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과 서큐버스 리메이크 - 장르소설 채널 (arca.live)

 

* 용어 설명은 가장 아래에 있다. *

 

우리는 보헤미아를 떠나 모라비아로 갔어.

보헤미아 산하의 변경백령이지만 그래도 보헤미아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거든.

애초에 체코어밖에 모르는 우리가 달리 갈만한 곳도 없고 말이야.

중요한건 모라비아로 가기로한 우리는 최고로 등신 같은 판단을 했다는거야.

 

내가 가진 돈 400그로셴 정도, 그리고 에밀리가 가진 80그로셴. 이 정도면 정착이 아니라 저택을 짓고도 남는 돈이었지.

그래서 난 용병은 때려치고 한적한 곳에서 농장을 사서 정착할 생각이었어.

근데 원래 주머니가 두둑할수록 돈쓰기가 싫잖아?

이게 모든 일의 시작이지. 난 등신처럼 귀족들이 관리하는 유료도로를 쓰면 바로 갈 수 있는 걸 괜히 통행료 내기 싫어서 돌아간거야.

말도 있겠다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거지.

평생 카를로비바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에밀리는 뭣도 모르고 동의했고 나도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어. 씨발 존나 좆 같은 생각이었지.

여행이 늘 그렇듯이 존나 많은 위험과 마주한거야.

낮에는 누더기를 입고 도끼나 조잡한 폴암을 든 거지새끼들이 달려들었고, 밤에는 짐승들이 달려들었지.

거기다 먹을 거라곤 나무껍질 씹는 것 같은 딱딱한 육포와 청어, 말라비틀어진 빵, 오래된 치즈 밖에 없고, 이제 가을이라 밤이 오면 춥고 이슬이 내리는 지랄맞은 생활이 몇날몇일이나 반복되는거야.

이처럼 좋을 거 하나 없는 여정이었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았나 싶어.

 

왜냐면 늑대나 도적을 피해 도망칠 때나, 맛대가리 없는 보존식을 먹을 만하게 만들겠다고 이것저것 긁어모은 식재료로 스튜를 끓일 때나, 추위와 이슬과 싸우면서 잠이 들 때나 에밀리가 옆에 있어줬거든.

배시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아침햇살을 받아 빛날 때, 찬바람이 불어와도 맞닿은 살결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질 때,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의 촉감과 향기.

들개 마냥 전쟁터를 찾아 홀로 떠돌아다니던 내게는 낯선 경험이었어. 

 

난 원래 사랑에 빠지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어.

하지만 아니었던 거야.

그냥, 어느샌가 내 옆에 쪼르르 다가와 미소 짓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어.

지 언니 뒤에 숨어 힐끔힐끔 쳐다보던 주제에 지금은 아이마냥 꺄르르 웃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그녀가 사랑스러웠어.

까마귀 깃털마냥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웠어.

가슴만 어루만져줘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 주제에 자기 쪽에서 먼저 안겨오는 태도가 마냥 귀여웠어.

 

그냥 에밀리라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에밀리는 36살짜리 늙고 무식한 용병이 가지기에는 너무 빛나는 존재였어.

서큐버스라 저평가 받아서 그렇지 에밀리는 나 같은 늙은이가 넘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윤기가 흐르는 긴 검은 머리카락에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 그리고 풍만한 몸매와 귀여운 얼굴, 무엇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인 젊음.

무엇 하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지.

 

난 문맹에 몸도 성치 않은 늙은 용병에 불과하니까.

 

난 평소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허세나 부리면서 떠들어댔는데, 막상 에밀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왠지는 모르겠어.

아마 무서웠던 것 같아.

밤마다 나를 감싸오는 이 육감적인 육체와 향기, 체온을 잃기 싫어서 그럴지도?

아니다, 그냥 에밀리를 잃기 싫은 거야.

 

그런데 밤마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그리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어.

속으로는 애새끼 마냥 잃기 싫다 어쩐다 하는데 몸은 솔직한 거지.

난 쫄보처럼 그냥 눈치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어느날, 우리 사이에 변화가 찾아왔어.

그날에는 평소처럼 한판 뛰고 자려고 했지.

여기까지만 보면 평소와 같지만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가 도적들하고 싸우느라 다쳤다는거야.

 

낮에 길을 가던 중에 도적들이 말을 탄 여행자를 노리고 나무에 매놓은 줄에 에밀리가 피하지 못하고 걸려 말에서 떨어졌어.

밧줄이 목에 걸려 낙마한 충격에 에밀리가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도적 4명이 수풀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지.

누더기에 가까운 허름한 옷에 대낫이나 도끼 따위를 든 도망친 농노들이었어.

그 씨발년들이 에밀리에게 손을 대길래 나는 말에서 내려서 그 도적들이랑 싸워서 두 명은 죽고 나머지 두 명은 도망쳤지.

