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첫 번째, 불러낼 수 있는 캐릭터는 유명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다. 그냥 단편 만화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돌기만 해도 충족될 만큼 기준이 낮으니까.

기껏해야 원하는 캐릭터를 당장 급조해서 불러내는 걸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지턱이라고 해야 하나.


조건 두 번째, 캐릭터를 불러내는 사람은 능력 사용에 익숙해야만 한다.

인간이 상상한 것들이 다수에게 인지되면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 세계. 달리 말하면 유명한 창작물의 주인은 곧 한 세계관의 주인이 되는 세계.

게임 개발자가 됐든, 만화가가 됐든, 작곡가나 유튜버가 됐든, 능력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세계관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상상을 실체화할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캐릭터를 불러낸다는 것은 사실상 생명을 원하는 형태로 창조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인지, 웬만한 숙련자도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어렵다.


마지막, 조건 세 번째.

자신이 만든 작품 중에서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진 것이 있어야만 한다.


'뭐야, 중요한 것처럼 써놨으면서 당연한 내용밖에 없잖아.'


조건이 적힌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방 한복판에 날려보냈다. 저런 내용은 나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 마지막 조건의 진짜 뜻은 눈치챘다.

캐릭터를 불러낼 때 결과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애정이 깊은 작품 내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알아서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지금까지 썼던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뭐야?' 라는 질문을 들어도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뭐라도 나오면 도움이 되겠지.'


맨날 판타지만 써서 뭐가 나오든 강한 캐릭터가 나올 것이다.

엑스트라 중엔 무능력자가 있긴 하겠지만 애정이 없고, 주역들은 적어도 하나쯤은 도움이 될 법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주역 중에서도 되도록이면 나와줬으면 하는 캐릭터도 있긴 하지만, 일단 소환이 성공만 한다면 대체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펄럭.


최소한의 구색을 갖춰두면서 문득 최악의 경우가 하나 떠올랐다.

불러냈을 때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주역 캐릭터 중에서 되도록이면 안 나왔으면 하는 캐릭터가 한 명 있다. 있으면 당연히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녀석.

만화에선 갑자기 이런 게 떠오르면 꼭 실제로 벌어지던데.



***



"결국 예상한 대로 내가 나왔다?"

"예상 안 했어."


잠시 후,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질문하는 여자아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그래. 저 녀석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내가 불러낸 캐릭터였다.

동시에, 제발 다시 얼굴을 보지 않길 바랐던 캐릭터이기도 하고.


"⋯그 정도면 내가 나와주길 빈 거나 다름없지. 우리가 원한 일이 생각대로 될 리가 없잖아."

"아니, 나 요새 무슨 일이든 생각한 대로 잘 흘러갔었어. 그런 말 하지마."

"그럼 나랑 엮인 일만 잘 안 풀렸다는 뜻이네."

"그래."

"나랑 얘기하기 싫구나."


울적한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소녀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조금 전과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니지. 표정은 조금 전부터 이미 어두워서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사실 소녀도 아니다. 나이도 그렇고, 키도 20대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설정해두었으니까.


"있지."


⋯소녀가 말했다.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다른 걸 데려올 수는 없어. 그러니까 아까워서라도 날 쓰긴 해야 하지 않을까."

"⋯."

"⋯아냐,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싫은 건 굳이 안 해도 돼."


소녀의 행동거지는 전적으로 그녀를 불러낸 나와 동일했다.

막 불려왔으면서도 쿠션을 껴안고 있는 저 손, 허리에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취하는 앉는 자세, 토시를 대신해 과하게 소매가 긴 옷으로 가린 손목, 다크서클로 어두워보이는 인상.

정확히는, '과거의' 나와 동일했다.

저 히키코모리 오타쿠가 머릿속 망상으로 떠올릴 법한 인상의 음침한 소녀는 자기투영이 과하게 들어간 작품이었다.


"하아⋯."


과거의 내가 자기투영으로 만들어낸 성격이다 보니 지금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뻔히 짐작이 간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 말버릇 좀 고쳐."

"응?"

"솔직히 진짜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걱정을 했겠냐.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걱정했지."

"⋯그렇지."

"그리고, 내가 널 보기 싫어한 이유도 알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똑같으니까 짐작도 가겠네."


소녀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곧 입꼬리를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짓는 미소였다.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는 내지 말고."

"옛날 성격이나 버릇이 다 섞인 캐릭터라서, 떠올리기만 해도 흑역사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속이 뒤집히니까."

"생각만 하라고."

"흐흐."


소녀가 웃었다.

그녀가 캐릭터로서 창조된 것은 대략 3년 전이니, 원본과 자신의 주된 차이점은 '성별'과 '3년의 시간 동안 변한 성격'.

분명 크다면 큰 차이인데도 원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고 있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 하는 생각이 똑같은 타인 같은 거네."


원본이 이젠 어느정도 받아들였는지 똑바로 두 눈을 바라보며 답해주었다.


"타인도 아니지. 차이점이 없진 않겠지만 성향 같은 건 대체로 똑같을 테니까."

"결국 3년이 지나도 나랑 똑같다는 거네?"

"그냥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 것뿐이야. 설정만 따지면 우린 부모님도 달라!"

"흐으음⋯."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차이점이 크진 않을 것 같은데.

물론 원본의 TS판이라고 부를 만큼 단순한 캐릭터는 아니다.

태생도 다르다. 성별도 다르다. 나이도 다르고 겪어온 것도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원본의 성격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지금 원본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당황할지 알 것 같을 정도로 말이다.


"있지, 결국 여전히 나같은 캐릭터가 취향인가 봐?"

"⋯뭐라고?"

"그렇잖아. 분명 가장 애정이 있는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건데, 내가 만들어졌다는 건 아직도-"


소녀가 팔을 가볍게 흔들어 한참 남는 소매를 팔랑거렸다.


"이런 거 좋아한다. 이거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이상하다."


안고 있던 쿠션을 더욱 꽉 끌어안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원본의 앞에 섰다.

원본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진다. 흑역사가 살아움직이니까 부끄러우면서도 보기는 좋아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아닐 수가 없겠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밖에 없는 관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