개인은 결코 사회 전체가 지고 있는 거대한 윤리 체계라는 짐을 감당할 수 없으며, 세상은 위대한 초인 한 명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헌신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수 많은 민중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거라는 걸 표현하고자 한 거임.


3. 이길 수 없는 국가에 대한 뒤틀린 욕망 - 거장과 마르가리타


앞서 두 문학작품이 사적 제재의 양면성에 대해 표현했다면, 이 작품은 반대로 사적 제재가 간절히 필요하게 된 국가를 통해 사적 제재의 필요성을 다시 묻고 있음.

다시 말해, 사회가 극단적으로 타락하고 위선이 가득하게 되었다면, 사적 제재가 잘못된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거임.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다루는 시대는 소련 시대임.

검열이 존나게 심한 그 시대.

그리고 실제로 작가도 스탈린에 의해 존나게 검열을 당한 경험이 있음.

국가 권력이 극도로 타락하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밑바닥에 떨어진 이 상태에서, 과연 우리는 국가 이상의 더 거대한 자유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정의를 정의해야 할까?

이 작품이 묻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여기에 있음.


사실 저 세 작품은 내가 말한 거 이상으로 더 큰 주제의식과 철학을 담고 있다보니 좀 과하게 요약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문학 작품에서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사적 제재 혹은 복수를 어떻게 봐야할지 다루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