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은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꼴림보다는 역겹고 혐오스럽고 토악질이 나온다. 

작가의 필력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프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보기엔 꽤나 글을 가독성있게 잘 쓰는 편이다. 

흉악범의 인권을 빼앗고 실험체로 쓰는 것도 기분은 조금 나쁘지만 볼만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하게 흉악범들이 갇히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인권을 빼앗기고 온갖 성고문을 비롯한 인권유린행위들을 당하는 주인공이 너무 비참하고 안타깝게 느껴져 숨쉬기가 힘들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왜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이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프게 다가왔다.

 가슴이 조금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랑 상관없는 가상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건 너무 아팠다. 

슬펐다. 그리고 세상이 나의 적이 되어 저런식으로 나나 혹은 다른 개인을 저렇게 몰아넣는다면 그 개인은 어떤 저항할 수단도 없이 저런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에 더욱 절망했고, 실험체라고 불리는 인간들은 전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교도관들의 태도에 절망했다.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미국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서도 관리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범죄자 역할의 학생들을 점점 인간으로 보지 않고, 단지 말하는 가축으로 봤던 사건들을 알고 있기에 절망감이 더욱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들도 망설였을 것이다.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하지만 점점 지치고, 동료 혹은 상사들에게 위로라고 듣는 말이 저들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말에 점점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괴물이 되었다.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고, 지친다고 해서 버렸던 것들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절대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단순히 가상의 하드한 피폐물 야설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개나 줘버린 개같은 소설 속의 세계관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일들을 현실 역사에서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단지 아무 이유도 없이 죄를 뒤집어쓰고 고통받다 죽은 이들의 사례를 역사를 공부하면서 많이 봤고, 그들의 모습이 김미희 양에게 투영되어 보여서 


그래서 그저 너무 슬프고, 아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