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터의 성격은 어울리기가 제법 어렵다.

땅에서 얘기 할때면 조잘조잘 말이 끝나지를 않고.

엔진에 시동이 걸릴때면 텐션이 마구 오르며 신나하고.

적과 마주쳤을 땐 상당히 흉포해진다. 깔깔깔 거리며 기관포를 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오싹해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연료가 떨어질 때쯤 갑자기 겁먹고 소심해지기도 한다.

히이익 얼른 집으로 가요 라니.

어떻게 보면 한창 때의 귀여운 여자아이 같아 보인다. 들려오는 목소리도 딱 여자애고.


[여자!? 여자!? 지금 여자라고 한거지요? 한거 맞지요!?]

이크. 

여자아이 같다는 말에 갑자기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말실수를 한것 같다. 함께 싸우는 훌륭한 동료를 두고 여자아이라는 말을 해버렸으니.


사과하자. 랩터는 훌륭한 전사-

[여자 같다는 모욕은 들어줄 수 없어요. 제대로 암컷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쪽이었구나.

전투기의 감각은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소녀 감성을 가진 듯해 보였는데 암컷이란 말을 더 좋아할 줄이야.


[또오 또! 절 처녀라고 했네요!]

이건 조금 억울하다. 난 분명 소녀라고 말했는데.

확대해석을 너무 예민하게 하는 거 아니야. 정말이지 소녀 같-


[저는 처녀 비행은 애저녁에 끝마친 훌륭한 비 처 녀 라구요.]


정말이지 전투기의 감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랩터가 살고 있었던 이세계에는 어떤 끔찍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까.



*



오늘도 왕자님과 함께 침략자들과 싸우고 있다.

미그29 펄크럼이 4대.


BVR(Beyond Visual Range 비가시거리)에서 먼저 포착해 4발의 암람을 쏘았지만,

플레어를 터뜨려가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던 2대의 미그는 격추하지 못했고

유시계전투 도그파이트가 시작되어 버렸다.


나 랩터는 세계최강의 전투기다.

기동력 선회력 어느 면에서도 최고수준이고 무엇보다도 날 락온 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AN/ALR 레이더 장치로 날 탐지하려는 거의 모든 종류의 주파수를 제거할 수 있으니까.

전자전의 여왕이다.

눈 앞에 뻔히 보여도 락온을 할수 없다구요.


2대의 미그는 날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엉덩이인 데드식스를 잡아 열추적 미사일을 꽂아 넣는 방법을 몇번이고 시도 중이었다.

더 빨리 움직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끄으으으으"

아쉽게도 나 또한 상황이 썩 좋지는 못했다.

내가 직접 조종하는 것이다보니 이 왕자님이 몇G기동까지 버틸수 있을지 알수도 없었고,

그러다보니 우월한 선회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피치를 당길수 밖에 없었다.


남은 암람은 2발인데 발사할 타이밍을 도무지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미친 R국 전투기년들은 느닷없이 코브라 기동을 하거나 하며 널을 뛰고 있어 종잡을 수도 없었고.

대체 왜 저것들은 코브라 기동에 진심인 걸까. R국의 전통이다 전통.


크게 크게 선회를 해가며 간신히 하나의 꽁무니를 포착했다.

녀석은 급한 회피기동에 들어갔지만 나 또한 이 찬스를 놓치기는 정말 싫었다.

왕자님이 조금만 버텨주길 바라며 5G를 넘어서는 기동으로 따라붙어 추격했다.


의외로 잘 버텨준 왕자님은 이제는 익숙해진 트리거를 당겨서 한 발의 암람을 발사했고, 명중했다.

불길에 휩싸인 채 한 기의 미그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위기는 찾아왔다.


미사일 자체에 종말 유도장치가 따로 있는 암람. 쐈으면 바로 이탈을 했어야 했는데 명중-격추까지의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왕자님이 급격한 기동에 대한 회복을 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머뭇거렸던 것이 

남은 한 기의 미그에게 뒤를 잡히게 되는 결과를 불렀고, 폭스 투 얼럿(열적외선 추적 미사일 경보)이 켜지게 된 것이다.

