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기구한 여인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트로이군 총사령관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그녀이다



테베의 공주였던 안드로마케는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결혼해 아들 아스티아닉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트로이 전쟁 당시 남편이 아킬레우스의 손에 전사하면서 순식간에 과부로 전락했고


심지어 트로이가 멸망한 후에는 그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필로스)의 첩이 되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전승에 따라서는 이 네오프톨레모스가 그녀의 아들 아스티아닉스를 끔찍하게 살해하기도 하니, 참으로 박복한 팔자가 아닐 수 없겠다


허나 우습게도 둘 사이의 금슬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헥토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안드로마케고, 죽을 때까지도 사별한 남편을 잊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10년의 결혼 생활동안 고작 아들 하나밖에 안 낳았는데 비해, 네오프톨레모스의 친자식은 무려 13명도 넘게 낳았다


실제로도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를 지극히 총애했다고 한다


같은 그리스군에게도 싸이코라 욕 먹을 정도로 잔인하고 난폭한 그였지만, 안드로마케에게는 늘 이상할만큼 스윗했으며


첫 아들 몰로소스를 낳은 안드로마케가 원수의 자식이라며 모유 수유를 거부하고 엉엉 울자, 화내거나 때리기는커녕 손수 그녀를 달래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도록 했고


전승에 따라서는 그녀의 아들 아스티아닉스를 죽이지 않고 몰래 탈출시킨 후 스스로 유아 살해범을 자처했다고 할 정도



사실 안드로마케를 이야기할 때 늘 따라오는 주제가 다름아닌 '오네쇼타' 떡밥이다


트로이 전쟁 기간과 네오프톨레모스의 나잇대를 계산했을 때, 둘 사이의 나이 차이는 무려 20살가량이 났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


물론 신화이므로 나이 차를 진지하게 계산 안 하는 경우도 많지만, 어쨌든 후덜덜한 건 사실이다


이쯤 되면 안드로마케도 젊음을 유지하는 마법의 장신구 하나 정도는 있지 않았나 합리적 의심이 갈 지경


20살 차이 나는 10대 쇼타가 한평생 자기 하나만 바라보고 살게 만든 마성의 여인 ㄷㄷ



하지만 안드로마케와 네오프톨레모스의 관계를 그저 오네쇼타 순애의 일환으로만 해석하는 게 맞을까?


네오프톨레모스가 밀프 취향이어서 안드로마케에게 푹 빠진 걸 수도 있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한평생 그녀만 바라보면서 13남녀를 득할 정도로 순애보를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네오프톨레모스가 너무 안드로마케만 편애한 나머지, 본처였던 헤르미오네의 분노를 사 암살 당했다는 전승도 존재할 지경이니까(또 과부 된 안드로마케만 안습한 전승)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마음을 이리도 단단히 사로잡은 것일까?



응? 그런데 무언가 익숙한 패턴 아닌가?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를 연상시키는 관계를 우린 하나 알고 있다


상당한 나이 차이 + 잔인하고 난폭한 망나니 왕 + 그러나 평생토록 한 여자만 바라본 순애보


한국사에도 유사한 사례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다름아닌 연산군장녹수의 관계가 이러했던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환경 속에서 자란 연산군은 심각한 마더 콤플렉스를 앓고 있었고


이 빈틈을 파고 든 장녹수가 연산군의 마더 콤플렉스를 채워주며 그의 여인으로 군림했다는 썰


야사이기는 하지만, 장녹수는 사석에서 연산군을 "너"라고 부르며 마치 엄마가 아이를 대하듯 그를 어르고 달래는 행동을 자주 했고


그러면 그럴 수록 연산군은 장녹수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오프톨레모스의 성장 환경을 한번 살펴보자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와 스키로스의 공주 데이다메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얼굴도 채 보기 전에 아버지는 트로이 전쟁을 하러 아내의 곁을 떠났고, 그는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며 부친을 천하제일의 영웅으로 숭상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존감이 독으로 작용해 그를 잔인하고 제멋대로인 아이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


만약 엄마라도 아이가 엇나갈 조짐을 보일 때 옆에서 바로잡아줬다면 그런 꼬마 사이코가 탄생할 일은 없었겠지만


전승에 따르면 데이다메이아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아직 어릴 때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부모 모두가 부재한 상황에서, 오직 아버지의 그림자만을 좇으며 영웅 놀이나 하는 살인마로 각성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트로이에서 벌인 잔혹한 살육극은 같은 그리스 병사들조차 혀를 내두르며 치를 떨게 했다고 하니......



그러나 상술했듯 안드로마케를 아내로 들인 후, 네오프톨레모스는 이상할 정도로 변화한 모습을 보인다


프리아모스 왕을 웃으면서 회 쳐버리고, 공포에 질린 트로이 왕자를 난도질하며 즐거워 했던 싸이코답지 않은 스윗한 행동만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그의 곁을 떠난 어머니의 역할을 함께 해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 무엇인가?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고, 그러면서도 따끔하게 야단치며 사회화를 돕는 것이다


정숙한 어머니였던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마더 콤플렉스를 꿰뚫어 보았고, 이를 정확히 공략해 그의 마음을 따냈을 터이다


실제로 안드로마케와 네오프톨레모스의 나이차는 거의 어머니와 아들 뻘이 아니던가?


몸만 자란 잔악무도한 어린아이를 보듬고 품어, 비로소 제대로 된 청년으로 바꿔 준 게 바로 안드로마케였고


그래서 네오프톨레모스도 그 누구보다 안드로마케를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순애보만 찍은 게 아닐까?


오직 강인한 남성성만을 좇던 공허한 내면에 진정 필요했던 모성애를 채워준,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애틋한 여자였으니까



물론 이것도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드시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만


그래도 상황을 끼워 맞추다 보면 제법 그럴 듯한 가설인 것은 사실이다


이래서 내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끊을 수가 없는 거다. 모든 설화가 다 짜릿하고 새롭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