나는 굳이 쫓지 않고 쓰러진 에밀리를 일으켜서 안전하다 싶은 곳에 야영지를 마련해서 에밀리를 보살펴줬지.

그래도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금방 눈을 뜨더라고.

난 기뻐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지.

 

그런데 에밀리가 어쩐지 풀이 죽어 있더라?

난 처음에는 그냥 말에서 떨어진 충격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에밀리가 도적과 싸우면서 생긴 상처에 붕대를 감고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거야.

나는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

에밀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서 미안해요….”

 

그녀가 이 말을 남겼을 때 난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지? 내 멍청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이렇게 물어봤어.

 

“왜 쓸모가 없어?”

 

그랬더니 에밀리는 겁먹은 강아지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이렇게 소리치더라?

 

“애초에 저만 아니었어도 보헤미아를 떠날 이유도, 다칠 일도 없었을 거 아니예요!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못해요, 글도 못 읽고, 그렇다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저는 그저 몸 파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창녀라고요!”

 

그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부모를 잃고 용병 밑에서 용병으로 자란 나나, 서큐버스로 태어나 언니 밑에서 매춘부로 자란 에밀리나.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그때는 그냥 말없이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어.

도적들과 싸우느라 생긴 상처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지. 

에밀리는 한참동안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지.

진정이 된 에밀리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어.

빨갛게 퉁퉁 부은 얼굴이 우스워서 내가 실실 웃자, 짜증이 났는지 볼을 부풀리더라고?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지.

에밀리는 겉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서큐버스답게 밝히는 경향이 있어.

그녀는 뱀처럼 팔로 내 목을 감싸오며 내 입술을 탐했지.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의 입술을 취하면서 자연스래 서로의 옷을 풀어해쳤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에밀리의 희고 둥근 가슴이 너무나도 탐스러웠지.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어.

 

“하아!”하는 탄식이 나를 더욱 자극했기에 나는 에밀리 척추를 따라 몸 이곳저곳을 훝으며 엉덩이를 움켜쥐었지.

자극을 받은 에밀리는 움찔하더니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의 가랑이를 내 몸에 비볐어.

그녀의 요염한 유혹에 나는 참을 수 없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려 그녀의 성기에 내 좆을 박았어.

“꺄항!”하는 교성 섞인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몸을 움츠리면서 골반을 이리저리 돌렸지.

그녀의 뜨거운 체온과 숨결이 내 몸을 감싸왔고, 머리카락과 살결은 내 몸을 조여오며 간질였어.

그렇게 우리는 창백한 달빛 아래서 서로의 몸을 탐했었어.

우리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지.

 

달이 점점 땅에 가까워지던 그때 지친 우리는 같은 망토를 덮은 채로 서로를 껴안은 채로 여운에 잠겨 있었어.

에밀리는 아기처럼 내 가슴에 파고들더니 금세 잠이 들었고, 나는 새근새근 작은 숨을 내쉬며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생각했어.

 

‘반드시 에밀리와 결혼하겠다. 내 삶을 오직 이 여자에게 바치겠노라.’

 

이 결정이 때로는 후회되기도 해.

하지만 내게는 진심이었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이제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어.

정말이지 그토록 긴 밤은 처음이었고, 해가 뜨는 것이 그토록 기대되던 날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냥 살아야 하니, 살았던 내 삶에 처음으로 목표가 생긴거야!

나는 구석에 놓은 가방에서 작은 금목걸이를 꺼냈지.

원래는 짐을 줄이려고 산 목걸이라 별 생각을 안 했는데, 그날 밤에는 유난히도 아름다웠어.

어찌나 반짝이고 아름답던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니까?

 

나는 이 보물을 손에 꼭 쥔 채로 그녀를 꼭 껴안았지.

그리고 아이 마냥 그녀의 꿈을 꾸면서 아침을 기다렸어.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막상 아침이 와보니 별일 없었어.

서로 처음도 아닌데 눈길 피하면서 눈치보기 바빴지.

그리고 씨발 좋은 일이 있기는 애미.

제대로 좆됬지.

 

길 한복판에 수레가 가로막고 있는 거야.

존나 불길해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갬비슨(*)을 입은체 번뜩이는 케틀헷(*2)을 뒤집어쓰고 창을 든 새끼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오더라고.

좆됬다 싶어서 숲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더니, 양쪽에서도 창을 든 씨발년들이 슬금슬금 걸어오더라?

나도 나름 경험이 많은 편이라고 자부하지만, 무장한 장정 3명을 더군다나 비무장한 여자를 지키면서 싸우는 짓은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무모한 일이야.

