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하가 다 붉은빛, 붉은빛, 그리고 또 붉은빛이다. 감히 내 눈으로 쳐다볼 수조차 없는 웅대한 하늘 꼭대기까지 모두 붉은 노을이 집어삼켰다. 손을 뻗어도 다 가릴 수 없는 광대한 광야 전체가 다 붉은 피로 젖었다.


아아, 하며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왼쪽 무릎만을 땅에 격하게 부딪히며 주저앉았다. 내 앞에 쓰러진 수많은 시체들이 마치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과수원처럼 느껴졌다.


땅바닥에서 나뒹구는 시체들에 신겨진 신발은 모두 고구려군의 것이었으며, 분질러진 깃대들에 매달린 깃발들은 모두 삼족오 깃발이었다. 동방 최강의 기동력을 자랑하던 개마기병들이 그 견고한 무쇠갑주를 두른 채로 흙바닥에 끝도 없이 깔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르짖었다.


“하늘이시여!”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땀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끊임없이 뇌리 한가운데로 쳐들어오는 그 경기병 발굽소리가, 머리를 관통한 화살처럼 꽂힌 채 머물렀다.


머리를 움켜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주필산 벌판 온 사방에 널브러진 고구려군의 시체를 먹기 위해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피폐해진 눈을 깜박이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막 일어나려다가 다리가 섬찟하여 고개를 숙인다. 오른다리 한쪽이 날아가고 없었다. 그래서 왼쪽 무릎만 땅에 내려찍었던 것이다.


어버버거리며 팔을 뻗어 한 움큼 나아간다. 돌아보니 등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내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다. 고개를 흔들어 쫒아내고는 계속해서 기어간다.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진 시체들의 광야 한가운데에서 나는 내 형을 찾았다. 형이었던 그 살덩어리는 반쪽은 이쪽에 있고 또 반쪽은 저쪽에 있었는데 이쪽이 좀 더 컸다.


“형... 혀어어엉...”


그걸 움켜잡고 눈물을 쏟아냈다.


형의 아래쪽에는 안장인지 말다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이 엉키다시피 매달려 있었고 갈비뼈 사이에 당군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도저히 더 쳐다볼 수가 없어 형을 밀쳐내고 다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기 시작했다.


저편에서 뭔가가 우르르 달려왔다. 그게 당나라 경기병인지 고구려 개마기병인지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반응하지 못하고 헐떡이면서 주저앉았다.


다행히 붉은 기를 휘날리는 그것들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고구려군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코앞까지 이르자 말객(고구려의 장교 계급)으로 보이는 자가 급히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했다.


그러자 바로 다른 기병에서 몇 사람이 내려 나를 들쳐 업고 다리에 부목을 댔다. 없어진 부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일단 잘려나간 부분만이라도 엉켜 묶어서 부축했다.


그 다음 나를 번쩍 들어 말 뒤에 싣다시피 태우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우린 건안성 개마기병이오. 주필산에서 살아있는 자들을 수습해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소.”


내가 크게 한번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건안성이면... 건안성이면 여기서 멀지 않소이까?”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릴 거요. 조금만 참으시오.”


하루하고도 반나절. 절대로 그 기간 동안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등을 붙잡으면서 애걸했다.


“나를, 나를 안시성으로 보내 주시오. 안시성은 가깝지 않소?”


“이보시오! 이미 안시성은 당군에게 포위되었소!”


말객이 차갑게 대답했다.


“만약 접근하면 바로 잡혀 죽을 것이오! 잔말 말고 건안성으로 갑시다!”


다리의 잘려나간 부분 – 다시 보았는데 잘려나간 게 아니고 반쯤 뭉개져서 덜렁거리다가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 이 계속해서 아팠다. 내가 소리쳤다.


“난, 난 더 이상은 못 가겠소. 하루 반나절 동안 못 달리오. 그냥... 그냥 날 내려놓고 가시오. 미안하오. 주필산에 살아남은 다른 자들을 데려가시오.”


