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아


싸늘한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으아아아! 저게, 저게 대체 뭔데!"


뒤에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남자 뿐이었다.


딱히 특이할 것 없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 쏟아지는 폭우가 피처럼 붉다는 점과 그 비가 그 남자를 따라다닌다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크하하하! 놀랄 것 없다 아해야, 그대들이 숙청하려던 마왕이 아니었느냐? 그대의 기개를 보이거라!]


동료들은 진작 죽었다.

저 한 남자에게. 아니, 저 재앙에게


전위, 셀레나는 늘 합을 맞추던 대로 마왕이 해오는 공격을 막으려 했다.


아니, 방패로 막았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늘 아름다운 미소로 우리들을 이끌어주던 그녀는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저마다의 이명을 가진 위대한 이들이 용사의 파티로 뽑혔음에도 우리는 마왕의 발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재앙.


고작 성검 따위로 죽일 수 없으리란 사실은 명백했다.

계속해서 도망치는 나에게 더는 흥미가 떨어진 것일까.


[갈(喝)! 그대는 무인으로써 자긍심도 없는 것이냐! 그대를 살리려 몸을 던진 여인만 넷이었다!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가 따로없군.]


"나는...... 나는......."


고간을 적시는 뜨거운 물줄기가 느껴졌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용사로 소환된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당연하게 여행을 하고, 모험을 하고, 사랑을 키워가서, 멋지게 모험을 하고 마왕을 물리친다.


모든 것이 스러져가는 가운데, 흑색의 도포를 입은 그 남자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자로다. 허나 이곳까지 온 노력을 감안해, 경의를 담아 보내주지.]


남자가 진각을 밟았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제 2식 : 용권(龍拳)]

-파지지지직, 쨍그랑.


그 주먹은 세상을 깨트렸고.

그것이 자신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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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너무나도 연약하다."


흑색의 도포를 흩날리며 푸념을 늘어놓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마왕님! 오늘도 대단..."

"어허!"


천마라고 정정해 주어도 이 성의 주민들은 그를 마왕이라 부르며 떠받든다.


"......천마님은 역시 굉장해요! 그 무시무시한 용사를 한방에!! 빠샤!"


해맑게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꺄르르 웃는 그녀는 천마인 그를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릴리트, 호들갑 떨지 말거라. 그 아해가 약했을 뿐이니."


용사로 소환되었다. 마왕이 제일 쌘 놈이라길래 마왕이라는 뿔달린 놈을 때려잡았다.


아쉬움을 느끼는 그에게 다가온 릴리트가 마왕의 자리에 있으면 쌘 놈이 계속 덤벼올 것이라고 설득을 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정복했겠지.



'허무하다.'


마왕은 심심했다.


-찰싹!

자꾸만 가녀린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간질여오는 릴리트의 못된 손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하지 말거라. 교주와 교인은 아비와 자식같은 관계. 가족끼리는 정을 통하지 않는 법이다."

"히잉...... 저 교인 안할래요!"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죽고싶으냐?"

"살려주세요!"

"본좌는 자비롭다. 재입교를 환영하지."


천마신교는 마계에 뿌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