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신화를 잘 아는 장붕이들이라면 헤스티아(Vesta)라는 이름이 꽤나 익숙할 것이다


그렇다. 올림푸스 12주신 중 하나이자 화톳불을 담당하는 자애로운 가정의 여신이다.



"잉? 가정의 여신은 헤라가 아닌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둘이 다루는 영역은 꽤 다르다


헤라는 가정의 결속을 수호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불륜범들을 조지는 역할을 맡는다면


헤스티아는 가정 내부의 질서와 윤리를 담당하는 셈이다.


쉽게 말해 헤라는 가정 질서의 유지, 헤스티아는 가정 질서의 운행을 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헤스티아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희한할 정도로 비중이 적다


올림푸스 12주신은 각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존재하는데 비해, 헤스티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화로만 쳐다보는 수준


그나마 있는 게 포세이돈, 아레스, 아폴론이 동시에 구혼하니까 신들끼리 싸움날 까봐 비혼을 선언했다는 에피소드인데


이 정도면 비중 공기를 넘어 아예 소멸 수준이다



하지만 헤스티아를 동정하는 건 뒤로 미뤄두자. 우리는 여기서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헤스티아가 12주신 중 하나고 나름대로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럼 주요 에피소드가 없을 수가 없고, 이를 전승하는 그녀의 추종자들도 많이 있었어야 정상이다


신전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신에 대한 전승을 계속 만들고 널리널리 퍼뜨리는 것이 아니던가?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 하루아침에 그녀의 신전과 추종자들이 소멸한 게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음? 잠깐? 하루아침에 소멸?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구절인데."


맞다. 그리스 시절부터 이어진 유구한 떡밥이자, 아직까지도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전설의 국가




바로 아틀란티스(Atlantis)이다.


(물론 아틀란티스의 실재 여부는 당연히 입증이 안 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자고 한 것이니 양해 바람)


각설하고,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포세이돈이 지배하는 국가라고 설명했는데


사실 저렇게 큰 국가에서 포세이돈 하나만 섬겼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되고


아니면 포세이돈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겼는데, 이게 와전되서 포세이돈 신앙을 유지하는 국가였다고 알려진 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의외의 결론은 뭐다?


어쩌면 고대 헤스티아 신앙의 중심부는 바로 아틀란티스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할 것이 바로 헤스티아라는 여신이 지니는 고유한 특징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은 잔인하고 졸렬하기로 유명하다


그 치들과 엮여서 인생 망친 사람들만 세도 아마 몇 다스는 나올 것


그런데 헤스티아는 단 한 번도 인간을 벌하거나 책망한 적이 없다


물론 비중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애로움과 덕망이 헤스티아라는 여신의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헤스티아가 하필 화톳불을 담당하는 여신인 것도 그 탓이다


화톳불이 무엇인가? 바로 고대 가정의 중추이자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도 아궁이 불을 꺼뜨린 며느리는 바로 소박 맞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화톳불은 다른 불과는 성질이 사뭇 다르다 



불은 사납고 파괴적인 자연의 산물이지만, 화톳불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인간만의 불이다. 화톳불로 밥을 짓고, 땔감을 때고, 일을 하지 않던가?


즉, 헤스티아는 철저히 인간들의 수호자이고, 인간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어머니 여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헤스티아 입장에서는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고 마구 부리는 동생과 조카들이 영 아니꼽게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당장 티탄인 프로메테우스도 신들을 경멸해서 인간들을 돕다가 처벌을 받지 않았던가?



플라톤이 적은 바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의 멸망 원인은 바로 오만함이었다고 한다


마치 바벨탑 설화처럼 지나치게 발전한 나머지, 신들을 업신여기다가 포세이돈의 진노를 사 나라 전체가 수장을 당했다고 하는데


만약 아틀란티스가 헤스티아 신앙의 총본산이었다고 하면 꽤 재미있는 결론이 도출된다


어쩌면 아틀란티스는 신들의 미움을 산 영웅과 인간들이 정착할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였는지도 모른다


신들의 변덕에 휘말려 파멸하는 인간들을 안타깝게 여긴 헤스티아가 제공한 인간만의 국가였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와 헤스티아의 정신을 본받아 신에게 의지하지 않았고


오로지 '화톳불'만의 힘으로 신본주의를 거부하고 인본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다가


결국 이 '신성모독'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포세이돈에 의해 억울하게 멸망하고


제2의 아틀란티스가 나타나지 않도록 기존의 헤스티아 신앙도 기록말살형을 받아 깨끗이 지워진 게 아닐까?


그녀의 가르침은 "올림푸스 신들은 위대하다!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가 아닌


"헤스티아 가라사대, 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인간의 힘으로 일어서라! 너희는 할 수 있다!"였을 테니까



결론은 올림푸스 신들 개객긔이다......


헤스티아 눈나 헤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