“반드시 단 한 명이라도 살려서 데려오라는 성주님 명령이오. 죽어도 가다가 죽으시오.”


말객이 더 속도를 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안장 뒤의 끈을 꽉 붙잡았다.



+ + +



일단 죽진 않았다. 천만다행히도 하루 반나절을 버텨냈고, 건안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건안성은 큰 성이었다. 내가 끌려들어와 들것 위에 놓이자, 곧바로 의원들이 달려와 다리의 잘려나간 부분을 확인하고 약초가루를 쳤다. 내가 끄윽거리면서 말했다.


“날, 날 왜 살려오라고 하셨답니까?”


그러자 말객이 대답했다.


“성주께서는 적들의 규모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소. 고구려군이 입은 피해도. 그리고 당군이 어찌 싸웠는지도 모르시오.”


“당군은...”


내가 헐떡이면서 입을 열려는데 말객이 지시했다.


“곧 성주님이 나오실 거요. 일단 의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내가 소리쳤다.


“당군은 오십만이오! 곧 신성과 건안성에도 들이닥칠 것이오!”


“그래그래, 알겠소! 어서 의방으로 들어가서 치료를 받으시오! 성주님이 오시면 이야기를 듣겠소!”


“아니, 그럴 것 없다.”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자 건안성 백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말객도 투구를 벗고 경례하면서 말했다.


“성주님, 오셨습니까.”


천천히 건안성의 성주 된다는 자가 다가오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 당군이 오십만이라 했느냐?”


성주는 젊었다. 수염도 별로 없었고, 장수보다는 단아한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사십오만, 많으면 오십삼만도 될 것이옵니다.”


“오십만이라...”


성주가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주필산에서 우리 쪽은 몇 명이었느냐, 상세한 정보를 아느냐?”


“구체적인 수효는 모릅니다만 16만 3천 명 이상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이제까지 하나의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으로서는 가장 많은 전투였다. 무려 16만 3천 명. 하지만 당군을 막지 못했다. 이제 당군을 칠 군사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쪽의 피해는 얼마나 되느냐?”


우리 쪽 피해... 그걸 내가 다 세고 있었을 수는 없다. 아마 이 성주라는 사람도 내가 구체적인 수효를 기억하는 것을 기대하진 않을 거다. 내가 헐떡이면서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좌익... 적어도 좌익은 완전히 전멸했고, 백산말갈에서 징발한 기병 5천은 200여 기만 살아 돌아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갈기병이 전멸을 했다?”


“아닙니다. 속말말갈에서 징발한 기병 1천 기의 생사는 저도 모릅니다만 살아 돌아갔을 것입니다.”


“우익 쪽은?”


“제가 우익에 있지 않아서 정확히 모릅니다.”


성주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골치 아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적어도 3만에서 4만은 죽었겠군.”


말객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전장을 다녀왔건대, 개울이 피로 물들었고 뼈와 창검이 밀림을 이뤘습니다. 4만 이상이라고 보셔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구원은 없다.”


성주가 말했다.


“연개소문 대막리지는 주필산에 고구려의 군대를 모조리 털어넣었다. 평양성을 지킬 군대라도 남아 있을지 불확실하다.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성의 병력은?”


“2만 정도 됩니다. 백성까지 합하면 5만은 넘을 것입니다.”


“신성으로는 아마 이번 주필산의 패잔병들이 들어갔을 것이니 전투병만 해도 10만에 육박할 것이다. 그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안시성인데.”


성주가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자신을 구하러 오던 16만 대군이 일거에 쓸려나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 + +



그날 밤, 성주가 나의 침소를 들렀다. 그가 내 앞에 앉으면서 말했다.


“다리는 괜찮은가?”


“괜... 괜찮습니다.”


“거짓부렁 하지 말게. 괜찮을 다리도 안 남았으면서!”


성주가 쏘아붙이고 날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안시성이 버티리라고 보는가?”


