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난세에 피어난 불씨였다.

겨울에 피어난 아주 작은 불씨.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최악의 시기에 태어났지만, 천무지체를 타고난 나는 그렇게 불리기 적절했다.

16가지 절예를 익혔다.

16명의 스승을 두었으며, 한 가지 절예를 익힐 때 마다 한 명의 스승이 쓰러져갔다.

불을 위해 제 몸을 불태우는 장작과 같았다.
그에 힘입어 내 불씨는 조금 더 커졌다.

스승들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목적을 위해 인간성을 버렸다.
내 목적은 마(魔)의 심장에 내 칼을 박아넣는 것.

그리고 정(正)를 재건 하는 것.
그렇게 키워졌다.

어둠을 몰고 빛을 게걸스럽게 삼키는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이란 불필요 한 것이었다.

그렇게 키워진 것이다.

마지막 정을 멸하러 몰려오는 마의 군세에 맞서 나는 열여섯 스승들에게 배운 검을 휘둘렀다.

창을 찔렀으며 비수를 던졌고 활을 쏘아냈다.

100명의 마를 베었을 때, 내 이름이 알려졌다.

1000명의 마를 찢었을 때, 나에게 별호가 붙었다.

2000명의 마를 멸했을 때, 정에서는 나를 희망이라 불렀다.

모두가 나를 희망이라 부르니, 기꺼이 그렇게 되고자 했다.

스승에게 받은 정화(淨化)라는 이름에 어울리고자 나는 그들의 횃불이 되고자 했다.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리라.

나는 그럴 능력이 존재했으며, 열여섯의 스승은 본래 이런 의도로 키워낸 것이었다.

열여섯의 스승의 내공을 지니고 그들이 지닌 절예를 익힌 나는 김히 말하건데, 당해낼 자가 없었다.

스스로 마의 장로라 자칭하는 이들은 채 7합을 넘기지 못했고, 마왕이라 불리는 이들 또한 50합을 넘기지 못했다.

정의 세계가 찾아오리라.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무신(武神).

나를 칭하는 별호다.

그들은 나를 신이라 불렀으며 스스로를 교인들이라 불렀다.

그렇게 탄생한 하나의 교(敎).

천마멸신교(天魔滅神敎).
천하의 마를 멸한다.

그 교리로 하나된 이들은 광적이었다.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마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
이웃을 잃었고, 친우를 잃었다.
애인을 잃었으며, 고향을 잃었다.
하여,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이들은 절망했다.

좌절했다, 포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슬픔과 절망이 나라는 횃불이 나타나면서.

불에 비쳐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희망에 따라, 절망, 좌절따위의 감정이 증오와 분노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복수를 바랬다.

이들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마를 멸하기 위한 싸움에서 나와 함께 최전선에서 싸웠다.

극에 달한 혐오와 분노로 점칠된 그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교는 세를 불려갔다.

많이 이들이 죽었지만 더욱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다.

전세가 역전됬다.

마지막 정을 짓밟기 위해 낮밤을 따지지 않고 몰려오던 마의 군세가 사라졌다.
이긴 것은 아니다.

허나 나에게 입은 피해가 공세를 멈출만큼 크다는 것이겠지.

더이상 나는 횃불 따위가 아니었다.

정에서 태어난 작은 불씨는 이제 정과 천마멸신교의 성화(聖火)가 되었다.

마를 정화할 성화 말이다.
반격의 때.

나는 천마멸신교의 교인들과 마지막 정의 군세를 이끌었다.

어느새 나는 그런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수없이 이뤄진 전투와 수없이 손에 묻힌 마의 피로서 어색했던 16절예를 하나로 재정립했다.

16절예를 정립했을 때, 서로 뒤엉킨 열여섯 명의 스승의 내공마저 합일(合一)에 성공하였다.

그런 나에게 붙은 영광스러운 이명.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 누구도 내가 마신(魔神)에게 패배할 것이라 감히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가 그의 심장을 꿰뚫으면 평화가 찾아오리라.