그래서 일단 칼자루를 잡기만 하고 소리쳤지.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써 자비를 배풀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그 씨발 좆 같은 강도새끼들은 낄낄거리며 웃더라고?

그리고 그 사이로 화려한 브리간딘(*3)을 걸치고 번뜩이는 그레이트 헬름(*4)을 쓴 기사가 거들먹거리면서 나타났지.

제대로 좆된거야!

요즘은 기사도니 뭐니 하면서 기사가 무슨 약자를 보호하고 교회를 공경하는 정의의 영웅인줄 아는 새끼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

그건 영지가 있는 기사거나 궁중기사들마냥 여유가 있는 새끼들이나 그럴 수도 있지, 절대다수는 그냥 거들먹거리는 깡패들이야.

특히 영지가 없는 새끼들은 꼴에 귀족이라고 일하기는 싫고, 먹고는 살아야하니 다른 길을 찾는데, 정직한 기사들은 주군을 찾거나 용병으로 일한단 말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절대다수는 정직을 모르는 새끼들이라 숲속에 숨어 불쌍한 사람들 삥뜯고 다녀서 강도기사, 덤불 속 기사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

그런 새끼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거야!

 

그때 나는 갬비슨 위에 사슬갑옷을 걸치고 머리에 케틀헷을 쓰고 있었으며, 숏소드와 방패를 가지고 있었어. 

전쟁터라면 중보병으로 환영받을 수준이지만, 무장한 장정 4명에 비할 수준은 아니야.

거기다 한 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뜩이는 갑옷으로 둘둘 싸인 기사라고!

기사는 걸어다니는 군대야! 일반 보병 20명은 있어야 겨우 해 볼만한 걸어다니는 요새 같은 괴물들이라고!

 

저런 괴물과 싸우는건 무모한 짓이야.

그래서 그냥 말로 들이받고 도망칠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걸 예상했는지 쫄따구들이 나한테 창을 겨누면서 포위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몰래 내 돈주머니를 에밀리의 손에 쥐어주면서 천천히 말에서 내렸어.

그리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아부했지.

 

“훌륭한 기사님, 이 비천한 순례자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그 기사는 삥뜯는 강도주제에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한 태도로 말했지.

 

“아, 별것 아니오. 그저 같은 기독교인 형제들끼리 나눔에 가치에 대하여 토론해볼까 하오!”

 

씨발 개좆 같은 강도새끼가 사람들한테 뜯어먹기만 하던 주제에 나눔의 가치에 논하는게 갓잖았지만 어쩌겠어? 이런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숲길은 강한 놈이 왕인데.

 

“네,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 형제니까요! 마침 제게 돈이 조금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대비해서 언제나 그로셴 6개와 페니 15개, 헬러 15개 정도 든 돈주머니를 따로 가지고 다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는 않은 평범한 여행자들이 들고 다닐 법한 액수라 이것만 주고 끝낼 수도 있거든.

그런데 이 씨발년은 내 돈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걸걸 웃으면서 소리쳤어.

 

“주의 가르침을 신실히 따르는 그대의 뜻을 존중하오! 우리 또한 보답으로 그쪽 숙녀분을 보호해주도록 하겠소!”

 

“씨발… 도망쳐!”

 

씨발 이 좆 같은 새끼들은 돈도 만족 못하고 내 여자까지 넘봤지.

서큐버스인 에밀리가 저 새끼들의 손에 넘어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는 뻔했어.

그래서 나는 말의 엉덩이를 치고 틈을 만들기 위해 칼을 뽑아들면서 왼쪽의 창병에게 달려들었어.

하지만 인생은 뜯대로 되지 않더라.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땅에 쓰러져 있었고, 관자놀이에서 끈적하고 뜨거운 느낌이 느껴졌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게 본능적으로 느껴졌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서 3발자국정도 거리에 떨어진 칼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었어.

하지만 강도기사는 내 칼을 툭 차내서 칼을 잡지는 못했어. 

그 다음 그는 내 배를 세게 걷어차면서 이렇게 말했지.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면 살아서는 갈 수 있었을 것을!”

 

그 개자식은 내 숨통을 끊기 위해 목에 칼을 겨누었지.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무력하게 내 최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그때였어. 에밀리가 말에서 내려 그 씨발년한테 매달린거야.”

 

“그만둬요! 순순히 따라갈 테니, 제발 그만둬주세요!”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

쫄다구들은 에밀리를 붙잡았고 기사는 고개를 휘저으며 이렇게 말한거야.

 

“그건 그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그리고 하려고 했던 일을 하려고 했어. 내 숨통을 끊는 일 말이야.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거 아니겠어?

주님께서는 내가 더 오래 살기를 바라시는지 그분의 대리인을 보냈지.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소!”

