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아닙니다. 용사님."

"네?"


앉아서는 사고를 유지하기가 힘들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갈색 눈동자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용사님께서는, 감정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내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아뇨, 잘못된 감정이란 없습니다.

그저, 용사님, 당신께서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동경, 우정, 신뢰 등 그런 종류의 감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헤어질 것이 아쉬워서 그러한 감정들을 강하게 느끼고 계신 것 뿐입니다."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전히 매력적인 눈이다. 온 종일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그녀의 눈을 계속 바라볼 수 있다면,

감히 내 눈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담아낼 수만 있다면,

내 두 눈을 뽑아도 좋으리라.

아니, 눈동자가 아니라 목숨을, 내 영혼이 그 대가라 하여도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내어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에 나에게 분노와 확신을 각인시키려는 듯 힘이 들어가있었다.

이런 눈동자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적의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약간의 실망이 그 안에 같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그런 감정과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혼동할 정도로 숫해 보였나요?"

"용사님."

"다시 말하죠. 난-"

"에밀리!"


갑작스런 호명에 놀랐는지 분홍색 입술이 닫혔다.

그녀의 이름을 기습적으로 크게 외침으로서 뒷말을 자를 수 있었다.

나올 시기를 놓친 말은 다시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 자리잡을 것이고, 그 말이 다시 구멍을 넘어 나오긴 어려우리라.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의도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별로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무례를 용서 해주시길."


고개를 깊게 숙인다.

평상시라면 바로 들려왔을 용서의 목소리가 뜸을 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꼭 쥔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오기에 눈을 감아버렸다.


봐선 안된다.

신하된 자이기에.

주군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다.

주군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듣지 않는다.

주군이 감추고 싶은 것은 들추지 않는다.

주군이 숨기고 싶은 것은 찾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잊는다.

용사의 거친 숨소리를 무시한다.

하지만...


엉뚱한 생각이 올라오기 전에 혀를 깨물었다.

약간의 통증과 비릿한 맛이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생각은 이 장소를 떠나서 혼자 있을 때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비를 구하는 자는 오로지 그 자비에만 집중해야한다.


눈을 감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들려오는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고개를..."


용사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드세요. 올란."


서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용사는 평소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갈색 눈동자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가도 좋습니다. 바쁠텐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용사님. 나가보겠습니다."


용사에게 다시 고개를 숙이자 그녀도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음각으로 새긴 꽃과 줄기의 감촉이 느껴지는 금속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고 나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가볍게 문을 닫고 나온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그녀를 떠났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용사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섬기던 주인을 배신하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나는 처음부터 동화의 주연이 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동안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은 그녀가 검으로서의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을 쓰러트림으로써 그 역할을 모두 한 나는 더이상 그녀의 곁에 있어선 안 됐다.

성스러운 영웅의 옆에 타락한 그림자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날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장소로 내려갔다.






"끄으으..."

"꺄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에는 이미 호객꾼의 팔이 잡혀있었다.

감히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그녀의 몸을 때리려고 들어올렸던 그 팔은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려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치 혀를 놀리며 사람들의 흥분을 이끌어내던 남자의 입에서는 고통섞인 개거품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손에 쥔 팔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며 그를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쪽 손이 기둥에 묶인 채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용사를 봤다.


"헤엑, 헤엑...❤ 자지...❤ 자지 주세요❤!

발정난 암퇘지의 아가방을 멋진 주인님의 육봉으로 후려쳐서 꿀꿀거리는 신음을 뱉게 해주세요❤!"


도저히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내 귀를 후벼파서 내가 들은 말을 꺼내버리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묶은 밧줄을 끊어버리고 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하으응❤"


그 작은 자극조차 그녀에게는 쾌감이었는지 침에 젖은 입술에서 달콤한 신음이 나왔다.


끄드득.

내 이빨이 서로 맞물리면서 갈리는 소리가 났다.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과 끓어오르는 기분탓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경비병! 저놈을 끌어내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과

호객꾼의 꺾인 팔에서 뿜어진 피를 뒤집어쓴 몇몇 사람들의 비명 사이로

대중들과 떨어져 단상 한 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구경하던 무리 중 누군가 소리쳤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무슨 의원이라고 했던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저 뚱뚱한 외모와 무능한 머리를 가지고도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인간이었던 건 확실했다.

