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랩터다.

태어난 지 계절이 한 바퀴 돌기를 17번.

그러기를 어느 날, 내가 사는 세계가 달라졌다.

언제나 처럼 은신처에서 맛있게 영양을 섭취하고 있었을 뿐인데.

석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이 뒤편에 있었고 매끈한 돌바닥이 깔려있는 길이 앞쪽에 나 있었다.

바닥에는 알수 없는 그림이 있었고.


반짝거리는 금속을 뒤집어 쓴 사람들과 과하게 펄럭 거리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다가왔다.

다가온 수많은 사람들이 무어라 말을 걸어대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손에서 생겨난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싸고 나서부터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들리니? 통역 마법을 걸어보았단다."

[히이익! 하와와와]

"음, 알아 들을 수가 없는 말인가."

[아니에요. 잘 들려요. 깜짝 놀라서 그만.]


사람과 대화를 해본 적은 처음이다.

항상 부지런히 말을 걸어대도 내 말은 사람에게 전해지진 않았거든.


"궁정수석법사님, 소환 의식에 성공한 겁니까?"

"그런 듯 합니다. 왕자님. 제국 놈들이 소환한 것들과 비슷한 형태인걸 보아선 말이지요."

가장 잘 생기고 번쩍거리는 청년이 물었고, 펄럭이를 뒤집어 쓴 노인이 대답했다.

소환?

아무래도 이들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 같았다.


"네가, 너만이 우리의 희망이야. 제국의 폭력 앞에 더 이상은 굴복할 수 없어."

왕자님이라고 불린 청년이 눈을 반짝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아 올랐다.

힘을 원하는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이 원래 내 존재의미이기도 하고.

더구나 이렇게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니 마구마구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널 어떻게 부르면 좋겠니? 이세계 병기? 고대병기? 아니면 따로 이름이 있니?"


랩터라고 불러 주세요.


난 랩터다.

록히드마틴과 보잉 사에서 개발된 F-22A 랩터.

세계 최강의 전투기이다.

이세계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맨날 노래를 부르던 파트너는 어쩌고 나 혼자만 이세계에 온 듯 하다.



*



나는 왕자다.

위로는 병상에 누워 의식이 없는 아버님과 아래로는 제국의 수탈에 신음하는 천만 국민을 둔 소년가장이다.


고대병기인지 이세계병기인지는 알수 없지만 제국군이 소환해 내는 그것들의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그 어떤 정예기병도 마법사들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왕국의 충성스러운 특수부대가 제국에 잠입해 간신히 구해온 소환술식.

절대 실패해서는 안되는 그 소환의식이 성공했다.


육중한 회색빛을 띈 각지기도 했고 부드러운 형태이기도 한 병기.

자신을 랩터라고 불러달라 했다.

전투기? 무슨 말인지 그건 잘은 모르겠다만.


[파일럿이 되어서 절 타시면 돼요 왕자님.]


파일럿이란 건 기사를 말하는 듯 했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내가 그 랩터의 기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가장 위험에 앞장서는 왕족, 도 왕족이지만 뭔가 남자의 피가 끓어올랐거든.

이건 타야만 한다고.


[말만 통할 뿐 아니라 제 뜻대로 몸이 움직이다니, 이건 감동이에요!]


원래는 스스로 움직일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러면 굳이 내가 탈 필요는 없는게 아닐까. 쓸모 없는 왕자? 생체부품?

[그건! 안돼요. 트리거만큼은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당겨야 하거든요.]


병기윤리 어쩌구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반드시 사람이 타야만 한다고 말했다.


"왕자님! 큰 일 났습니다. 뇌신이 3마리 국경선을 넘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꺄아악 출격이다! 소티 소티!]

군을 책임지는 대장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와 급보를 알렸고

랩터는 신났는지 탑승석의 뚜껑이 마구 벌렁거리고 있었다.


뇌신이라. 나는 살이 떨리는데 말이지.



*



"으읔, 이건 굉장한 압력이군."


아직 조종을 할 줄 모르는 파일럿 왕자님을 대신하여 내가 직접 몸을 움직였다.

파일럿 슈트가 없으면 마하 1.6도 인간에겐 무리인 걸까.

나는 신나는데 말이지.


아아 신나라.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지다니.

나의 심장 F119 터보팬 엔진 한쌍은 정말 정신없이 뛰고 있어요.


"땅위에 건물이며 숲이 이렇게 작게 보이다니, 랩터는 정말 대단한거 같아."

그저 순항고도로 날고 있을 뿐인데도 추켜세워주며 감격해 주는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럴게 여태껏 파트너 파일럿들은 이런걸로 놀라주진 않았는걸.

놀라면 다른 성능들에 놀랐지.


그나저나 지금부터 싸워야 할 뇌신이란 대체 어떤 걸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정말 무서운 녀석들이지."

끔찍한 걸 떠올린다는 표정으로 짓고 왕자님은 알려주었다.


가까이 가기만 하면 폭풍에 휩쓸리고.

끝없이 천둥소리의 피어를 풍기면서.

불벼락을 한번 뿜기라도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뭐지 그런 생물은. 괜히 쫄리기 시작했다.


삐삐삐삐-

내 시야, 아니 감각? AESA레이더에 3마리 뇌신의 기척이 감지 되었다.

이건.


카모프 Ka-50 공격헬기. 통칭 블랙샤크, 또는 베오울프.


"우웃, 그게 뇌신의 진짜 이름이야? 무시무시한걸!"

무섭지 않다구요!

포식자와 먹이!

쟤들은 절 보기만 해도 꺄악 헬기살려, 하면서 줄행랑을 쳐야 된다구요!

물론 날 찾기도 어렵겠지만.


"그, 그렇구나. 대단해 랩터. 그럼 이제 어떻게 싸우면 되는거지?"
8000m 거리에서 그 3기의 헬기들이 귀여운 로터소리를 내면서 앵앵 거리고 있었다.

자존심 상해. 이딴 것들한테 한순간이나마 쫄렸다니.


5000m의 전투거리가 되면 트리거를 당겨주세요.

"알았어, 랩터."

긍정 대답은 윌코(WILCO), 부정 대답은 네거티브! 로 해주세요.

"위, 윌코! 당긴다!?"


끼야아아앗호오오오!

1번부터 3번까지의 암람 미사일이(Air Intercept Missile 120 Advanced Medium-Range Air-to-Air Missile)

퍼엉퍼엉퍼엉 시원하게 발사되었다.


자 끝. 이제 집에 가요.

"응? 끝난거야?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어어 뇌신이 어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