 

사자의 포효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

그곳에서는 검은 군마를 타고 번쩍이는 판금갑옷을 입은 장대한 체구의 기사가 서있었어.

갑옷이 어찌나 빛나던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지.

어쨌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를 돌아보자, 그 기사는 기다란 검을 뽑아 들고는 그 검을 겨누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용맹하게 소리쳤어.

 

“무고한 여행자를 공격하고 가녀린 여인을 희롱하다니, 같은 기독교인끼리 부끄럽지도 않소?!”

 

하지만 강도들은 그의 일갈을 비웃었지.

강도기사는 뻔뻔하게 팔을 펼치며 당당하게 괴변을 늘어놓았지.

 

“우리는 정당한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 뿐이오! 우리 피차 용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가던길 가는게 어떻겠소?”

 

하지만 기사는 물러서지 않았지.

 

“그대가 무고한 이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물러나도록 하겠소! 다섯을 셀 테니 그 전에 그들을 놔주시오!”

 

그러자 가소롭다는 듯이 강도기사는 코웃음치며 소리쳤지.

 

“다섯을 셀 필요도 없소! 공격해!”

 

그러자 에밀리를 잡은 놈을 제외한 3명은 일제히 기사에게 달려들었어.

하지만 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지.

그러다 먼저 자신에게 내질러지는 창을 가볍게 옆으로 쳐낸 다음, 부드러운 동작을 그리며 목을 찌른 다음, 자연스럽게 검을 뽑으며 폼멜로 다른 창병의 머리를 내려쳐 죽였어.

강도 두 명을 죽이는데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어.

하지만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당당하게 검을 수평으로 머리 위로 치켜드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어.

 

“계속 하시겠소?”

 

기사의 뛰어난 실력에 강도귀족은 적지 않게 당황한 듯하였지만, 자존심 부리느라 일할 생각은 안하고 강도질이나 하는 족속답게 물러서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지.

 

그 둘은 서로 검을 맞부딪히며 검술을 겨뤘지.

두 기사간의 불꽃이 튀기는 결투는 내가 여태껏 본 가장 웅장한 광경 중 하나였어.

얼핏보면 그 둘은 대등한 듯하였지만 명백하게 강도기사 쪽이 밀리고 있었지.

 

사실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격이 아닌 소드레슬링이야.

레슬링 실력이 뛰어나다면 아무리 잘 내지른 공격조차 짓누르고 검을 빼앗거나 제압할 수 있거든.

강도기사 쪽은 기사의 검을 짓누르긴커녕 자신의 검을 빼앗기지 않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일 지경이었지.

그리고 결판은 났지.

강도귀족은 힘을 쥐어짜듯 힘찬 함성을 내지르며 검을 내질렀지만, 기사는 가볍게 그 검을 잡고 겨드랑이에 끼워 제압한거야.

그리고 그대로 투구의 눈구멍에 검을 찔러넣었지.

 

그렇게 강도기사는 힘없이 털썩 쓰러지고,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에밀리를 잡은 강도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싸움은 끝났소. 여기를 떠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시오.”

 

마지막남은 강도는 에밀리를 구속한 손을 풀더니 후다닥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렸어.

우리는 이 고귀한 기사님께 연신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고, 나는 그에게 사례금을 주려고 했지.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오히려 내가 빼앗긴 돈주머니를 돌려줬지.

그리고는 이렇게 묻더라?

 

“그대는 이 위험한 곳에 온 것이오?”

 

그래서 나는 정착할 곳을 찾으러 왔다고 답했지.

그러자 그는 수레 너머의 길을 가리키며 말했어.

 

“그대는 운이 좋군. 이 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중 왼쪽 길로 빠지면 마을이 나온다오. 마침 생긴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은총의 기간 중이니 정착하기는 좋을 것이오.”

 

“은총의 기간?”

 

모르는 용어가 나와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지. 

난 여자가 질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꽤 많아서 그냥 에밀리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이 기사는 친절하게 답해주더라고.

 

“아, 마을이 새로 생기면 건설속도를 가속하기 위해 세금을 1, 2년 정도 면제해주는데, 이를 은총의 기간이라고들 부른다오. 어쨌든 해가 지기전에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난 이 가여운 이들을 묻어주고 가야겠소.”

 

난 의아해서 범죄자들한테도 그런 예우가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아무리 죄인이더라도 길가에서 썩을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고? 정말이지 요즘 시대에도 이렇게 고결한 인간이 있는 줄은 몰랐어. 분명 그를 만난 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었지.

그렇게 그 기사와는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며 해어지고 우리는 그 새로 생긴 마을을 향했어.

 

거리는 제법 멀어서 오후에 도착할 수 있었지.

