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아니, 내린다기보다는 쏟아붓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해 물질을 전부 씻어내려는 듯 아주 세차게.

 

-Retry?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환시를 본다.

 

빗줄기가 얼른 정신을 차리라며 연신 내 머리를 때려댔다.

 

빗물에 젖은 옷이 무겁다.

 

자신이 비에 젖었음을 자각하자 물기를 머금은 냉기가 피부에 스며듦을 느낀다.

 

싸늘한 추위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고개를 숙이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걸리적거렸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머리카락이 머금었던 물기가 손끝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뿌예졌던 시야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눈을 깜빡이자 눈썹에 남겨진 물방울이 점액처럼 끈적거렸다.

 

아니, 이건 물방울이 아니야.

 

목적 없이 사위를 방황하던 시선이 황망히 바닥을 향한다.

 

여기가 낮은 지대였던 걸까?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워터 슬라이드처럼 모든 물이 이쪽을 향해 콸콸 쏠린다. 하수구는 이미 꽉 들어찼는지 거품을 뽀글뽀글 토해내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날,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반투명한 빗물 사이로, 붉은 물감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맡은 비린내에 코끝을 찡그렸다.

 

왜지?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던 손을 확인했다.

 

손에는 아직도 신선한 핏자국이….

 

 

 

* * *

 

 

 

“허억!”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떴다.

 

“흐흐으. 흐으으….”

 

앞뒤가 안 맞는 기묘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거친 숨을 몰아쉰다.

 

전속력으로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또, 그 악몽이야.”

 

도대체 몇 번째 같은 꿈을 꾼 건지 모르겠다.

 

조상님이 조심하라고 예지몽이라도 꾸게 하는 걸까?

 

천천히 숨을 고르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곁눈질로 창밖을 확인하면.

 

화창하다.

 

따스한 햇볕이 커튼을 뚫고 이불을 덥힌다.

 

식은땀을 가득 흘려 최악의 아침을 맞이한 나와 다르게 창밖에선 짹짹 기분 좋은 참새 울음소리까지 들려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비는 오지 않는다.

 

“대체….”

 

그깟 꿈이 뭐라고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

 

팔꿈치까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린다. 주먹을 쥐어도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치다가 얼굴을 쓸어내려, 하관에서 입을 틀어막았다.

 

어금니를 꽉 깨문다.

 

딱딱 부딪치는 치아가 내는 소음이 조금은 줄어든다.

 

기상을 알리는 알람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씻을까….”

 

등허리가 축축하다.

 

고개를 들자 허리까지 닿는 머리카락이 샤워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뭉쳐 있었다.

 

나, 땀을 그토록 많이 흘렸나?

 

“으윽.”

 

상반신을 일으키자 확실히.

 

머리가 어지럽다.

 

마치 현기증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딱히 저혈압도 아닌데….

 

이마를 짚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괴로운 아침은 나로서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땐 비가 왔었다.

 

“아니, 무슨 소리람.”

 

침대서 일어난다.

 

다행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부엌 정수기에서 물을 서너 잔 따라 마신 뒤 싱크대에서 가벼운 세수를 했다. 얼굴에 냉수마찰을 하니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하아아.”

 

폐부에 쌓인 산소를 남김없이 토해낸다.

 

그렇게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니 나는 드디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달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7월 23일….”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어.

 

이틀 후만 무사히 넘기면 돼.

 

그러면 이 악몽은 모두 끝이야.

 

나는 새 수건을 꺼낸 뒤 욕실로 향했다.

 

 

 

* * *

 

 

 

카페.

 

“으음. 좀처럼 예매가 잘 안되네.”

 

남자친구가 빨대를 쩍쩍 씹으며 폰 액정을 바라본다. 그는 폰과 씨름하듯 액정을 거칠게 툭툭 두들겨댔다. 예매할 수 있는 시간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커피를 빨대로 쪼옥 빨아 마시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세상 진지한 얼굴이다. 어쩌면 시험 문제를 풀 때보다도 더.

