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해."

 

그러자 나체의 남자는 목줄 끊긴 개새끼처럼 덤벼들었다.

핥고 빨고 물고 씹고 웃으며 마음껏 내 몸을 즐겼다.

나는 그저 천막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르가슴은 간지러움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로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몸은 강제로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던가.

주체할 수 없는 자극에 터져 나오는 것이 웃음이냐 애액이냐의 차이뿐이랬다.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내 몸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전신에 쾌감이 몰아쳤다.

나도 모르게 모포를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숨소리에 교성이 섞였다.

남자가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절정하는 내 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에 쾌감과 정복감이 비쳤다.

 

‘역겨운 새끼.’

 

말로는 꺼내지 않았다. 

더 흥분해 날뛰기 때문이다.

남자는 쾌감의 잔향이 남은 내 몸을 억지로 끌어 그의 고간 쪽으로 당겼다.

불쾌한 밤꽃향이 코를 찔렀다.

최후의 반항심을 긁어모아 입을 앙다물었다.

 

비웃음이 들렸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저 쓰레기와 역겨운 짓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오직 본능적인 혐오만이 이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갔다.

점차 웃음소리가 사그라졌다.

반항기가 더는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자가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뺨따귀

무반응

 

둔탁한 타격

미약한 반격

 

거친 발차기

사나운 주먹

추잡한 욕설

 

남자는 축 늘어진 나를 머리카락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까분다?”

 

다시 한번 남성기가 내 입 쪽으로 들이 밀어졌다.

턱 근육에 힘이 빠졌다.

목젖까지 밀고 들어오는 묵직하고 불쾌한 자극에 구토 반사가 일어났다.

 

콜록콜록

 

눈물이 절로 고였다.

잔뜩 고인 눈물에 굴절된 남자의 모습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뭐라고 뇌까렸다.

귓가를 울리는 심장 박동과 입안 질척이는 소리에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가 마침내 만족한 듯 손을 떼었다.

나는 그 자리 그대로 무너졌다.

천식 환자 같은 숨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정신이 들자, 행여 숨을 고르는 사이에조차 남자가 변덕을 부릴까 두려웠다.

헛구역질이 채 멎기도 전에 네 발로 기어 다니며 흩어진 옷가지를 주웠다.

 

콜록콜록

 

남자가 낄낄댔다

벌벌 떨며 옷을 입었다.

주섬주섬 물건을 챙겼다.

양이 맞는지 품질이 어떤지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옥 같던 천막을 나서려는 찰나, 남자가 말했다.

 

“잊지 마라. 내일까지다.”

 

천막 입구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짓씹는 입술에서 쇠 맛이 났다.

차마 알겠다는 말을 꺼내진 못해 고개만 까딱거렸다.

뒤에서 남자가 콧방귀를 뀌며 침대에 드러눕는 소리가 들렸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기침 소리가 났다.

나는 천막을 뒤로했다.

 

 

콜록콜록

 

 

남자의 은신처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평소 그의 천막을 향할 때 마을을 빙 둘러 갔다.

가능하면 마을 사람 누구와도 마주치지 싶지 않았다.

이런 자신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달이 중천에 떠 있도록 늦은 시각이 첫째 이유요,

전신을 감도는 역겨움이 둘째 이유다.

 

마을 중심의 우물로 걸어가 물을 퍼올렸다.

길어 올린 물을 수통에 옮겨 담았다.

아직 두레박 바닥에 물이 남아있었다.

찰랑거리는 물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두레박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남은 물을 그대로 쏟았다.

물이 몸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물길을 타고 전신에 냉기가 흘렀다.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역겨움은 가시지 않았다.

 

두레박을 도로 우물에 던졌다.

동아줄을 당겨보려 했지만 떨리는 몸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어찌어찌 두레박을 끌어 올리더라도 물이 다 쏟아지리라.

잠시 우물에 몸을 기댄 채 몸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었다.

 

젖은 옷가지에는 살랑이는 가을바람조차 눈 폭풍처럼 느껴졌다.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치아끼리 미친 듯이 맞부딪혔다.