새로 생긴 마을 답게 시장은커녕, 교회조차 없는 이 마을은 한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그리고 때마침 이민자들을 받기 위해 남는 집을 몇 채 지었다는데, 그 중 가장 크고 깔끔해보이는 집과 인근 땅을 포함해서 행정관에게 100그로셴을 주고 구입했고, 잘 보이기 위해 마을 발전 기금으로 10 그로셴을 추가로 쥐어줬어.

 

그렇게 우리 집이 생기게 되었지.

가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마냥 기분이 좋았어.

그리고 나는 지금껏 미뤄왔던 답을 하게 되었지.

 

“나랑 결혼해줘.”

 

내가 갑작스래 청혼을 하자, 새 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던 에밀리는 화들짝 놀라 벽난로에 머리를 부딪혔어.

“우우~”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문지르던 그녀는 “네?!”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돌아보더라?

놀라서 눈이 땡그래진 그 모습이 작은 동물처럼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한번 말했어.

 

“나랑 결혼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건 에밀리가 아니라 나였지. 어떻게 청혼을 이딴식으로 할 수 있는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지했어. 그녀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지금도 변치 않았어.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이었어.

 

그녀의 눈에서 수정구슬 같은 눈물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렸지.

나는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고는 엄지로 그 눈물을 훔치면서 목청을 가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지.

 

“사랑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난 무식하고 가진 것도 얼마 없는 데다가 나이도 많지만 이거 하나는 자부할 수 있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사랑해. 그러니 나랑 결혼해줘.”

 

그러자 에밀리의 얼굴에는 꽃이 피어나듯 환한 미소가 피어났어.

 

“좋아요… 내 사랑….”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싸면서 서서히 당겼지.

나는 그 손길에 몸을 맡겨 몸을 낮추었고, 그러자 그녀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보답했어.

정말이지 황홀한 시간이었지.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고, 따스한 체온이 내 몸을 감싸왔어.

그리고 두근거리는 두 개의 심장소리와 뚝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지.

이 물소리가 처음에는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에밀리가 내 바지를 벗기기 시작할 때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

어쨌든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고, 언제나처럼 정사를 나눴지.

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처음 할 때처럼 강렬하였어.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지쳐서 눈이 반쯤 풀린 에밀리에게 나는 금목걸이를 걸어주었어.

그리고 그녀는 대신, 언니가 물려준 은목걸이를 내게 걸어주었지.

그렇게 일생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은 우리는 이 행복이 영원할 것만 같았지.

 

물론 아니었지만. 

 

그렇게 정착한 우리는 땅을 개간하며 집을 꾸미고, 가축을 사고 기르느라 바쁜 세월을 보냈어.

자리를 잡는데 3개월이 걸렸고, 마을사람들의 환심을 사느라 가진 돈도 100그로셴 정도만 남기고 다 써버렸지.

그래도 보람은 있었어.

그럴듯한 축사를 짓고 거기에서 가축을 길러, 많은 숫자의 소들을 가지게 되었지.

그래봐야 30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지만 그래도 마을에서 행정관 다음가는 부자가 된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드디어 에밀리가 임신했다는 게 중요하지.

정말이지 에밀리가 임신했던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왕도, 황제도 부럽지 않았지….

 

에밀리가 악마의 사생아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축복을 내려준 것만 같았거든….

물론 내 착각이었지만….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나는 에밀리랑 오래전부터 결혼한 걸로 이야기했단 말이야?

그 덕에 항상 머리에 두건을 쓰고 다니느라 에밀리가 서큐버스라는걸 들키지는 않았지만, 에밀리는 워낙 낯을 가려서 사람들 앞에는 잘 나가지 않았어.

나도 괜히 에밀리를 남들에게 보여주다 꼬투리 잡힐 바에 그냥 화상이 심해서 남들 앞에 잘 안 나간다고 둘러댔지.

마을 남자들은 술하고 고기만 충분하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잘 안 쓰니까 내가 술과 고기를 많이 내놓아서 몇 년간은 별 문제없었어.

하지만 문제는 여자들이었지.

 

에밀리가 유일하게 완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마을에 이제 막 정착한 무두장이의 아내야.

무두장이는 돈은 잘 벌지만 냄새가 심해서 배척받는 직종이잖아?

원래 브르노에 있다가 이 촌구석으로 쫓겨난 모양이던데, 에밀리 또래의 아내가 있었어.

서로 마을 여자들 틈에 못끼고, 우리집이 목축업을 하다 보니 거래가 많아 자연스럽게 둘은 친해졌지.

그런데 이 마녀 같은 씨발년 때문에 일이 터졌어.

 

여긴 수비대가 없는 개좆만한 마을이라 주마다 마을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경비병 역할을 하는데, 그날은 내가 경비 담당이었던 날이었어.

그래서 마을 외곽 순찰을 돌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고?

애미 씨발… 이 병신 같은 마을에 정착하는게 아니었는데…. 