 

“정 힘들면 굳이 안 봐도 괜찮은데. 어차피 너 뮤지컬 안 좋아하잖아. 데려가도 항상 졸기만 하고.”

“어떻게 그래. 너 반년 전부터 이거 개봉하면 꼭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잖아.”

“그래봤자 네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보고 싶은 거 집중도 못 하고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아하하! 이번에는 카페인 잔뜩 섭취하고 갈게.”

 

남자친구가 자기만 믿고 있으라며 본격적으로 양손을 쓰기 시작했다.

 

‘병신 새끼.’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남자친구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평소엔 무심한 주제에 이럴 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력이 빼어나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 여전해서 지금도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다.

 

어차피 예매해도 뮤지컬은 구경도 못 하는데….

 

차라리 집에서 보내자고 할까?

 

최근 안 한 지 꽤 되었다. 한 번도 안 한 남자는 있어도 한 번밖에 안 한 남자는 없다고 하니. 그도 제법 쌓여 있을 터다. 성난 욕구를 달래준다고 하면 이 바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짐승처럼 달려들겠지.

 

힐끗 그를 쳐다본다.

 

“아 또 빗나갔네. 버퍼링도 안 걸리는데 이거 너무 빡센 거 아니냐?”

 

자기 손보다 작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뭐어, 집에 부르는 건 마지막 수단으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빨대를 씹으며 쪼르륵 커피를 빨고 있자니 그가 외친다.

 

“오 됐다!”

“됐어?”

 

익숙한 미소와 함께 남친이 개선장군처럼 폰을 내게 보였다.

 

예매가 성공했다는 문구가 보인다.

 

“마침 누가 예매를 취소라도 했나 봐.”

 

2021년. 7월 25일. 예약 오후 5시 반. 성인 두 명.

 

지잉.

 

그가 멀어진다.

 

마치 우리 사이에 있는 테이블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네온사인이 깜빡인다.

 

글자는 흐려서 보이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Retry?'라고 적혀 있을 거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세게 찌른다.

 

고통이 흩어진 감각을 집중시키자 머릿속에서 지잉 울리던 소음이 사라진다. 이상해졌던 오감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환시는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말없이 눈을 깜빡이자 놀란 줄 알았는지 그가 헤프게 웃으며 콧대를 높인다.

 

“봤지? 오빠 이런 남자야. 포기를 모른다구?”

“그러게.”

 

포기를 모르네.

 

얼음이 짤랑 소리를 내며 유리잔 바닥에 부딪혔다.

 

 

 

* * *

 

 

 

하루가 흘렀다.

 

나는 또다시 같은 악몽을 꾸었다.

 

코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풍압.

 

하늘을 나는 우산.

 

차갑게 젖어가는 신체.

 

비강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

 

흐릿한 시야에 흘러내리는, 마치 삼각주 같은 붉은 물줄기.

 

물에 잠긴 발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고, 애써 들어 올리려고 하니 경직된 다리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간신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뭐? 그냥 집에서 보내자고?”

“생각이 없어졌어. 당장 취소해.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돈은 돌려받을 수 있잖아.”

 

수화기 너머로 남친의 곤란한 반응이 느껴진다.

 

나는 초조해진 나머지 손톱을 잘근 씹었다.

 

“대신 우리 집에서 보내자. 하루종일. 마침 옆집 사람도 여행 가서 집 비었어. 조금 시끄러워도 지난번처럼 뭐라 안 할 거야.”

“존나게 꼴리는 제안이긴 한데 네가 웬일이냐? 그렇게 하는 거 싫어하더니. 너 뭐 나한테 찔리는 일 있어? 수상한데….”

 

남친이 의심 섞인 어투로 캐묻는다.

 

확실히, 첫 경험이 너무 아파서 이후 그와 관계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타구니 조금 아픈 걸로 이 악몽을 끝낼 수 있다면 싼값이다.

 

나는 단호하게 그의 의심을 잘라냈다.