떨어진 체온을 강제로 올리려는 육체의 조건 반사다.

멈춰보려 했으나 떨림은 잦아들지언정 없어지진 않았다.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내 몸조차도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콜록콜록

 

오늘 밤, 마을을 가로지른 셋째 이유가 있다.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감정.

 

몸에 남아있는 역겨움은 가시지 않았다.

아직도 떨림은 이어졌다.

눈이 우물 안으로 향했다.

달빛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둔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떨어질까?’

 

여느 때와 같은 충동이었다.

동시에 언제나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 구석 한쪽이 조금 편안해졌다.

 

 

 

“혹시 약사 언니 아니십니까?”

콜록콜록

 

황급히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낡은 가죽 갑옷과 바지, 장갑을 껴입고 얼굴에 경계심과 의문을 띈 여자가 보였다.

한 손으로 횃불을 높이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춤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횃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나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 못 챘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자경단원님.”

 

여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약사 언…… 님.”

“압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서로 꼬맹이일 무렵부터 십몇 년간 이웃으로 지내왔었으니까.

 

한숨 소리


여자는 허리춤에서 손을 떼었다.

여자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 입을 뗐다.

 

“이런 시각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해줄 말이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지금의 당신을 다른 마을주민이 보았다간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몸이 떨린다.

아직도 추위 때문인 걸까.

 

“어떤 오해 말씀이신지요?”

 

여자의 눈이 차가워졌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깔렸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맹세코 그런 오해를 사 마땅한 일은 한 적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이곳에 당신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마을 밖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 아닙니까?

당신을 마녀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마녀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같은 소문을 피하려고?”

 

 

맞는 말이다.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

내 집에서 껄끄러운 냄새가 나더라도, 

몇 달씩 두문불출하더라도, 

가끔 괴행에 가까운 기행을 저지르더라도, 

마을사람들은 내 뒷담은 할지언정 무시 못 할 일은 하지 않았다.

"고아가 자기 거둬주고 키워준 노파까지 잃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가끔 괜찮은 약이 완성되면 주변 친구에게 나눠줄 때도 있었고, 

심심할 때는 이웃집 꼬마과 곧잘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수개월 사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국에 의문의 역병이 돌았을 때부터.

 

처음에는 별일이 아니라며, 일상생활을 유지하라며 완고하게 굴던 상인과 정치인들도

사람들이 수십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말을 바꾸었고,

‘가벼운 전염병’이 ‘역병’으로 명명될 즈음부터는 마을에 방문하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역병에 휩싸인 나라는 도저히 이런 변두리의 마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일한 장점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대신 세금을 내는 것으로 얻었던 모든 것들이 없어졌다.

 

한때 마을의 안녕과 미래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포기하고 수도로 향했다.

남아있던 극소수의 지도자들마저 과로와 역병에 쓰러졌다.

 

마을에 남은 치안이라고는 눈앞의 여자 수준인 자경단뿐이었다.

조금만 조직적인 도적 떼가 이곳에 들이닥치는 순간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리라.

 

마을은 원래부터 자급자족과 거리가 멀었다.

세금과 함께 안전했던 보급로도 사라졌다.

부족분을 보급해주던 인력마저 급감한 결과, 음식을 포함한 모든 생필품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사람들이 연명할 수 있던 유일한 이유는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숲 속 사냥감마저 사라지고, 날씨까지 더 추워진 후의 이곳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절망을 양분 삼아 종교가 활짝 꽃피웠다.

무신론자들조차 마음을 기댈 곳을 찾았고, 잠시 의지하려던 마음은 의존에 익숙해졌다.

광신도가 된 이웃들의 눈에는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내 집은 수상쩍은 마녀의 본거지였고, 내 기행은 정체 모를 요술이었으며, 내 친우들은 마녀에게 홀린 배교자였다.

