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당시 주력 조선 갑옷 찰갑옷,두정갑옷.
※ <난중일기> 3월 6일 ※
맑다. 아침 먹은 뒤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칼, 갑옷, 투구, 전통, 환도 등도 깨지고 헐어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으므로 아전과 궁장(활 만드는 기술자), 감고(검열관)들을 처벌하다.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 晴. 朝食後出坐. 軍器點閱 弓甲兜鍪桶兒還刀 則多有破毁之物 不成樣者甚多 色吏弓匠監考等論罪.>
병선의 승무원은 17명이며 이 중 격군은 12명이며,사후선은 5명 승무원 전원이 격군이다.판옥선은 총원 130~200명 중 대선의 격군은 100여명이다.판옥선은 격군의 수가 가장 작은배는 80여명인 경우도 있다.(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의 인용)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각 진과 보에 약 47~69벌의 철갑과 20벌의 피갑을 보유했다고 할 시,판옥선의 승무원은 대략 130~200여명인데.격군이 작은배일시 80여명이며 큰 배는 120여명인데,그럼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갑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수영을 하는 영상도 있는데 갑옷을 입으면 물에 빠졌을시 무게때문에 무조건 빠져 죽는다는건 기가막힐 뿐이다.https://youtu.be/TLcT5J7yg9k https://youtu.be/bwd2ZEav2vE
왜란이후 50년이 지난 회의에서 나온 말과 실제 왜란에서 싸우고 기록으로 남기고 그 기록이 가장 신뢰도있는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니 비교가 불가능하다.
1줄요약
가장 확실한 사료인 이순신장군 난중일기와
여러 사료를 종합적으로 교차 검증했을시 갑옷 다 챙겨입은게 수군임.
그리고 그걸 고증한다는 K-드라마 수준
제작비 어쩌구 하기전에 적군인 왜군 갑옷은 다 잘 입혀논거 보면 제작비 문제도 아님 그냥 역사왜곡임.
일본갑옷은 버블때 만들어서 빌려오는거기때문에 싸다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면 용의눈물이나 정도전에서 갑옷 고증을 잘 만들고 잘 하였는데 이 갑옷들 두고 저 지랄한거다.
그리고 수군영에 배속된 병졸은 다 수군이기에 굳이 저렇게 적어놓고 입고다닐 이유가 없음.
이걸 반박한다는 글 보면
비변사등록 1650년에 작성된걸 가져다가 이순신장군때도 수군이 갑옷 입지않았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비변사등록 임진왜란 직전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이 직접 왜란전에 각 진 순시하면서 갑옷들 점검한거 적어놔서 바로 반박됨.
그리고 진짜 안 입었으면 명나라나 일본 기록에 그게 적혀있어야하는데 정작 일본측 기록인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보면 다 갑옷입었다고 적혀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