 

“됐고. 빨리 정해. 가더라도 난 빠질 거야.”

“아니, 네가 그렇게 나오면 선택지가 없어지잖냐. 나 혼자 뮤지컬 보라고?”

“그러니까 말했잖아. 예매 취소하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아. 두말하기 없기다?”

 

남친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한다.

 

남자는 이래서 편리하다.

 

실체 없는 무언가를 의심하면서도, 차마 직접 물어보진 못한다.

 

조금만 세게 당겨주면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져주는 척 질질 끌려온다.

 

“그럼 몇 시에 모일까? 원래 가볍게 카페에서 만났다가 출발하려 했잖아.”

“일찍 와. 종일 같이 있고 싶으니까.”

“어어? 너 진짜 뭐 잘못 먹었지? 내가 알던 우리 여친님이 아니신데?”

“기대해.”

“뭐? 야 잠…”

 

뚝.

 

“후흐흐으….”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심장이 뛴다.

 

이걸로 그날, 그곳으로 갈 이유는 사라졌다.

 

나는 미약한 떨림을 안정시킨 채 집구석을 둘러보았다.

 

집안 꼬락서니가 무슨 쓰레기장 같다.

 

“치워야겠지….”

 

편안함도 좋지만, 무드는 그보다 더 중요한 법이다.

 

지금 집안 꼴은 내 이미지는 물론 분위기까지 망쳤다. 연애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게 좋다. 상대가 나한테 계속 두근거릴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니까.

 

“이 와중에 이딴 걸 생각하고 있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만의 미소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우리는 유유상종인 모양이다.

 

그 사실이, 어째 조금 달가웠다.

 

 

 

* * *

 

 

 

머리가 어지럽다.


원인은 예의 그 악몽 때문이다.


다만 오늘 꾼 꿈은 평소하고는 조금 달랐던 거 같다.


애매한 기억 속에서 유독 눈에 익은 장소는 도로 위가 아닌 실내, 그것도 내 집이었다.


악몽 속에서 내 집은 붉은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끈적이고, 시뻘겋다.


싱크대 선반 위부터 아래까지.


자세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떠오른다.


창 밖에서 비는 내리지 않았다.


- 간다? 진짜 간다?

- 와

- 존나 떨리네. 뭐라도 사갈까? 원하는 거 있어?

- 님 센스에 맡김

- 아 쫌...

- ㅋ

 

폰을 덮고 말끔해진 집구석을 재차 확인한다.

 

냄새… 안 남.

 

먼지… 구석이랑 선반에 조금.

 

외관… 비교적 깔끔.

 

여기저기 전부 조금씩 하자가 있지만, 전업주부도 아닌 내가 이 정도면 굉장히 노력한 편이다.

 

와중에도 거사를 치를 침실과 식사할 부엌은 완벽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환기는 좀 더 시키는 게 좋겠지?”

 

내 착각이겠지만, 며칠 전 주문한 치킨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창가에 다가가니 하늘이 우중충하다.

 

“불길한데….”

 

아니겠지.


평소와는 달랐던 악몽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고, 희미한 물 냄새를 맡으며 향수를 찾는다.

 

사귀기 시작한 뒤로 그가 가장 처음으로 선물해준 녀석이다.

 

자기가 가장 꼴리는 향이었다나 뭐라나.

 

첫날은 녀석의 집념을 이기지 못해 끝내 이 향수를 뿌리고 했더라.

 

“…조금만 뿌리지 뭐.”

 

그가 가장 흥분하는 목덜미, 그리고 가슴골, 손등,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준비를 끝내고 창틀에 기대 그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가 10분 전이었으니….

 

‘대충 길어야 30분 정도면 도착하겠지?’

 

항상 과제와 아르바이트에 치여 사는 그가 갑자기 거창한 걸 사 올 리도 없고. 아마 끽해야 꽃일 테지. 어쩌면 눈치 없는 바보답게 술이나 간식거리를 사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

 

40분….

 

슬쩍 폰을 들여다본다.

