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한풀 꺾이고 먹구름이 걷히고 난 뒤의 백색 산맥은 멀리서 바라보면 장관이기로 유명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색을 바꾸는 순백의 설산, 정상에 우뚝 솟아 태양빛을 흩뿌리는 빙산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낮에 떠오르는 별빛같다는 어느 음유시인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다고 감탄하며 돌아간 황제의 이야기는 세간에도 잘 알려져 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하지만 뭐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던가.

백색 산맥 한가운데에서 본의는 아니지만 자신이 일으켜버린 눈사태에 휩쓸린 시엘에게 있어서 백색 산맥이란 그런 존재였다.

가까이에서 보다 못해 아예 파묻혀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말해 뭐하겠나.


‘이렇게 살아있는게 다행이지.’


막바지에 마력을 쥐어짜내서 만든 방벽은 자신의 쥐꼬리만한 마력량에 비하면 아주 훌륭하게 제 할 일을 다해준 것 같았다.

정신을 얼마나 잃고 있었는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뻗어있는 동안 숨막혀 죽을 일은 없도록 충분한 공간과 공기를 확보해주지 않았던가.


‘그것도 정신을 차렸을때는 거의 한계였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숨이 모자라서 몸이 제멋대로 컥컥대기 시작했을 땐 정말이지 죽는줄 알았다.

생존키트에 혹시 몰라 준비해뒀던 바람의 정령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던 시엘은 새하얀 쓰레기..가 아니라 눈을 파헤치던 손을 잠시 멈추고 한숨을 내뱉었다.

숨을 한번 쉴 때마다 폐가 땅겨오는게 또 공기가 다 떨어진 것 같았다.


‘이것도 점점 간격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좋으나 싫으나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실프.”


주머니에 넣어뒀던 정령석을 꺼내 마력을 집어넣으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런 눈구덩이엔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이 전해준 신선한 공기 덕분에 한결 편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시엘은 한편으론 전전긍긍해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서글프게 느껴졌다.


사실 이런식으로 정령석을 통해 정령을 불러내는 방식은 그렇게 효율적인게 못됐다.

이미 정령력으로 가득찬 돌에 마력을 집어넣어 억지로 뽑아낸 정령력을 미끼 삼아 근처의 정령을 불러내는 방식..

정령과 직접 계약을 맺어 불러내는 것에 비하면 마력 효율도 한없이 낮았고, 재수가 없으면 마력만 잡아먹고 정령이 나오지 않는 사례도 종종 보고되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등급, 가격을 막론하고 구하기도 힘든 정령석을 이런식으로 써버리면 단순히 일회성 소모품이 되어버리니 누가 이런 식으로 정령석을 쓰겠는가.


‘근데 이 귀한걸 제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정령과 계약만 맺을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양도 x만한게 딱히 특장점이랄것도 없어 정통 마술 이외에 정령술이나 소환술같은 분야와도 접점을 가지기 힘든 자신의 마력이란..

그래도 혹시.. 좀 더 노력했더라면 뭐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이내 쓸데없는 가정일 뿐이라며 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무의미한 생각으로 흘려보낼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눈이나 더 파야지.


호흡도 충분히 안정된 것 같으니 다시 움직이자.

그렇게 생각하며 정령석에 집어넣던 마력을 끊으려던 그 때였다.


-.....


‘바람이.. 멎었다?’


아직 마력을 끊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솟구쳐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시엘은 정령석을 쥐고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엘은 자신의 손에 꽉 붙들린.. 정령석 특유의 빛을 잃어버린 채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돌멩이만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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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쓰던거 이어서 짧게 써봄.

일단은 자체적으로도 소재 생산하면서 여기 있는 소재도 덧붙여서 한동안 적당히 써볼 예정이고.. 분량 좀 쌓이면 노벨피아로도 건너가볼까 생각만 하고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