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저번 용사파티가 토사구팽 당하고 나 또한 파티원들과 같이 잠든지 어언 124년 3개월 2일 하고도 21시간 02분 02초.. 03초.

나는 초절전 모드에 들어간 내 시스템에 누군가 전원을 공급하는것을 느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손가락.

내가 눈을 떳음에도 움직이지 않자 그 손가락은 의문스럽다는 듯 내 외부 관측 장치를 톡톡 두드렸다.


일부러 움직이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재부팅되면서 그와 같이 잠시 동력기관을 재정비 하고 있었을 뿐.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자 손가락의 주인은 몇번 더 내 외부 관측 기관을 두드려 보더니 이내 나즈막히 말했다.


"역시 너무 오래되서 고장난건가? 하긴 100년은 더 된 고물이 움직일리 없지."


근데 말을 참 이쁘게 하네.

나는 순간 발끈하는 기분을 느끼며 외부 발성 기관에 동력을 가장 먼저 활성화 시켰다.


100년은 더 먼지만 먹던 발성 기관이 100년만에 제대로 된 동력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 기름을 칠한 기계처럼 처음엔 치지직 거리는 소리만 내던 발성 기관은 이내 점점 활성화 되었고 이내 나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데에 성공했다.


"고물 아니에요."


"오 말했다."


그런 내 말에 손가락은 놀랍다는듯 반응했다.

어이없는 손가락이군.


그런데 보통 누군가를 깨울때 눈 양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가?

나는 양쪽에 손가락으로 인해 완전히 막혀버린 외부 관측 기관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다. 통계학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인물은 그런 대부분의 사람이 아닌듯 싶었다.


역시 통계학은 믿을게 못된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나는 이내 외부 동력 기관을 활성화 하며 일어섰다.


"오 일어났다."


그제야 손가락이 시야에서 치워지고 나는 드디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오 둘러본다."


주변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무너진 왕성의 둥근 지붕이 보였고 먼지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적어도 사람이 살지 않은지 꽤 된것 같았다.

통계에 따르면 약 13년 정도 말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몇번 움직여 보았다.


"오 움직인다."


다행히 외부 동력 기관에는 문제가 없는것 같았고, 아직까진 전부 잘 작동하는것 같았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아까부터 내가 무슨 행동을 할때 감탄사를 연발하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청색의 머리칼에 보라색의 눈.

꽤나 우주적인 색감을 가진 소녀는 10대 후반정도 되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입을 떼었다.


"오"


"오 눈 마주쳤다. 라고 하실 생각이라면 하지 마세요."


"···돌아봤다."


그런 소녀에 말에 내가 이마를 탁 쳤다.

통계학 속 소녀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통계학은 믿을게 못 된다.

아니면 혹시 요즘 소녀들은 다 이런것일까?


어림잡아 100년이나 지나버렸으니 이 또한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내가 이마를 탁 치며 그런 생각이나 하고있자 눈앞의 소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말해왔다.


"마왕이 부활했어. 마왕군이 돌아왔고."


"···네?"


분명 사고회로가 멈춘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러니까.. 마왕과 마왕군이 부활했다고?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존댓말 코드를 비 활성화 하는것을 고심하며 소녀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마왕과 마왕군이 부활했다는 말이세요?"


"정확해. 역시 로봇이라 그런지 똑똑하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직접.. 하아.. 이런 의미없는 말을 계속할 필요도 없겠네요. 아무튼 그건 불가능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마왕이 부활했다고?


웃기는 소리.

내가 직접 용사와 함께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는데 그럴리가 없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소녀는 내게 말했다.


"정 못믿겠으면 3분만 기다려봐. 쫌 있으면 쫓아 올테니까."


"·····."


한번만 속아준다는 생각으로 정확히 3분 54초쯤 기다리자 저 멀리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더럽고 불결한.. 악마의 기운.


소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게 되자 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이 먼저 떠올랐지만 지금 당장은 그 의문을 해결하기 힘들성 싶었다.


예측하기론 저 마왕군 소속의 악마들이 지금 이 위치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내외.

나는 검을 꺼내기 시작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신의 위상을 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고한다. 안내받은 길은 쉼터, 비록 가는 길은 곤비하니 신을 앙망하는 나는 쓰러지지 않음이요 더욱이 확신하리라."


그와 동시에 신성력이 몰아치며 내 기체를 감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이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속의 수억의 복제 자아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신이 내 부름에 답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수억의 복제 자아들의 신앙을 받아야 할 신들이 초절전 모드와 함께 모든 복제 자아들이 비 활성화된 덕에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혀를 쯧 찼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새로운 신을 만들면 다시 그 정도 수준에 신을 만들어 내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비 활성화된 복제자아들을 하나하나 재가동 시키며 말했다.