기침에 시달린 목을 도와주는 수준의 진통제는 역병조차 물리치는 마녀의 묘약으로 둔갑했고, 

이를 암거래했다가 역병에 죽은 사람들은 마녀의 유흥거리에 놀아난 희생자가 되었다.

 

내가 역병의 원인으로 지목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는 마을 밖의 허름한 폐가로 거주지를 옮겼다.

도피는 유죄의 증거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니 이유야 어쨌든 내가 우물 앞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고 여성 자경단원이 꺼낸 말은 합당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자경당원님.”

 

여성이 입을 뗐다가 한숨만 뱉고 다물었다.

조용히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그리고 내 몸에 부딪혀 땅으로 떨어졌다.

작고 조잡한 원통이었다.

한밤중에 눈이 의지할 곳은 횃불과 달빛밖에 없었건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이름의 약자가 새겨진 약병이었다.

눈앞의 여성이 처음으로 자경단원 일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말리고 말리다 끝내 포기하면서 쥐여주었던, 연고가 담긴 약병이었다.

하다못해 응급처치로 쓰라던 당부와 함께 건네준 기억이 선했다.


허리를 숙여 나뒹구는 약병을 집어들었다.

약병의 무게로 알 수 있었다.

안에는 아직도 연고가 가득 남아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필요 없습니다.” 

 

합리적이었다.

나와 연결된 고리를 최대한 끊어야 마을 안에서 평범히 지낼 수 있었다.

나도 그것을 이해하기에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왔다.

행여나 누군가 우리의 만남을 보고 듣더라도 그녀는 자경단원이고, 나는 마녀인 채로 남아야 했다.

우리가 한때나마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자매와도 같았다는 증거는 모두 없애야 했다.

이것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행동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자경단원이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마을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경단원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콜록콜록

 

나는 자경단원에게 기침 섞인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나는 어째서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이곳에 최후가 도래했음은 자명했건만.

나는 어째서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폐가로 돌아가고 있을까.

숨이 가빠왔다.

 

콜록콜록

 

그녀가 말한  ‘나를 탓하는 사람’에는 그녀 본인도 포함되어 있을까.

내가 지금 그녀를 의심하듯, 그녀도 나를 의심해왔을까.

나는 어째서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남아있는 걸까.

추위와 영양부족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강제로 끌어 앞으로 내디뎠다.

 

콜록콜록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폐가의 문을 열었다.

밀려 나오는 역한 냄새에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비틀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로 나아갔다.

평온했던 한때, 내키는 연구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각종 실험에 써왔던 도구들이 보였다.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테이블 위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모조리 내동댕이치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남자에게서 받아온 물건들을 꺼냈다.

각종 약재를 곱게 갈았다. 

계산했던 비율에 맞춰 분리해 물에 푼 뒤 가열했다.

 

길고 복잡한 유리관들을 따라 방울방울 내려오는 액체.

그 액체를 모으고 또 모아서 끓여 나온 가루.

가루들을 한 줌 한 줌을 담아 넣은 엄지만 한 유리병.

 

 

콜록콜록

 

 

기존에 계산했던 양보다 조금 모자라 보였다.

하지만 더는 시간이 없었다.

우선 성과를 보여야 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머리 한 켠에 어른거리는 여성의 얼굴을 밀쳐냈다.

일단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유리병 속으로 수통의 물을 조금씩 따랐다.

병을 서서히 흔들었다.

병 속의 물이 시나브로 탁해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 손을 모아 병을 꼭 움켜쥐었다.

두 눈을 감았다.

유리병의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꿀꺽

 

 

 

찬장에 아직 남아있던 재료를 몇몇 긁어모았다.

가루가 될 때까지 썰고 빻았다.

계산식이 빼곡히 적힌 종이 위에 한 줄로 올려놓은 후 종이를 길게 말았다.

가열할 때 쓰고 남은 불씨로 종이 한 쪽을 달궜다. 

반대쪽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있는 힘껏 빨았다.

 

얼마 만에 피운 궐련인지 모르겠다.

몸도 익숙지 않은 탓인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참아보려고는 했지만, 괜히 내 몸만 아팠다.