 

뭔 일인가 싶어서 가보니, 광장에 있는 칼에 에밀리가 묶여서 돌을 맞고 있더라?

이 개 좆 같은 씨발년들은 배가 불러온 임산부한테 그런 짓을 한거라고!

 

나는 경악하며 에밀리를 속박한 칼을 부숴서 에밀리를 구했어.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거야….

돌을 너무 많이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에, 오른쪽 뿔이 부러져서 땅에 굴러나녔어….

나는 황급히 에밀리를 우리집 침대에 눕혀 치료한 다음, 행정관 이 돼지 같은 씨발새끼를 찾아갔지.

그리고 이 좆 같은 일을 벌인 씨발년을 색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좆 같은 새끼는 이렇게 말하더라?

 

“근본적으로는 자네가 우리 마을에 마귀가 있다는 걸 숨겨서 벌어진 일 아닌가?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하는 건 공공기물을 파손한 자네 일세.”

 

애미 씨발… 너무 좆같으면 사람이 차분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냥 등신처럼 행정관 면전에 칼 수리비나 던져주고 다시 순찰이나 돌러 갔어.

에밀리가 걱정되었지만 경비대 업무를 빼먹으면 그걸로 더 꼬투리 잡혀 해코지할 것 같았거든.

그냥 재산을 다 처분하면 바로 떠나자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그러면 안 됐었는데….

 

 

 

 

밤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근무시간이 끝난 나는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지.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어….

우리 집에서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어….

 

쇠스랑과 횃불을 들고 모인 돼지새끼들은 악마를 처단한다며 우리집에 불을 지른거야.

이 씨발년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똥, 오줌이나 쳐바르는 무두쟁이 부인년이 우연히 내 아내가 서큐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씨발년이 마을 여편네 무리에 낀답시고 그 소문을 낸거야.

마을 여편네들은 지보다 젊고 돈도 많은 에밀리를 제거할 기회라고 올타구나! 한거지.

이 정의로운 심판을 내가 막아서, 심판을 마무리 짓고자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딴 짓거리를 벌인 거야….

 

나는 황급히 우리집을 둘러싼 폭도들을 밀치며 불타는 내 집으로 뛰어 들어갔어.

이미 집 안은 시뻘건 불길로 가득차서 한낮처럼 밝았지만, 연기 때문에 바로 앞도 안보였지.

하지만 그딴 걸 신경 쓸 여력은 없었어!

나는 유난히 넓게 느껴지는 이 좁아 터진 집 안에서 연기들 들이마시며 에밀리를 불렀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

몰려오는 연기와 불길에 난 바닥에 쓰러졌어.

하지만 그 덕에 에밀리를 찾을 수 있었지.

에밀리는 기어서 탈출하려다 기절한 모양이더라고.

나는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부어 에밀리를 들쳐업고 불타는 내 전재산을 뒤로한 채로 밖으로 나왔어.

폭도들은 나에게 쇠스랑을 겨누며 따졌지만 내가 검을 뽑아들어도 대드는 새끼는 없더군.

 

에밀리의 상태는 처참했어… 숨만 붙어있는 지경이었지….

그 아름답던 다리를 녹아내린 것처럼 끔찍한 화상이 뒤덮은 거야….

 

씨발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지? 

에밀리가 악마의 사생아라서? 

아니면 내가 사람을 죽여서? 

그것도 아니면 기독교인의 시체를 약탈해서?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죄를 지어서?

아니 어쩌면….

어쩌면….

 

그냥 내가 에밀리를 만난 것이 죄악이 아니었을까?

내가 죄를 지었기에 에밀리에게 봉변이 닥친 건가?

 

나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서 에밀리를 태우고 챙길 수 있는 물건들을 모두 챙겨서 소들을 이끌고 마을 밖을 나섰어.

그리고 숲 속에 자리잡고 에밀리를 쓰다듬어주며 가만히 기다렸지.

하지만 에밀리의 상태는 좋지 않았어.

아니, 좋지 않았어가 아니라 끔찍할 지경이었어.

시뻘건 양수가 터져 바닥이 흥건했거든. 그리고 다리 사이에는 기묘한 살덩이가 떨어졌어.

바로 우리 아이였어.

 

나는 태어나지 못한 이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었어.

내 손길에 아이가 뭉개지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이 아이는 무슨 죄를 지었다고 태어나기조차 못했지?

어째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지옥에 떨어져야 하지?

 

하지만 그 물음에 답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아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줄 수밖에 없었지.

난 그 이후로 한동안 신을 믿지 않았어. 그래서 기다렸지.

 

 

복수의 때를.

 

 

야심한 밤, 씹새끼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한 길목을 빼놓고 건초들을 쌓아 놓았어.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질렀지.