 

다시 10분이 두 번 지나 한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손이 떨린다.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다시금 내 가슴을 세게 조여온다.

 

참지 못하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뭐함

-왜 아직도 안 옴 ㅡㅡ

 

답장해라. 답장해라. 답장해라. 답장해라. 답장해라.

 

답장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읽기라도 해라.

 

읽어. 빨리 읽어.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여친이 보낸 메시지잖아.

 

“하다못해 읽씹이라도 하라고 새끼야!”

 

분을 못 참고 내질렀으나 내가 보낸 메시지 옆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액정이 이마에 닿는다.

 

그때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네온사인.

 

비.

 

이명처럼 울리는 사이렌.

 

아냐, 그건 그저 악몽일 뿐이야. 일어나서는 안 될.

 

장소도 바꿨잖아?

 

여긴 뮤지컬 공연장 앞도 아니잖아!


하물며 내 집조차 아니라고!


입술을 잘근 씹으며 가디건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내심 그런 기적을 기대했다.

 

현관문을 열면 뻘쭘한 표정의 그와 마주칠 거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깜짝 놀라는 표정의 그와 마주칠 거라고.

 

하지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도 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발걸음을 상가로 향했다.

 

역과 우리 집 사이에 있는 상가.

 

만약 그가 뭐라도 사 오려고 했다면 분명 상가를 지나쳤을 것이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달렸다.

 

뚝.

 

뚝뚝.

 

손등에 빗물이 닿았다.

 

고개를 들자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조금씩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찔끔찔끔 저장된 물을 지상에 흘려내고 있었다.

 

동시에 내 마음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 거야….”

 

혹시나 해서 확인한 폰에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오늘만 넘기면 되는데….

 

그새를 못 참고 사라지다니.

 

마음이 꺾일 것만 같은 불길한 상상을 접고, 다시 달렸다.

 

상가를 지나쳐, 지하철역 입구까지 다다른다.

 

그때처럼 귓가에 왱왱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없었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다시 발걸음을 되돌린다.

 

여기 없다면 여전히 상가.

 

아니, 어쩌면 집 근처까지 와 있을지도 모른다.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쥔 채 역주행한다.

 

근데도 없다.

 

없다.

 

보이질 않는다.

 

연락은 여전히 되질 않았다.

 

어느새 뚝뚝 박자를 맞춰 떨어지던 빗방울은 장대비가 되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자기 쪽을 쳐다보라는 듯이 빗방울이 머리를 두드린다.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내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빗물이 눈꺼풀을 두들겨 아프다.

 

마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거울에 비친 꼬락서니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장은 엉망이고, 눈은 밤새 라면이라도 먹고 잔 것처럼 팅팅 부었다.

 

뚝뚝.

 

현관에 떨어지는 물기를 짜내다가, 지쳐서는 그냥 대충 홀라당 벗어던진다.

 

스마트폰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군다.

 

“아, 액정….”

 

뭐,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전화올 곳도 없고. 앞으로 할 곳도 없을 테니까.

 

나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기어 올라가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 * *

 

 

 

송송송.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칼질 소리.

 

결코 들려선 안 될 소리에 바닷속 깊이 가라앉은 의식이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둡다.

 

우수수 쏟아지던 비는 어느덧 그치고, 청명한 하늘 위에 불길한 붉은색 보름달이 떠 있었다.

 

무심코 느껴지는 포근함에 베개와 이불을 매만지고 냄새를 맡아본다.

 

“뽀송해….”

 

바뀐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옷도 갈아입혀져 있었다.

 

정신이 없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일목요연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폰을 찾아 헤맸다.

 

“아, 거실에 있지 참.”

 

현관문에서 옷을 대충 벗어 던지다가 떨어뜨린 사실이 떠올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벽을 짚고 일어선다.

 

문짝 너머, 어두운 실내에서 유일하게 불이 들어오는 주방.

 

그곳엔 네가 있었다.

 

“어? 일어났어?”