열여섯의 스승을 뒤로한 채 세상에 나오고 11년.

처참하고 처절하고 끔찍했던 이 전쟁을 끝낼 시기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진했다.

이름난 마의 무인도, 장로도, 마왕조차 우리를 막지 못했다.

1개월이 지났을 무렵 우리는 수십번의 전투를 겪었지만 연전연승하여 사기가 치솟았다.

마의 종자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덧없었다.

어느순간부터 교인들이 지나온 곳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하나의 의식이었다.

이 의식이 무슨 의미냐 묻자 정화를 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마의 진영에 있던 아이들을 붙잡아 산 채로 불태우고는 즐겁다는 듯 술을 마시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래서야 그토록 증오하는 마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인간성을 상실하여 감정대로 움직이는 짐승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이들이 비록 미쳐버렸다 한들, 내가 품은 불씨를 불로서 개화하게 해준 열여섯의 스승들이 맡긴 이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저지할 수 없다.

나는 이내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내 일은 마신의 심장을 꿰뚫는 것.

잡생각을 지웠다.

아니, 어쩌면 미쳐버린 이들을 더는 바라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열여섯 스승들이 진정 이런 것을 바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나 늦어버렸다.

우리는 전진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닫았다.

듣기 싫었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참혹한 비명을 단순한 소음으로 치부했다.

우리는 전진했다.

군량이 떨어졌을진데, 교인들이 고기를 먹고 있었다.

뒷편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이었던 것이, 사람이었던 것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한쪽 눈을 뽑아내었다.
보기 싫었다.

내가 구원한 이들이 이런 괴물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는 못한다.

검을 휘둘러 폭포를 가르고 창으로 구름을 꿰뚫어낼 수 있는 나였지만.

이들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나에게 각인된 숙명이었기에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나는 평화를 위해 싸워온 것이 아니었나?
나는 횃불로서 이들의 앞을 밝혀줬다 생각했거늘.

나는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줬다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결과가 이런 것인가.

괴물이지 않은가.

더이상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 마신이 원흉인 것이다.

마신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

모두가 그놈 탓이다.

모든 것을 마신에게 뒤집어 씌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조차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에.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그 정신이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히고 있는 것만 같다.

무언가 어느것이 옳고 그름인지 판단하기가 서서히 힘들어졌다.

이건 아니다.

이런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야.

하지만 무엇이 아닌거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았지만 답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분별력이 흐릿해지고 있는 것을 자각했지만 나조차 멈출 수 없다.

심마인가?

하지만 정의 성화인 내가?

심마에 빠젔다고?

그럴리가!

웃기는 소리.

싸움의 끝이다가오고 있으니 헛생각이 자꾸만 튀어나온다.

내가, 틀렸을리 없지 않은가.

나는 하나 남은 눈으로 교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마가 삼켰던 땅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와 새싹이 텄다.

생기를 머금은 작은 생명을 바라보고 있자니 미소가 지어진다.

잠시 소란이 벌어졌다.

소음이었지만 익숙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여느때와 같이 마의 진영의 아이가 끌려 가는 것을 보였다.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는 천마라 외쳤다.
우리를 천마신교라 칭했다.

마(魔)?

내가 마 라고?

내가?

정의 희망이자 정의 성화인 내가 마 라니!
내가 마를 멸하고자 어떠한 일을 했는데!

그것도 천마라니.
하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사악한 마의 씨앗은 입부터 거칠구나.

나는, 아이를 불태우라 명했다.

아이의 비명이 익숙하다.

담담해졌다.

나는 차를 마시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신이 거주하는 성, 단 하나만 남았다.
드디어 평화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상황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마신의 그림자조차 본적이 없다.

도망친 것일까.

"그럴리가"

하면 어째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 뭐가 됐던 상관없겠지.

놈의 심장은 꿰뚫릴 것이고 성은 불탈 것이다.
그 후, 정의 세계가 도래 할 것이며 마는 사리질 것이다.

여정의 끝이 보인다.
드디어 평화를 이룩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