모든 집에 불을 지른 것을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길목에 쌓아 놓은 건초더미에 불을 질렀어.

그렇게 온 마을이 지옥불처럼 황홀하게 불타올랐지.

돼지들의 비명이 마치 축제의 음악처럼 흥겨웠어.

 

이 새끼들도 바보는 아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일하게 불길이 덮치지 않은 길을 찾아냈어.

나는 그 길목에 자리잡기만 하면 되었지.

돼지들이 내 앞에 스스로 걸어오니 나는 춤을 추는 것처럼 여유롭게 돼지들을 도살할 수 있었어.

내 복수는 비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지. 

 

복수를 마친 나는 불타는 마을을 뒤로하고 에밀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가까운 도시인 브르노로 갔어.

브르노에서 소들을 모두 팔고 에밀리를 치료해줄 사람을 찾아나섰어.

사형집행인, 약재상, 목욕탕, 성당, 의사가 있는 모든 곳에 들렀지.

하지만 에밀리를 치료해줄 의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어.

다들 저마다의 핑계를 대며 거부했지.

특히 성당에서는 신성한 장소에 어딜 악마를 데려오냐며 화를 내더라.

 

나는 할 수 없이 브르노를 떠나 에밀리를 치료해줄 사람을 찾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어.

물론 하루하루 에밀리의 상태는 악화되어갔지.

다리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색도 점점 이상해졌어.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우리를 피했지.

 

그렇게 오랫동안 길바닥을 떠돌기만 하다 보니, 돈도 다 떨어져 말도 팔아버릴 지경에 왔어. 

그래서 나는 에밀리를 업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경계를 넘다가 굶주리고 지쳐,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

이제 모든 게 끝난 줄만 알았지.

 

시간이 얼마나 흘렸을까?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눈이 떠졌는데, 나는 벽난로의 불길이 타오르는 어느 작고 허름한 집안에 있는 침대에서 눈을 떴어.

그런 나를 어떤 대머리에 짧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목에 십자가를 건채로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었지.

그 노인은 내가 눈을 뜨자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을 모으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어.

 

“할렐루야, 주여 감사드립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보고 있자,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나에게 수프가 가득 담긴 그릇을 건내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당신 아내는 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분은 제가 최선을 다해 돌봐드릴 테니 기운을 차리는 것만 생각하시지요.”

 

얼떨결에 수프를 받아든 나는 혼란스러웠어.

사제만큼 서큐버스를 혐오하는 족속들이 없는데 서큐버스를 돌봐준다고?

지금까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쌓인 원망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렇게 소리쳤지.

 

“제 아내는 서큐버스입니다! 악마의 사생아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신의 종이 돌봐준다고요? 여태껏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외면한 족속이 한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그 빌어먹을 신이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준 것 아닙니까! 내 불쌍한 아이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졌고, 내 아내는 그저 뿔이 달렸다는 이유로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 당신을 믿으라고요?!”

 

“악마의 사생아라고 누가 정했나요? 성경에 그리 나와있나요?”

 

사제의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내가 부당하다고 느꼈던 것에 나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거야.

내가 잉어처럼 뻐끔거리고만 있자 사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어.

 

“형제여, 양을 이끄는 목자에게 양이 뿔의 유무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볼품없어 보이는 작은 풀이 꽃을 피워 들판을 아름답게 만들듯이 주님께서 창조한 세상에서 가치 없고 저주받은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뿔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겁니다. 어쨌든 주님이고 뭐고 수프가 식겠습니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삶에 대해 더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내 손에 억지로 수프를 쥐어 주는데, 씨발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지지배처럼 찔찔 짜기나 했지.

그런 나를 뒤로하며 그는 내 아내를 위해 세례를 해주었어.

악마의 사생아라며 버려진 내 아내의 영혼이 구원받는 순간이었지.

다음날부터 나는 교회의 일을 돕기 시작했어.

 

모라비아의 변경에 위치하고 작은 텃밭과 사제의 집이 딸려 있는 이 작은 교회는 두 마을의 경계에 있어서 주말에나 사람들이 미사를 하러 모이고 그 외에는 한적한 곳이었어.

그레고리 신부님은 이 지역 교구를 담당하시며 헌금과 농작물을 판 돈으로 환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지.

사제가 비단옷을 입고 다니며 정부를 끼고 사는 이 시대에 아직도 이런 사제가 남아있나 싶을 정도로 경건하신 분이셨어.

그분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에 에밀리의 상태는 날로 좋아져갔지.

그렇게 다 잘 풀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심각한 흉년이 들어 예년의 반 정도 밖에 수확을 하지 못해 마을 사람 전체가 굶주릴 지경이 온거야.

당연히 먹고 살기도 힘드니까 교회에 들어오는 기부금도 별로 모이지 않았지.

