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있기에 평화가 있다.”


후대에까지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긴 사내.


크로웰 헤이스트.


전장에서 수많은 업적과 공을 세운 그였다.

국가와 개인에게 여러 보상을 받아왔고, 그중에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진귀한 보구들도 여럿.


하지만 그 무엇도 크로웰에겐 감흥이 없었다.


주면 주는 대로 형식적인 감사만 표하고 창고에 던져두다시피 쌓아놓았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금은보화 따위가 아니었다.

한평생 바랐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진정한 가족이었다.


저녁 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서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그런 평범하고 화목한 가족을 원했다.


하지만 분에 넘치는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탓일까.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놈의 귀족이 뭐라고, 가족 간에도 격식을 차린단 말인가.


그가 가족들에게 몇 번이고 말을 걸어봐도 자신을 남편이 아닌, 아버지가 아닌, 무슨 전지전능한 신처럼 대하고 있었다.


정작 크로웰 본인은 그런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음에도.


여러 명의 자식들은 차기 가주 자리를 노렸다.

그까짓 가주 자리 때문에 어릴 때부터 손바닥이 터져라 미련하게 검만 휘둘러댔다.


“검술 수련은 그만하고 이 아비와 함께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크로웰이 자식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고 권유해 보았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자식들은 항상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부터 노력해야 헤이스트의 이름에.

또한 검왕이신 아버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며 계속 검만 휘둘렀다.


대체 가문이 뭐길래, 가주가 뭐길래 저렇게 짧은 유년 시절을 버려가면서까지 쟁취하려 하는 것인가. 


가족이 있기에 가문이 있는 것이 아니던가.

절대 가족 없이 가문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아내들과 자식들은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었고 가족들과의 거리에는 메꿀 수 없는 틈이 생겨버렸다.


“할부지!”


그런 상황이 점차 익숙해져 가던 때였다.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었다. 호칭은 가주님이 아니었다. 하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지도 않았다.


가족이란 것을 만든 지 30년 만에 드디어 나타났다.

검왕이 아닌 크로웰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준 녀석이 나타난 것은.


키가 크로웰의 무릎까지도 오지 못하는 자그만한 손주 녀석이었다.


“아이쿠 우리 베르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이 할애비를 다 찾아오고.”

“안아줘!”

“우리 손녀가 안아달라는데, 이 할애비가 어찌 거부할 수가 있겠느냐. 자 이리 오거라.”


세 살배기 아이가 깡충깡충 뛰며 안아달라고 보채는 것이 어찌나 그리 귀엽던지.


 크로웰의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크로웰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양팔을 벌렸다.

베르는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겼고, 크로웰은 흐뭇하게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베르야말로 다 늙어가는 자신이 이 집에서 찾을 수 있는 제일의 보물이요 희망이었다.


그런 손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가고 싶었거늘.


침대에 힘없이 누운 크로웰은 끝까지 검을 쥐었다.


힘없는 눈꺼풀은 죽음을 종용하고 있었다.

참 짧은 생이었으며, 죽어서도 손주들과 자식들의 앞날을 빌어주리라.


크로웰의 숨은 조용하게 꺼졌다.


*


그런데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환한 빛이 보인다거나. 천사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자신은 죽었을 터인데. 

어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잠시 뒤 무척 충격적인 광경이 말해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작은 스탠드 거울이 자신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한 손에 들어갈 듯 작은 체구에 통통하게 오른 살집.

그야말로 완벽한 세 살배기의 모습이었다.


“이든 괜찮아요. 이제 엄마가 왔으니 안심하세요. 엇 혹시 배가 고픈 건가요?”


몸부림과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옆방에서 한 여성이 급하게 달려 나와 크로웰을 품에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너무 수치스러워 자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되지만 솔직히 편안했다.


따듯하고 노곤해지는 게 아주 극락이었다.


그는 마침내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검왕, 크로웰 헤이스트.

환생해버린 것 같다.


애기 이든 펠트로휜으로.


“띠바.”


‘씨발’이라는 뜻이었다.



시간은 강물이라고 했던가.

유속이 강한 물살처럼 시간은 흘러, 어느덧 1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정말, 정말 가야 하나요 이든….”

“예 입학식에 못 가면 어렵게 들어간 헤이스트 아카데미 합격 취소됩니다 어머니.”

“그래요! 그까짓 아카데미 가지 말고 엄마랑 같이…!”


그녀가 울먹이며 나에게 매달렸다.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무릎을 꿇어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어머니 영영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렇지만 이든이 가면 이 집안에 엄마 혼자뿐이에요. 엄마는 너무 적적해서 매일 밤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성공해서 꼭 집에 돌아올 테니까요.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보내주십시오 어머니!”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머니였다.

미혼모 출신으로 하나 낳은 자식인 나를 어찌나 극진히 위하는지.


가끔은 나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극성인 어머니를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좋지 않지만, 이제 그만 이 시골구석을 벗어나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래요 미헬. 젊은 패기로 넓은 세상을 돌아다녀 봐야 진짜 남자가 되는 겁니다.”


옆에 있던 프레드 아저씨가 내 편을 들어주며 말했다.


어머니를 흠모하는 마을 상인인 그가 구해다 준 입학시험 참가증 덕분에 이렇게 아카데미에 합격할 수 있었다.


프레드 아저씨 순수하고 참 좋은 양반이던데.