 

리드미컬하게 파를 썰던 손이 멈춘다.


죽이라도 끓이고 있었는지 인덕션 위에서는 쌀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다시 너를 바라본다.

 

잔뜩 멋을 부린 머리, 빗물에 젖은 티가 역력한 어깻죽지와 바지 밑단.

 

너는 살아 있었다.

 

“어, 어어?”

 

아래층에서 올라올 거라는 생각도 못 하고 냅다 그에게 달려들었다.

 

“위, 위험하잖아! 내 손에 칼 들린 거 안 보여!?”

“다행이다….”

 

품 안에 꽉 들어차는 그의 등허리를 감싸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살아있다.

 

실감이 존재한다.

 

“어디 있었어. 연락도 안 받고.”

“아, 그거? 미안 미안. 눈앞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목격자 겸 참고인으로 경찰서에 잠시 끌려갔었거든. 나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전화 받을 생각을 못 했다.”

 

사고.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안 다쳤어?”

“봐, 멀쩡하잖아. 물벼락을 좀 맞긴 했지만.”

 

그가 머리카락을 다시 세팅하느라 욕 좀 봤다며 싱겁게 웃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 집에 놀러 오라고 해놓고 집안 꼬라지가 참….”

“닥쳐.”

“옙.”

 

집안이 어질러진 게 누구 탓인데.

 

하지만 용서했다.

 

사지 멀쩡히 내 눈앞에 살아있으니까.

 

-Retry?

 

시야 구석 어딘가에 보이는 네온사인은 보이지 않았다.

 

보였어도 보이지 않아야 했다.

 

눈앞에 있는 건 녀석임이 틀림없어야 할 테니까.


헌데 어째서일까.

 

무의식 중, 나는 식칼을 쥔 그의 손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다.


축축한 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문.


힘 없이 허물어지는 신체.


비는.


내리지 않았다.

 

 

 

* * *

 

 

 

“하하…!”

 

나는 또다시 눈을 떴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다시 잠에서 깨어난 듯한 피로감이 전신을 덮쳐왔다.

 

똑같다.

 

하늘은 청명했고, 참새는 평화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기억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게 그때 느낀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폰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7월 23일.

 

데자뷰.

 

침대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칠흑으로 뒤덮인 세상.

 

-Retry?

 

예의 네온사인이 보였다.


심지어 전보다 선명해졌다.


슬슬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친 건 진작 미쳤을지도 모르고.


내가 느낀 이 짙은 피곤함은 단순히 악몽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정신이 스트레스에 찢겨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헤어져

-?????

-야 너 뭐야.

-혹시 뭔 일 있어?

-아니, 왜 갑자기 답이 없어

-진짜 뭔 일 있는 거지?

-금방 갈게!

 

몇 번을 반복했던 걸까?

 

전회차 기억은 또렷한데, 정작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파편화된 가장 강렬한 기억들뿐.

 

예를 들자면.

 

너가 죽었을 때.

 

“아하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이젠 꼴도 보기 싫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부엌으로 향한다.

 

아직 전회차의 감촉이 남아 있는 식칼을 양손에 쥔다.

 

-Retry?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눈을 짓이기는 걸로는 결코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을 저주와도 같은 글자.

 

그렇다면 답은 하나.

 

“후우.”

 

심호흡.

 

입 안이 바싹 마른다.

 

식칼 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두렵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해방이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영원히 반복할 뿐인 탈출구 없는 굴레.

 

나는 그렇게 여기며 눈을 감고….


쿵!

 

머리를 내리찍었다.




Retry?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전혀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눈을 뜬다.


여전히.


뇌리의 글귀는 사라지지 않았다.











슬쩍 던져봄.

잠 안 와서 새벽에 끄적여놓고 주제에 안 맞는 거 같아서 올릴까 말까 고민했던 거.

원래 이런 건 석화 마냥 장편으로 멘탈 조지고 해야 하는데 단편이니 대충 슝슝 넘겨서 감정도 조금 오락가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