“예?”


“당군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분명 당군은 안시성을 뚫고 평양성으로 진격하려 할 것이네. 자네가 본 당군의 위세를 안시성이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잠시 생각했다. 안시성은 작은 성이다. 건안성과는 비교할 바도 못 된다. 사실 성이라기보다는 산 위에 지어 놓은 임시 기지 같은 것이다.


병력이라고는 6천도 채 안 되고, 백성을 다 합해도 1만 5천은 될까 의문이다. 그곳을 당군 오십만 대군이 덮친다. 아마 사람의 바다 속에 빠져 죽을 것이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성주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아버지의 정적이었네.”


“예?”


“연개소문이 난을 일으켜 영류왕을 치고 정권을 잡았을 때, 모든 성이 다 그에게 굴복했네. 그에겐 16만 대군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안시성만은 달랐어. 연개소문을 반역자, 찬탈자라고 비난하며 정권에 복종하기를 거부했지.”


성주가 앉아서 허리를 숙인 채 깍지를 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쓸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 건안성, 신성, 고구려 최대의 성 요동성까지 모두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아 안시성을 응징하고자 출병했네. 무려 7만 7천의 군대가 고작 6천 명짜리 성을 포위하고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싸웠네. 그런데 양만춘은 모조리 물리쳐버렸어.”


성주의 눈에는 존경심, 증오, 공포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가 날 보면서 살짝 웃었다.


“이것이 나의 바램일지, 아니면 예측일지는 모르겠으나, 난 양만춘이 버티리라고 보네. 오십만. 결코 적은 수는 아니지만 이기지 못할 것도 아니지. 옛 월나라 왕 구천은 고작 5천의 병력으로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그가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우리 건안성이 자랑하는 개마기병들을 내보내 당군의 보급로를 칠 것이다. 그러면 절대로 당군은 전쟁을 오래 끌지 못한다.”


“소용없을 것입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당군은 보급을 상인에게 위탁해 버렸습니다. 보급로는 정규병보다 더 무시무시한 둔황 용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석궁을 사용합니다. 주필산에서는 그들이 개마기병의 갑주도 뚫었습니다.”


성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더 이상 절망적인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누우면서 말했다.


“고구려는 결국 고구려 도호부가 되어 당의 일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당군은 강합니다. 정말, 정말로 강합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네 이놈!”


성주가 호통쳤다.


“고작 전투에서 한 번 패했다고 그리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더냐!”


대답할 힘도 없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 + +



꿈을 꾸었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죽은 줄 알았다. 그리고 주변을 크게 훑어보았는데, 무수한 공성병기가 숲처럼 늘어섰고 헤아릴 수 없는 수효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저, 저것은 당군이다! 크게 놀라 그만 떨어질 뻔했지만 이내 정신줄을 잡고 천천히 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편에, 아주 작은, 게딱지만 한 마을이 보였다. 마을은 산 위에 있었고 마을을 둘러 흙과 돌을 섞어 대충 쌓은 성벽이 있었다. 저건 성이 아니고 그냥 모래 둔덕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최강 당나라 군대와 저 작은 성이 격돌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된 갑옷도 없어 솜옷을 받쳐 입은 장수 한 명이 성벽에서 그나마 제일 높은 곳에 서서 소리쳤다.


“개미떼같이 득시글득시글하게도 몰려왔구나!”


그러자 당군 맨 앞에 선 황금갑주를 입은 당 태종이 검을 뽑으면서 외쳤다.


“이따위 게딱지만 한 성에서 우리 공격을 막아낼 쏘냐! 쳐라!”


황빛의 거대한 물결이 그 작은 산 위 모래둔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래둔덕 위의 애처로울 정도로 적은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안시성은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나도 고구려인이다. 내 민족, 내 겨례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전투는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다.


안시성은 반드시 패배하고야 말 것이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편

ㄴ 삼국사기,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패하여 병력을 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