어머니도 이제 그만 좋은 사랑도 나누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저씨에게 나 없을 동안 쓸쓸해 하는 어머니를 공략해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하자, 숨길 수 없는 입꼬리를 가리며 딱 잡아떼는 그의 모습이 퍽 웃겼다.


“가보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세요!”


프레드 아저씨의 어깨에 기대어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나는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고, 마차는 조금씩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염병할 드디어 나가네.’


몸은 열일곱 소년의 몸이라 하여도, 정신은 백 살도 더 먹은 늙은이다. 애 취급받으면서 연기까지 하고 있자니 고역이었다.


드디어 좀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약 열흘을 꼬박 이동하고서야 마차는 크로타니안 제국의 수도 ‘켈레브’에 도착했다.


“이야, 참 많이 변했어 여기도.”


거리의 모습은 크로웰, 아니 이든이 알던 풍경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모르는 상호의 가게들이 즐비했고, 사람들의 옷차림 역시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14년.

그 적지 않은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며 나는 입학식 참가를 위해 아카데미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크로웰 아카데미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떻게 이 아카데미를 알고 있냐고?

이 아카데미의 최초 설립자는 크로웰 헤이스트.

그래, 나다. 내가 세운 학교다.


인재 양성이니 뭐니 설명은 장황하게 했지만 결국 설립 목적은 하나였다.


“돈은 넘쳐나는데 쓸데는 없고 결정적으로 심심했었지.”


아카데미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아카데미는 귀족들 탈세용으로 세워진 곳이 많으니 내 경우는 건전한 축에 속한다.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나.”


등록금이나 기숙사비는 따로 얻을 곳을 생각해 두었으니 뒷전으로 미루고,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아카데미 입학 후의 방침이었다.


내 성격상 당연히 학년 톱을 노린다.


한때는 검왕이라고 칭송받던 소드 엠페러다.

이런 어린놈들 상대로 1등을 놓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나 되겠는가.


아직 육체가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꾸준한 수련을 통해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까지는 도달했다.


둘러보니 대부분의 녀석은 소드 비기너다.

벌써 소드 유저까지 도달한 녀석들도 몇 있긴 했지만, 엑스퍼트까지 도달한 자는 없었다.


우선 내가 엑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함구하기로 했다. 


전장에서 십 년 이상을 검을 휘두르며 오러를 각성해야 지만 달성할 수 있는 엑스퍼트의 경지를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마 세간이 발칵 뒤집히겠지.


“입학식부터 괜히 이목을 끄는 행동은 삼가야겠지.”


제1순위 목표는 아카데미를 무사 졸업하는 것이다.

그다음 제국 군에 입대해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지난생 처럼 귀족 작위를 얻는 것이다.


이번 생이야말로 평범한 가정을 꾸려보리라.


“어, 야 저거 그분 아니야?”

“어 맞는 거 같아. 올해 입학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는데, 정말일 줄은 몰랐어.”

“소문대로 진짜 예쁘긴 하다….”


내가 조용히 다짐을 하고 있던 무렵.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도도히 걸어오는 한 소녀.


“베르.”


많이 바뀌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소중했던 나의 손녀 베르 헤이스트가 틀림없었다.

울컥하는 감정이 북받쳐 살짝 눈물을 훔쳤다.


정말 예쁘게 자라주었구나.

이제 다 커서 숙녀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아직 아기 때 모습이 남아있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베르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아니 잠깐만. 베르가 여기 입학한다고?”


이런 때려죽일 놈의 자식새끼들 같으니.

내가 죽기 직전에 베르만큼은 검을 잡지 않았으면 하여, 부디 원하는 미래를 택하게 해주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기어코 저 아이에 손에 검을 쥐여줬구나.


언젠가 놈들을 찾아가서 뒤지게 패주마.

베르를 검술 아카데미에 보냈다는 사실에 나는 말없이 분노를 삼켰다.


“아니 베르… 검 같은 건 배우지 말고 나한테 시집 오라니까? 우리 집 백작가인 거 알면서 왜 자꾸 튕기는 거야.”


베르에 앞에 한 남성이 나타났다.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는 뱀 같은 애송이가 감히 베르의 턱을 어루만지며 지껄였다.


“헨리 로이닉스 적당히 하세요. 당신이 아무리 백작가라 하더라도 저 역시 엄연한 귀족입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하 이렇게 도도하게 구니까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진짜.”

“더 할 말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헨리인지 헨드인지 하는 저 망나니 새끼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았다.


로이닉스 백작.

그 능구렁이 같은 자식의 손자인 모양인데, 재수 없게 생긴 건지 할애비랑 아주 판박이다.


내가 아직 크로웰 헤이스트였던 시절.

귀족 모임에서 평민 출신이라며 대놓고 꼽주길래 밤에 저택에 침입해 줘 팬 적이 있다.


백작 본인은 그렇게 버릇을 고쳐줬는데 저 망나니 같은 놈은 어떻게 갱생시켜야 하나 고민이다.


순간 내 앞을 지나치는 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어릴 적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

다시 한번 할애비를 불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들었다.


하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손녀를 보며 그 소망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지 않았는가.

현재의 나는 검왕 크로웰 헤이스트가 아닌 이든 펠트로휜.


베르의 눈에는 나는 그저 타인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베르의 할애비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손녀가 나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나는 그 아이의 할아버지다.


제1순위 목표를 수정한다.


이제 졸업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베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를 최우선으로 한다.


‘베르에게 해를 입히거나 찝쩍거리는 애새끼들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