그의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그와 같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아아앙, 가지 마세요, 주인님❤

하얀 좆물 받고 싶어서 끈적한 애액을 퓻퓻하고 내뱉는 제 보지를 써서 기분 좋아져주세요❤"

"... 얌전히 쉬고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자지 주는 거야❤? 그럼 얌전히 있을 게요❤"


나는 용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중간에 몇몇 경비병들이 나를 막아섰지만 그들이 쥔 창을 잡아 부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쫓아낼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돼지같이 살이 찐 의원이 흘리는 땀이 많아지는게 보였다.


어째서 무능한 인간들은 항상 저렇게 돼지같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이성은 확실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기 위함인지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의자에 꽉 찰 정도로 살찐 몸과 무게, 육수처럼 땀 때문인지 그는 미끄러져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의 눈과 그의 바로 앞까지 나가선 내 눈이 마주쳤다.


"당장 이 같잖은 행사를 중지해라."


의원의 눈이 공포로 흔들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 눈을 뽑아서 터트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이, 이, 이건, 왕국의 성스러운 국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쾅!

분노가 담긴 내 주먹이 탁자에 닿자, 내 주먹 모양대로 뜯겨져 나갔다.

나무 파편이 바닥에 부딪혔다가 내 눈높이보다도 높게 튀어오르는 걸 본 의원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 이 행사가 중단되지 않으면, 너희 모두 죽는다."

"그, 그, 그..."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협박을 하는 건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무장한 병사들 사이에서 고개만 살짝 내민 다른 의원이 나를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법을 집행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그런 곳에서 감히 의원들을 협박하는 불경한 행위가 용납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가 계속 나에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컸지만, 커다란 허세 사이에 담긴 미세한 떨림에서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공포를 만용으로 덮으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만용의 대가를 치뤄야 함을 망각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였다.


"지금 '불경하다' 말했나, 의원?"


새로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그가 경비병들을 앞으로 밀었다.

나는 조용히 품에서 가면을 꺼내 내 얼굴에 덮었다.


"헉!"

"그, 그 가면은...!"


아무런 장식 하나 없이 오직 눈구멍만 작게 뚫려있는 검은 가면을 본 사람들이 술렁였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내 모습을,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쓰던 가면이었는데

이제는 이 가면만이 내가 용사를 도와 마왕을 쓰러트린 검사였다는 걸 증명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에게 불경하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질문했으나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남자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더러운 혓바닥을 놀리면서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말로 죄악을 범할 수 있음이,

오로지 인간을 향해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내려주시는 여신님의 자비임을 알지 못하는 건가?

너희들은 감히 필멸자 주제에 위대하신 여신님의 자녀인 용사를 모욕했다.

그것만으로도 너희들을 충분히 단죄할 수 있거늘,

아직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그 여자는 용사가 아니다! 더러운 반역자일 뿐이야!"


경비병 뒤에 숨은 의원이 소리쳤다.

그 말에 내 뒤통수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내 몸이 내 의지보다도 빠르게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어 용사를 모욕한 남자의 목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다시 지껄여봐라. 뭐라고?"

"켁, 케헥...!"

"반역자? 반역자라고 했나?"

"그쯤하고 이제 진정하시오, 올란."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중무장한 제국 기사단원들 사이로 한 중년 남성이 보였다.

나이 들어 빛을 잃어버린 짧은 금발에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

우리 일행이 마왕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모든 군권을 일임받아 마왕군의 총공세를 저지하여 왕국을 지켜낸 대재상.

제라스 펜자한.


"그대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으나, 이는 여왕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형벌이외다."

"뭐?"

"일단 그 손부터 놓고 이야기 하는게 어떻겠소?"


그가 숨이 통하지 않아 얼굴이 파랗게 질린 의원을 가리켰다.

나는 그를 집어 던지듯 근처에 있던 경비병에게 넘기고 재상을 바라보았다.


"설명해라. 다만, 내가 납득할 수 없으면 즉시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을 날려버릴 걸 명심하고."

"길게 설명할 것도 없소.