그 탓에 에밀리를 치료할 약은 물론이고 우리가 먹을 식량도 점점 떨어져 간거야.

사제는 알아서 마련해보겠다고 웃어넘겼지만 씨발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될 수 없어서 나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지만 이런 흉년에 사람을 고용할 여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지.

그렇게 허탕을 치고 골목길에 주저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슬그머니 와서 알려주더라?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떨었겠지만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어.

 

그렇게 난 고히 모셔놓은 장구류들을 다시 꺼내서 입고 사제에게 작별인사를 했어.

하지만 사제는 펄쩍 뛰면서 나를 말리더라고?

그리고 에밀리에게는 내가 필요하다고 말이야.

에밀리도 내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약이 없으면 내 아내는 죽을거야. 에밀리가 없는 삶은 죽으니 만 못해.

길은 이 길뿐이야….

 

그래서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보헤미아로 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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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요….”

 

상태가 악화되던 에밀리가 주님의 품으로 떠나고, 신부는 교회 뒤편의 공동묘지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리던 중이었다.

허나 거구의 기사가 한 남자의 시체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는 강도귀족으로부터 그 둘을 구해줬던 기사였으며, 그가 가져온 시체는 바로 에밀리의 남편이던 그였다. 

기사는 그의 무덤을 만들면서 그가 남긴 이야기를 신부에게 들려주었고, 신부는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삽으로 무덤을 다지던 기사는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그 이후는 신부님께서 짐작하시는 그대로요. 그는 전장에서 벤체슬라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내 칼에 죽었고, 내가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온거요.”

 

사제는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짜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가 전장으로 떠나고 나서 에밀리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더군요. 결국 오늘 아침에 주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운명을 느낀 기사는 탄식하며 답했다.

 

“그가 죽은 것도 오늘 아침이었소….”

 

“아무래도 그 둘은 영원히 함께할 운명이었나보군요….”

 

기사는 삽을 내려놓고 대신 십자가와 망치를 들고 그의 무덤에 십자가를 박는다.

탁! 탁! 탁! 세번의 타격음이 숲속에 울려퍼진다.

십자가가 단단히 박은 것을 확인한 기사는 연장들을 챙겨 창고에 넣은 다음 신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께서는 저들이 천국에 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침묵이었다.

 

신부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느낀 바가 있는지 기사의 움직임이 멈추자 사제는 두 사람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말하였다.

 

“삶이란 속죄의 연속입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으며 속죄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숙명이지요. 전 분명 그가, 아니 얀씨가 주님 앞에 속죄하며 부름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묵묵히 신부의 말을 듣던 기사는 신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반짝이는 별빛들이 그리는 은하수가 천국으로 향하는 길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밤, 둘은 그들이 저 길을 따라 그분의 곁으로 향하기를.

 

한참동안 이어지던 그들의 기도가 마침내 마침내 끝나자 기사는 검과 갑옷을 고히 정리하여 창고안 선반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가문의 후광과 형제들의 도움에 기대어 명예만을 쫓는 삶을 살았소. 어쩌면 내가 쫓은 것은 명예가 아닌 내 같잖은 자기만족일지도 모르겠소. 대 장구들을 여기에 두고가오. 부디 더 좋은 일에 써주기를 바라오. 나는 이제 이 물건들이 필요가 없으니.”

 

그 말을 남긴 채 담담한 태도로 말에 올라 멀어져갔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신부는 황급히 기사가 거니는 길로 달려나가 소리쳤다.

 

“밤도 늦었는데 어디가시는 겁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 말만을 남긴체 기사는 창백한 달빛이 내려다보고 반짝이는 별빛이 내려다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 갬비슨: 리넨 등의 천으로 만든 누비갑옷. 중세 유럽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갑옷으로 깔깔이처럼 생겼다.

*2. 케틀헷: 솥처럼 생긴 투구의 일종.

*3. 브리간딘: 천 혹은 가죽 밑에 철판을 넣어 리벳으로 고정시킨 형태의 갑옷. 동양의 두정갑과 유사하다.

*4. 그레이트 헬름: 13~14세기경에 유행한 투구. 견고하나 무겁고 면갑을 열 수 없어, 14세기 말기부터 베시넷과 같은 경량화된 투구에 밀려 도태된다.



A4용지 26페이지 분량에 17000자 가량의 글이 드디어 끝났다.

3일동안 재대로 잠도 못자로 싸질렀네.

에필로그도 생각은 해놨지만 만들지 말지는 생각중임.

반응 좋으면 만들고 없으면 말려고.

어쨌든 봐줘서 고맙다. 난 좀만 쉬다 시험공부나 해야지.

뭐, 대학 입학하고 시험공부란건 해본 적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