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디."
"네, 아저씨..."
한적한 주점에서 남성과 소녀는 대화를 나눈다.
이제 아저씨라 불린 쪽은 턱수염 거뭇히 나 정돈 안 된 폭력배로나 보이고,
회색의 머리를 온통 헝클어트린 채 술을 푸대자루에나 담아 마실 것 같은 괴팍한 거한.
그 정도의 첫인상이다. 그에 대비되게끔, 커다란 덩치와 마주서 그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건..
참으로 가녀린 몸으로서 백금발을 물에 젖은 생쥐마냥 힘없이 축 늘어뜨린,
병약한 인상의, 어딘가 슬퍼 보이는 소녀.
어디에 서 있든, 날씨를 비로 바꿀 것만 같은... 서정적이고 조용한 아이다.
세이디는 푸대자루는 아닌 맥주 잔에, 능숙한 솜씨로 알코올을 채워낸다...
그러면 이제 그것을 수염 난 남자가 왼손으로 받고,
목구멍에 가득 흘린 후,
그것을 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일부를 머금으며, 수다를 털어낸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용사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당연히, 아저씨, 겠죠...?"
맞는 대답을 한 것인지 불안해하는 세이디의 등을,
괴한은 툭, 치며 나름 북돋는다.
"하하하. 그래, 고맙다. 하지만 나는 약해.
강했다면 그 참상 속에서도 너의 부모를 살릴 수 있었을테지."
그러며, 씁쓸함을 이제 마저 삼킨다.
"미안해."
"나쁜 건 마족인데요."
"마족에게 인간의 잣대가 적용되진 않겠지.
넌 사슴을 물어 죽이는 호랑이가 착하다 보냐 나쁘다 보냐?"
"으음, 잘 모르겠어요."
"뭐 그런 것이겠지. 사람도 그렇잖아.
해충 하나 밟아죽이는 일을 선하다던가 악하다던가 표현하긴 좀 민망하지.
이 세상 누구나 하는 일들이고.
너 부모 죽인 뿔 꼬리 달린 놈들, 원망할 거 없다."
그러며 전직 용사, 한 때 백색 용과 겨룬 자,
하이드-본-크로이즐러는, 고체의 잔을 쾅, 나무 탁자에 내리친다.
"나쁜 놈은 약한 놈이야. 그리고 난 나쁘지."
"그럼 뭐... 저도 나쁜 놈인걸요-."
"년이잖아. 크큭, 아무튼 뭐 그래, 나쁜 것들끼리 건배하자."
"술 마실 나이 아니에요-, 아저씨."
"그래. 거기, 주인장! 애가 마실 거 있어?"
주인장은, 말 없이 우유 한 잔을 내놓는다.
"저기요,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주인장-! 얘가 설탕이라도 타 달래-!"
"아 진짜! 하다 못 해 무알콜 음료라던가-"
용사는, 세이디의 입을 막는다. 머리에 손을 얹어서.
"너에게는 그것도 과해."
"나 참..."
손길을 나쁘지 않아하며, 세이디는 푹 고개를 숙였다.
노을이 저문다.
...
"크하하! 내가 그래서말이지, 세이디,
그 하얀 늑대 놈의 입술을 잡고 이제 두 팔로 그걸 벌려 찢어..."
"아, 아하하, 대단하세요, 아저씨..."
"그러니까말이다, 대단하지 않니?
솔직히 나도 겁 많고 무서운 거 많은 사람인데,
이제 너를 지키기 위해 말이지..."
대화가 남자의 일방적인 주도로서-
그러나 그리 분위기 나쁘지는 않게- 무르익어갈 때쯤,
한 검은 외투를 입은 경박한 분위기의 남자가, 주점으로 들어온다.
"반가워, 릴레."
그녀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 이 놈팽이를,
"아, 로이 당신. 또 일이에요?"
"그런가 봐. 나도 원하지 않아."
"당신 청소도 안 하고 가잖아."
"바빠서. 수고 좀 해줘."
그러며, 검은 외투의 남자는,
이제 숨겨둔 단검을 소매에서 꺼내곤,
"저기, 꼬마야."
"네?"
"안녕."
그리고,
자신을 부르나싶어 흘깃 돌아본 가련한 소녀의 목에,
흉기를 망설임 없이 박아넣는다.
"-..."
신음조차 채 흘리지 못한 채, 소녀는 그대로 절명한다.
어린 인생이 그렇게 끝난다.
"좋은 꿈 꿔."
"뭣- 너- 너ㅡ"
현실인지, 독에 취하여 환상을 보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 하는, 한 때 용과도 대적해 본 전직 용사는,
시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비틀거리고,
이내 검집에 손을 가져다댔으나 가지런히 뽑지 못 했다.
소녀를 지키기 위한 것임에도.
"하, 하하, 너- 저 애한테 무슨 짓을ㅡ"
"시간이 늦었으니 잠들게 했어."
"지- 지랄하네- 윽. 커헉."
대항조차 못 해보고, 모든 것은 찰나에.
...
기분나쁜 빛이 잠시 반짝이고.
이제 자신의 폐에도, 참살을 위한 도구 하나가 박힌 것을 내려다본다.
급소란 것쯤, 사람을 죽여본 경험 없이도 안다.
가빠지는 호흡 속, 죽기 전에.
"아, 알자. 왜 그랬- 어-"
"늑대 죽였다며. 그거 천연기념물이야. 그래서."
"좆, 같은, 아, 컥. 아이는- 아이는 살려줘-"
"죽었어."
"사, 살았을- 거야. 아니, 살릴 수, 있어. 제발. 제발."
"요즘은 영혼을 분해한다는 카르밀라의 단검에 찔린 사람도 살릴 수 있나 봐. 마술 좋아졌다."