Fire&Forget 원칙을 지키지 않은 대가였다.


AA-11 미사일 아처가 날아오고 있었다.

플레어도 이미 써버리고 없다.


인간은 정면에서 오는 압력은 잘 버티지만, 피치를 올려 선회할때 머리 위에서 꽂히는 압력에는 약하다고 하였다.

선회를 통한 회피 기동을 하긴 부담스러웠기에

최대 속력으로 가속을 했다. 애프터버너까지 터뜨려가면서.


아처의 속도는 사이드와인더와 비슷한 마하 2.5 정도. 내 최대속도는 2.4.

미사일의 추진제가 다 떨어질 때까지만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고도가 부족했는지 좀체 최대속력까지 쉽게 나오질 않았고 미사일은 서서히 다가왔다.

아직도 미사일은 관성비행에 들어가지 않았고.


거의 닿을듯 말듯한 위치까지 미사일이 다가왔을 때 왕자님의 입이 열렸다.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면 되는거지?"

그러고는 자기 손으로 조종간을 움직여 180도 롤(횡으로 회전하는 항공기의 움직임)을 한 후 최대 피치로 꺾어버렸다.

공포에 휩쌓여 있던 내가 경고의 말을 해주기도 전에.


고도가 바로 속력으로 치환되면서 땅을 향한 날카로운 선회가 이루어 졌다.

미사일도 급격히 따라서 선회를 해댔지만 코앞에서 이런 회피기동이 이루어지면 따라붙을 수 있을리가 없고 결국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마하 2에 가까운 속도에서 최대피치로 움직이면 어느 정도의 G가 걸릴지 상상도 할수 없다. 누구도 이렇게 움직일수 없고.

미친 짓이다.

그래도 왕자님은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앞이 안보여. 그래도, 네가 신호를 주면 당길 수 있어."


지금이에요.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었고, 미그와 난 헤드온 상태였고, 난 이미 락온 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암람이 발사되었다.



*



격납고에서부터 활주로로 랩터가 나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랩터가 탈취 당하는 꼴을 보고 있었다.

경계병력에는 만전을 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의 눈에만 보이는 헛점이 있었던가.

적 특수요원이 랩터에 올라타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악 NTR이에요! NTR인 것이에요. 내 콕피트에 낯선...!]

NTR은 아마 기체 탈취 상황의 코드인듯 했고, 랩터는 그 경보를 계속 외쳐대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제국의 모든 전투기들을 압도하는 랩터의 능력이 넘어간다? 그건 절망이고 패배였다.


전에도 느꼈지만 랩터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보다 

파일럿의 조작이 더 우선권을 가지는 듯 했다.


어떡해야 하나.

랩터를 파괴해야 된다고? 넘어가는 것보다 파괴하는 게 더 나은 결과일까?

하지만 도저히 내 손으로 랩터를 부술 순 없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랩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를뿐이었고,

그건 내 옆에 서있는 대장군도 마찬가지였다.


[히이이잉.]

하지만 랩터는 그 위기를 극복해 냈다.

뭔가 우는 소리를 한번 내더니, 연료캡을 열고 모든 연료를 분사해 버린 것이다.

쏴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진 연료분사가 끝나고 당황해 하는 적국의 요원만이 콕피트에 있었다.

콕피트를 열고 탈출하려는 요원이었지만 난 검을 빼들고 뛰어들었고, 나보다 더 빠르게 뛰어든 대장군의 검에 이미 꿰뚫려 있었다.


랩터, 정말 잘해주었어. 역시 네가 최고야.

[흐응흨흨응흐응, 숙녀가 공개 장소에서 성대하게 지려버렸는데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나요.

빨리 가림막을 가져다 주거나 격납고에 넣어주세요.]


아아, 그게. 지린거였구나.



*



[너는...!]

[어머나, 언니. 한동안 안 보이시길래 퇴-역 당한줄 알았더니. 이런 곳에 숨어계셨네요.]

[라, 라이트닝 쨩]

[안녕하신가요, 왕자님. 최 신 예, 다목적 전투기 F-35 라이트닝이라고 합니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