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풀벌레소리 그리고 소녀.

 

내가 같은 추억을 연상하도록 하는 단어.

 

그 추억은 마치 어린아이가 보관한 깨끗한 낙엽 같아서 기억할수록 아련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에 쓸쓸하며 그럼에도 경험했다는 것에 행복한 것이었다.

 

머리가 커진 지금도 나는 아직도 그 추억 속에 잠겨있었다.

 

주황빛 하늘에 수놓은 뭉게구름. 그림자가 지고 있는 아파트. 그 사이에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놀이터가 있는 시간.

 

스테인리스가 대중화 되지 않은 시대에 싸구려 철로 만들어진 미끄럼틀은 녹이 슬어 붉은 빛을 내고 있고 높이는 성인 남자보다 높으면서도 얇아 어린 아이가 올라가도 비명소리 같은 쇳소리가 났다.

 

정식 명칭을 아직도 모르는 뺑뺑이는 탔을 때 원심력에 의해 날아갈 거 같은 느낌이 신기한 아이들이 실험이라는 핑계로 올려둔 모래에 반쯤 파 묻혀 있었다.

 

그네 역시 붉은 빛을 내는 가운데 줄은 검게 때가 탔고 시트 부분은 가죽인지 천쪼가리인지도 모를 것들이 벗겨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좋지 못한 상태 따위는 상관없는지 소년과 소녀 나란히 같이 타고 있었다.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움직이던 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학교에 있었던 이야기. 점심을 먹고 돌아다닌 이야기. 어제 봤던 만화 이야기. 

 

으레 그 나이 또래들이 나눌 법한 평범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둘은 또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장면 속에서는 조금 달랐다. 똑같은 주제 똑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둘의 얼굴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며 분홍빛 분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본다면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으리라.

 

당사자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의 눈동자 속에 상대를 담아내기만 바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렇듯 처음인 당사자는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생에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가장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가장 재밌는 것을 보았을 때 등등 행복한 순간들을 대입하여 그 답을 알아보려고 하지만 어리숙한 머리로는 둘이 같이 있을 때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밖에 정리가 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황빛 하늘이 점점 보랏빛에게 밀려나며 어둠이 드리우는 하늘이지만 두 아이의 주위에는 아직도 빛이 나는 듯 했다.

 

마치 하늘에 얼굴을 내민 달과 별들이 아이들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듯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 어린 나이의 아이들의 하루는 짧은 법이었다.

 

태양이 완전히 넘어가 버린 밤. 둘의 휴대폰에는 아이를 찾는 부모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시에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둘은 한 가지 공통점이 늘었다는 것에 기뻐하고, 전화를 받으며 헤어졌다.

 

걸려온 통화 속에는 오늘도 늦었냐며 타박하지만 그래도 왜 그런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엄마의 목소리. 이미 그 목소리는 뒷전인 소년과 소녀는 내일 또 만나기를 희망하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 * * *

 

너무나도 소중하여 생각만으로도 지금의 나를 아련하게 그립게 만드는 과거의 추억. 이제 몸은 커버렸지만 아직 소년인 나는 창문을 관통하는 늦은 빛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황혼, 풀벌레소리 그리고 소녀.

 

내가 같은 추억을 연상하도록 하는 단어.

 

황혼에 물든 하늘, 사람의 침묵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교실로 들어오는 소녀.

 

나는 그 소녀는 반갑게 맞이하며 웃는다. 

 

소녀도 쑥스러워하지만 나를 보며 웃는다.








글 안 쓴지 꽤 오래됐는데 오늘은 뭔가 삘 받아서 써봄


필력 포텐 개 터진다ㅏㅏ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