내 몸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건초를 긁어모은 잠자리에 누워 궐련을 꼬나물고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까.

 

몇 모금 피우자 궐련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머리가 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고 여긴 누구더라

집중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던 머리가 어느 망상을 움켜쥐었다.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역병치료제의 기한은 내일까지였다.

내 증상이 나아진 것을 본다면 남자도 생각을 고쳐잡으리라.

자신의 목숨이 시한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지금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역병치료제의 제조를 도와줄 것이다.

남자의 수하들이 이곳저곳에서 각종 약재를 모아준다면 더욱 빠르게, 보다 넓게 역병치료제를 공급할 수도 있을 테다.

내 지식과 기술이 급격히 중요해지고 권력의 위치가 뒤바뀌리라.

오히려 내 쪽에서 그를 노리개처럼 부려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궐련의 연기를 뱉었다.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 후 역병치료제의 제작법을 널리 퍼트려 전 국민을 구하는데 일조할 수도 있겠다.

모두를 병마에서 구한 영웅에게 관심이 쏠리리라.

그 결과 영웅이 자리한 마을의 치안이 다시 세워질 것이다.

못된 남자의 일당을 단숨에 쫓을 군대가 올지도 모른다.

도로가 안전해지면 마을에 상인들이 돌아오고 경제가 살아날 것이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라.

곰팡이가 슬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궐련의 연기를 뱉었다.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역병을 퇴치한 공로를 인정받는다면 마을 사람들이 내게 향하는 태도도 바뀔 것이다.

심신미약 상태였으니 종교에 기댄 것 정도는 이해해주겠다며 한껏 비아냥거리리라.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죄송하다고 납작 엎드려 싹싹 빈다면, 앞으로 내가 평생 거들먹거리더라도 찍소리 못하는 것을 대가로 용서해줄 용의는 있다.

주변 이웃들이 머쓱해하면서 화해의 손을 내밀면 적당히 튕기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줄 생각이다.

궐련의 연기를 뱉었다.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래도 자경대원이 된 그 여자만큼은 특별히 더 곤혹스럽게 만들 생각이다.

너만큼은 믿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거짓 울음이라도 터트려볼까.

그녀가 옛날 꼬마 시절 그대로 “언니 미안해~”하고 울고 불며 외치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다.

그리고는 그녀가 제일 질색하던 술잔치를 벌이는 거다.

다 함께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면서 회포를 풀 것이다.

그리고 술이 깨면 지끈거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고를 돌려주리라.

정말 고생했다는 칭찬과 함께.

궐련의 연기를 뱉었다.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미소가 웃음이 되었다.

웃음이 폭소가 되었다.

폭소가 멈추지 않았다.

폭소 속에 기침이 섞였다.

 

 

콜록

 

 

목이 아플 수 있다.

몸에 익숙지도 않은 궐련을 갑작스레 저질로 만들어 피웠으니.

 

 

콜록

 

사레가 들릴 수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니.

 

 

콜록

 

색색 대는 숨소리가 이어질 수 있다.

머리의 열이 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

타는 듯한 폐가 계속 아플 수 있다.

아직 약효가 돌지 않을 수도 있으니.

 

콜록콜록

설령 즉효성이었을지라도.

 

콜록콜록

 

원래 세상일은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까지 약초를 캐러 갔다가 도적 떼를 만날 수도 있는 법이다.

도적 떼의 두목에게 역병치료제를 바치도록 강요당할 수도 있는 법이다.

마을 보호와 약재 제공을 대가로 창녀처럼 몸을 바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약재를 긁어모아 제조한 약이 실패작일 수도 있는 법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실패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럴 수도 있는 법이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머리로는.

 

콜록콜록

 

내 몸조차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기침 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콜록콜록


궐련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궐련의 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콜록콜록








코시국에 콜록콜록 같은 키워드를 쓰는 건 꺼려지긴 합니다.

그런데 증상을 설사로 잡고 뿌직뿌직을 키워드로 쓰니까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