"사, 살려줘. 걔만은, 제발. 그 아이, 불쌍하게 살았단 말이- 야, 그- 그리고, 아무, 아무 죄도!!!"
마지막 숨을 토한 뒤, 움직임이 급격히 멎어간다.
잠깐 피가 바닥을 타고 흐르는 그 움직임을 정취로서 감상하면,
시끄러운 놈의 뇌는 곧 썩는다.
난 고요한 게 좋다. 나만 말할 수 있어서.
썩은 놈은 말을 못 꺼낸다.
"누가 죄를 지었대?"
단검에 묻은 피를 대강 천으로 슥 닦아내고,
대수롭지 않아하며 지근거린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잖아. 죄 없어."
영혼이라도 분해된 세포 뭉치엔 별로 목소리가 안 닿는다.
알지만 죄 없단 말은 해 줘야겠다.
"불쌍한지는 모르겠네. 내가 불쌍하지."
...
파리라도 죽인 듯 감정 들 표하며,
무심히 돌아나서는 살인자에게, 주인장은 한탄한다.
"하다 못 해 걸레질이라도 해요. 시체는 내가 치울게."
"귀찮아."
"하, 씨발, 오늘 영업도 조졌네- 퉷."
"대금 달아놔."
"알았어요."
그러며, 남자와 어린 아이 하나의 몸이 싸늘히 식은 걸 본다.
"말들 많고 표정 많아서 안 지루했는데, 참."
그러며, 릴레는 나무 테이블 쪽을 본다.
먹다 남은 우유가 있다. 설탕 부스러기 떨어져 있고.
조금 흘리며 마신 것 같은데,
작은 손으로 정성스럽게 닦은 흔적이 있다.
꽤나 굶었을텐데.
"...저런 게 생전 배를 채운 마지막 기억일 줄 알았나, 몰랐지."
릴레는 씁쓸히 웃는다.
"알았담 더 잘 해줬지."
...
천이 여닫히는 소리.
구세의 용사 크로이드는 이제 낡은 천막 안으로 들어선다.
"일하고 왔어."
"또 죽였어?"
"응."
그것을 이제, 흰 로브를 걸친 또래의 소녀가 맞이한다.
하늘빛 머리, 남자보단 살짝 어리다.
"으음, 이번엔 왜 죽였어?"
"마족 되려고 하던데. 오염됐더라."
"어떻게 알았는데?"
"마족 눈에만 보이고 마족 공격하는 늑대. 우리 마을 수호신, 걔네가 죽였대."
"아 씨발, 랑아! 아니, 아, 좆같네. 그러게 진작에 그 저주받은 숲 좀 불태워 버리지."
"거기 들어가는 미친 놈들이 아직 있을지 몰랐어."
"왜 갔대?"
"음, 더 빠르다고 가로질러 갔어. 길 따라 가도 그리 오래 안 걸리는데 말야."
"병신 새끼들. 죽을 만 했다."
남자는 조용히 말한다.
"애도 하나 있었어."
"애?"
현직 용사는 차갑게 웃는다.
"응. 너보다도 어렸어."
"넌 죄책감 없냐?"
"그건 죄를 지었을 때 드는 거야."
죄악과 한을 관리하는 탑의 마법사 로=하나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얘는 어디서부터 이리 망가졌지?"
"난 멀쩡해."
"네가 착하다 생각해?"
"나쁘지도 않아."
로하나는 안 궁금해하며 묻는다.
"...너가 하고 온 일은 뭐야?"
"정의의 사자 짓거리."
"..."
"친절한 윤리 선생님, 정의를 선이나 악으로 분류하는 건 무의미한 거야."
크로이드는 실소한다.
"내 정의가 없었으면 거기 마을 사람들 다 죽었는걸. 그 남자랑 애한테."
"너도 언젠가 똑같이 당할거야."
"응, 나도 정의로운 사람에게 죽을 수 있겠네."
크로이드는 아무 염려 없이, 밝히 웃는다.
"그런데 내가 제일 강하잖아.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오롯이 나만 정의인 거지."
"어휴, 미친 새끼."
"멀쩡하다니까?"
그러며, 그는 입술에 문 풀을 태운다.
연기가 퍼져간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다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 내가 하는 것 뿐인걸."
"..."
"일하고 싶지 않다."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고단한 몸을 뉘인다.
"안 살고 싶다."
"곧 쉬게 해 줄게."
희망찬 소식인걸.
"얼마나 모였어?"
"90퍼센트."
"이제 곧이네."
원망을 흡수하여 그 위력을 키우는 마술 지팡이 아세라드.
최대의 한과 원념을 모은다면,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힘을 낼 수 있다 전해진다.
그 역도 가능하고.
로하나는 그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이 녀석의 이용가치 때문에 우리가 처형을 안 당하지."
"응, 그렇지."
"이 녀석의 힘을 쓰면 우린 틀림없이 맞아 죽겠지."
"그렇겠지?"
"응. 그럼 드디어 속죄할 수 있게 되는거네. 기뻐.
나,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으니까.
세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 뒤 사라질 수 있다면, 만족해."
"그래, 빨리 죽자, 우리."
"응."
그리 말하며 잠을 청하는 로하나를 본다.
...
크로이드는 혼자서 월륜을 구경한다.
"초승달 좋네. 계속 보고파."
홀로 생각한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려 하는 소녀. 그 뒤론 죽을 것이고.
그런데 어쩌나?
난 질서를 혼돈으로 바꿀건데. 너는 살 것이고.
스스로를 평한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용사?
내게 세계는 쟤 하나 뿐인걸.
...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을 하며
순수하며, 겸손한, 순결한, 자애로운
참 정의로운 사람이
지금 달을 본다.
저게 또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