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당시 주력 조선 갑옷 찰갑옷,두정갑옷.


※ <난중일기> 3월 6일 ※


맑다. 아침 먹은 뒤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칼, 갑옷, 투구, 전통, 환도 등도 깨지고 헐어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으므로 아전과 궁장(활 만드는 기술자), 감고(검열관)들을 처벌하다.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 晴. 朝食後出坐. 軍器點閱 弓甲兜鍪桶兒還刀 則多有破毁之物 不成樣者甚多 色吏弓匠監考等論罪.>


 
(임진왜란 1달전 난중일기 기록)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선교사 포르 사제 루이스 프로스의 일본사서도 "(조의) 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 착용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떤 것 강철 되어 있었고 밖에는 무쇠로 되어 다. 그들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매우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라고 나와 다.
 
 
임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수졸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전선 1척과 사후선 1척을 운영했을 당시에 작성된 함평현 읍지에서 <수군기물 목록>에는 함평현이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했다고 적혀 있다. <영암읍지> 진보鎭堡 편에는 당시 영암현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진진과 어란진에 각각 철갑과 철 투구 47벌씩 비치돼 있다고 기록됐다. 어란만호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하고, 이진만호진은 여기에 방선 1척이 더해졌는데도 철갑과 투구 보유량은 함평현보다 오히려 더 적다. 그런데 어란진은 피갑주皮甲, 즉 가죽찰갑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20벌을 추가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진도군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했는데 철갑과 철 투구 69벌에 종이로 만든 엄두, 엄심갑 각 4벌을 보유했다.

병선의 승무원은 17명이며 이 중 격군은 12명이며,사후선은 5명 승무원 전원이 격군이다.판옥선은 총원 130~200명 중 대선의 격군은 100여명이다.판옥선은 격군의 수가 가장 작은배는 80여명인 경우도 있다.(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의 인용)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각 진과 보에 약 47~69벌의 철갑과 20벌의 피갑을 보유했다고 할 시,판옥선의 승무원은 대략 130~200여명인데.격군이 작은배일시 80여명이며 큰 배는 120여명인데,그럼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갑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군은 갑옷을 입었음이 난중일기를 비롯 여러 사료에서 교차검증된다. 더욱이 갑옷을 입고도 활동이 무리없이 가능한것은 판금갑옷이라도 가능한데 무겁다고 활동이 힘들다고 전투에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당장 왜란시기 왜병들은 갑옷을 그럼 왜 입었는지 설명이 안된다.  
 
또한 수군이기에 물에 빠져 죽을수 있기에 갑옷을 안 입었을수도 있다고 누가 적었지만.갑옷을 입던 안 입던 전투에서 어차피 물에 빠지면 죽을수도 있다면 갑옷을 입는게 더 안전하다는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수영을 하는 영상도 있는데 갑옷을 입으면 물에 빠졌을시 무게때문에 무조건 빠져 죽는다는건 기가막힐 뿐이다.https://youtu.be/TLcT5J7yg9k   https://youtu.be/bwd2ZEav2vE
 덧붙이자면 간혹 교육받지 못한 모자란것들이 1650년에 적힌 비변사등록을 운운하며  이순신장군때에도 수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고 말하면서 반박하지만. 당장 임진왜란 당시 가장 신뢰성 높다고 알려지는 사료인 난중일기에 왜란 전후를 통틀어서 이순신장군이 직접 각 진과 보를 돌면서 갑옷들을 점검한것이 적혀있으므로 반박된다.이러한 갑옷등 기물점검은 수없이 나온다.

 


왜란이후 50년이 지난 회의에서 나온 말과 실제 왜란에서 싸우고 기록으로 남기고 그 기록이 가장 신뢰도있는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니 비교가 불가능하다.


 

1줄요약

가장 확실한 사료인 이순신장군 난중일기와

여러 사료를 종합적으로 교차 검증했을시 갑옷 다 챙겨입은게 수군임.


 

그리고 그걸 고증한다는 K-드라마 수준

 

제작비 어쩌구 하기전에 적군인 왜군 갑옷은 다 잘 입혀논거 보면 제작비 문제도 아님 그냥 역사왜곡임.

일본갑옷은 버블때 만들어서 빌려오는거기때문에 싸다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면 용의눈물이나 정도전에서 갑옷 고증을 잘 만들고 잘 하였는데 이 갑옷들 두고 저 지랄한거다. 

그리고 수군영에 배속된 병졸은 다 수군이기에 굳이 저렇게 적어놓고 입고다닐 이유가 없음.

 


이걸 반박한다는 글 보면

비변사등록 1650년에 작성된걸 가져다가 이순신장군때도 수군이 갑옷 입지않았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비변사등록 임진왜란 직전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이 직접 왜란전에 각 진 순시하면서 갑옷들 점검한거 적어놔서 바로 반박됨.

그리고 진짜 안 입었으면 명나라나 일본 기록에 그게 적혀있어야하는데 정작 일본측 기록인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보면 다 갑옷입었다고 적혀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