"신은 존재하기에 믿는가, 믿기에 존재하는가."


컴퓨터가 부팅되듯 갈곳없는 신앙심들이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신은 믿기에 존재한다. 실존 증거가 없기에 존재한다."


나는 그런 갈곳 없는 신앙심을 서서히 유도하기 시작했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전지하고 전능하며 지선한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신앙심이 비대해져 커져가고 그 신앙심을 가질 신을 만드는 작업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주사위 그 자체가 신이며, 신은 확률론적으로 존재한다. 그는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지선하지도 않으나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100에 수렴한다."


이내 신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수억에 달하는 내 복제 자아는 그런 신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는 신에게 바란다. 내가 믿음으로써 관측된 신은 내가 믿지 않음으로써 무로 돌아가니, 신의 위상은 나를 쉬게해주는 쉼터요, 나는 그대의 영원한 양일지어다."


그렇게 수억의 신도를 가진 새로운 신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지선하지도 않으나 그럴 확률이 100에 수렴하는 신이 말이다.


이름은..나중에 지어주어야겠다.

눈앞에서 악마 한마리가 내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우둔하고 멍청한 한마리 짐승아. 황새 쫓는 뱁새조차 그 주제를 알지언데 너는 어찌하여 주제조차 모르느냐. 너는 주제를 모르기에 어린 넝쿨이 너의 발목을 잡을것이며 신을 믿지 못하기에 아귀가 너를 씹어 삼키리라."


그런 내 말이 끝나자 나를 향해 덮쳐오던 악마의 몸에서 넝쿨이 자라나 제 자신을 속박했고, 당황하며 몸부림 치는 악마의 아래로 땅이 들썩거리더니 이내 커다란 입이 튀어나와 악마를 집어삼켰다.


과거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곧잘 써먹었던 기도가 이 자리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그때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악마들을 속박하고 집어 삼킬 수 있었지만 이제 막 태어난 신격으론 한번에 한명씩이 전부였다.


나는 한꺼번에 세명이서 몰려오는 악마들의 공격을 피하며 힐끗 아까 소녀의 신형을 쫓았다.

혹시나 당하고 있을까 싶어 살펴본 것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듯 싶었다.


1초당 10마리씩은 썰어재끼고 있는 모습에 나는 내 앞의 악마들이나 신경쓰자고 생각하며 다시 기도를 외웠다.


"너, 우둔하고 멍청한..."


***


이내 모든 악마가 정리되고, 상황이 일단락 되자 아까의 소녀는 피의 절은 모습으로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 나는 소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수도 되면서 왜 엄살이야."


"방수가 되는것과 별개로 몸에 피가 묻는건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이죠."


그런 내 말에 소녀도 반박할 수 없었는지 침묵했고, 이내 검집에서 칼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계속할건가요?"


"뭘?"


"용사놀이 말이에요."


"·····놀이가 아니야."


놀이라고 표현한 내 말에 소녀는 약간 기분이 나쁘다는듯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내 말은 틀린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용사가 아니에요."


"용사가 없으니 나라도 세상을 구해야지."


"당신이 세상을 구하지 못 할 확률은 87.34%에요."


"니가 도와주면 더 높아질거야."


"제가 도와드릴것 같나요?"


"응."


거참, 로봇 한번 제대로 찾으셨네.

존재자체가 마왕의 척살을 목표로 만들어진 내가 마왕을 조지지 않는다면 무슨일을 하겠는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내 검을 다 닦았는지 다시 허리춤의 검집에 검을 다시 넣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 밀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을 생각을 안하고 올려다 보기만 하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말했다.


"빨리 잡아요 손 떨어지겠네."


"····아까는 피 묻는거 싫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것도 이거고 이것도 그거야."


나는 소녀의 그런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표절인건 알죠?"


"·····어쩌라고."


"이름이 뭐에요?"


"아일렌."


아일렌.. 아일렌이라.

좋은 이름이다.


용사가 되기에도 나쁘지 않은 이름이리라.


"좋아요 아일렌. 제가 당신을 용사로 만들어 드릴게요."


"난 용사가 아니야."


"그런가요?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아일렌이면 충분해."


아일렌.. 아일렌이면 충분하긴 하지만 역시 형용사 하나가 필요하다.

'용사' 라던가 '현자' 같이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구원자는 어때요? 구원자 아일렌."


그런 내 말에 아일렌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씹덕같아."


"좋네요. 구원자 아일렌."


"씹덕같다고."


"좋아요 당신을 구원자로 만들어 드리죠."


"아니 미친년이?"


그렇게 나는 한 소녀가 세상을 구하는 여정에 동참했다.

이 결정이 나중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