용사는, 아니, 전 용사 에밀리는 여신님을 모욕하고 폐하의 왕위를 찬탈하러 하였소."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대가 믿기 어려워 하는 것도 이해하오.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으니.

오히려, 에밀리가 내 충성심을 시험해보려는 건가 의심했었소.

그녀가 나보고 말하더군.

왕이 되고 싶지 않냐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열자고."


뭐?


"그 말을 들은 나도 당신처럼 놀랐다오.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을 정도였지.

하지만 에밀리는 진지하게 나에게 반역을 권유했소.

여신의 선택을 받았던 그녀가 새로운 교황이 되고, 마왕군을 막았던 나는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 맞지 않겠냐면서.

진지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랬더니 그녀가 말하더군.


'우리는 세상를 구했는데, 세상은 자신의 작은 소원 하나도 이루어주지 못했다,

단 한 명만 곁에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그 소원을 쟁취하겠다'라고."

"...!"


숨이 턱 막혔다.

용사님이... 에밀리가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고?


"그 말을 하는 에밀리의 두 눈은 독기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소.

그 눈빛과 태도에서 그녀가 한 없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챈 나는 선택해야만 했지.

그녀를 돕던가, 아니면 그녀를 체포하던가.


내 일신을 위해서라면 그녀를 도와 나라를 뒤집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리하지 않았소.

정확하게는, 그리 할 수 없었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왕군을 막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지키고자 했었던 남은 사람들,

그리고 나 하나를 믿고 모든 권한을 양도하셨던 폐하의 믿음.

나는 차마 그것들을 져버릴 수 없었소.


그래서 내 손으로 직접 용사를 붙잡아 재판에 넘겼지.

나도, 폐하도, 심지어 그녀가 죽이려고 했던 교황조차 그녀에게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려고 노력했다오.

고결했던 우리의 영웅이 욕망에 사로잡힌 악인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건 너무나도 힘들었소.

우리는 재판을 연기하고, 연기하고, 또 연기하면서

에밀리를 설득하고, 다그치고, 애원까지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 했다오.

하다못해 그녀에게 명예로운 죽음이라도 안겨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에밀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욕망을 버리지 못했지.

그 결과가 이것이오.


그대를 비롯하여 용사와 함께 했던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은 내 판단이었소.

나조차 에밀리의 변절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괴로워하는데

오랜 시간을 함께 여행했던 그대들이라면 나보다 더욱 괴로워했겠지.

그런 괴로움을 나누느니, 차라리 그대들이 무지 속에 살기를 바랐던 거요.


누군가 사가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공개 처벌을 받아야 했기에

최소한으로 정해진 시간 동안만 공개하고 그 이후엔 내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사서 거두려 했었다오.

죄인을 아는 사람이 죄인을 사가는 것은 불법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짧다고 생각한 시간에 이렇게 당신이 보게 될줄은 전혀 몰랐소.

여신님도 참 가혹하시구려..."


말을 마친 재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약간 눈을 찡그려서 생긴 그의 눈가 주름에는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나의 영웅이, 내 구원자가 그렇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여왕님을 만나봐야겠다."

"폐하께서는 지금 사람을 만나고 있지 않소."


재상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도 마음에 상처를 크게 입으신 모양이오.

에밀리의 처벌이 확정된 날부터 모든 접객과 업무를 반려하고 방 안에만 계신다오."

"상관 없다. 내가 여왕님을 만나보기 전까지 누구도 용사님을 건드릴 수 없어."

"올란, 제발 고집은 그만..."


나를 설득하려던 재상은 그의 눈 앞에 들이밀어진 칼날을 보자마자 말을 멈췄다.

내 옆에 있던 경비병은 그제야 자신의 칼을 빼앗긴 것을 깨닫고 자신의 손과 칼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 이것도 죄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내 행동이 문제가 된다면 나중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여왕님의 입을 통해서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듣기 전까지, 그 누구도 용사님을 건드릴 수 없다."

"그대만의 죄가 아니오."

"어차피 용사님께 더해질 죄도 없지 않은가?"

"..."


재상은 더이상 나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도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병사에게 칼을 돌려준 나는 용사님에게로 돌아갔다.


"올란, 어디 가시오?"


바닥에 얌전히 누워 있는 용사님을 안아 들자 그녀가 애교를 부렸다.


"아앙❤ 에밀리 그동안 잘 참았어요❤ 이제 상 주세요❤"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여기선 안 됩니다."

"올란! 당장 그녀를 내려 놓으시오!"


재상이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여왕님께 전해라. 내가 직접 대면하길 원한다고.

여왕님께서 준비가 되시거든 여기 있는 기둥에 검은 천을 묶어두어라.

그러면 내가 찾아가겠다."

"그녀를 데리고 어딜 가려고 그러오?"

"걱정 마라. 용사님은 안전하실테니까."


나는 단상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올란! 젠장, 경비병! 뭣들 하나!"


뒤에서 재상이 병사들을 시켜 날 잡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붕과 지붕을 타고 넘어 어느 막다른 골목에 도착한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왕도에 올 일이 있을 때 숙소를 따로 구하기 귀찮아서 구매해 두었던 집이었다.

살림살이라고는 싸구려 침대 하나가 전부였지만.

침대에 조심스럽게 용사님을 눕히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용사님, 괜찮으십니까?"

"하나도 안 괜찮아요...❤"


풀린 혀로 그녀가 한숨에 가깝게 말했다.


"애태우는 거 더는 싫어요❤ 자궁이 큥큥거려서 아파요❤ 유두도 빨딱빨딱 서서 쪽쪽해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그녀가 혀로 내 손바닥을 핥았다.

그 감촉에 놀란 내가 손을 때어내려 했으나 어느새 내 손을 붙잡은 그녀가 내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응, 음❤ 마시써... 주인님의 손바닥, 크고 듬직해서 멋져요❤ 이 굵고 긴 손가락으로 에밀리의 보지를 쑤셔주세요❤"


그녀의 혀가 붉은 뱀처럼 내 손을 기어다니는 감각이 소름돋게 간지러웠다.

팔을 타고 올라온 그 간지러움은 내 심장을 조각조각 찢어냈다.


언제나 밝았던 그녀가, 항상 모두를 기쁘게 하는 미소를 지었던 그녀가.

지금은 오직 쾌락만을 탐하며 자신에게 기쁨을 내려달라는 음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기 너무 힘들어 눈을 돌리려 했지만 그녀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내 고개를 붙들어 두었다.

내가 말없이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행동이 점차 굼떠졌다.

그녀의 침으로 범벅이 된 내 손을 붙잡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간 그녀는 울상이 된 채 날 바라보았다.


"제발... 그만 괴롭혀주세요... 에밀리, 죽을거 같아요...❤

나 너무 힘들어요... 제발 자비를 주세요, 주인님...❤

몸이, 몸이 너무 뜨거워요... 진짜 죽을 거 같아...❤"


여태까지의 아양 떨던 말투가 아니라 진짜로 고통이 섞인듯한 어조에 퍼득 정신이 들었다.

급히 그녀의 몸을 살펴보니 붉게 달아오른 하얀 피부 위로 분홍빛 문양들이 피어올라 있었다.


"음문...!"


예전에 서큐버스를 상대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영지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힘을 모았던 서큐버스 퀸.

그것은 사람들의 몸에 음문을 그려넣고 정기적으로 그들의 정기를 흡수했다.


그려진 것만으로도 몸에 음기가 쌓이기 시작하며,

음기가 축적될수록 쾌락에 저항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몸이 예민해지고,

성욕을 해소하면 해소할수록 정신이 망가져 성적 쾌락만을 탐하게 되며,

반대로 성욕을 참고 오랜 시간 방치하면 그대로 끓어오른 자신의 정기에 죽어버리는 음문.

모든 음문이 서큐버스가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 기원은 서큐버스들의 그것에 있었다.


그때 보았던 문양과 흡사한 것이 용사님의 몸에 그려져 있었다.

문양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찍한 분홍색 빛은 그것이 확실히 음문임을 나타냈다.


"살려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한 번만, 나중에 실컷 저를 괴롭히셔도 좋으니까 한 번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마구 후려치셔도 좋아요,

밧줄로 목을 조르면서 목보지에 자지를 집어넣고 눈이 뒤집힐 정도로 마구마구 박으셔도 좋아요,

버릇없이 맨날맨날 정액을 먹고 싶어서 애액을 흘리는 자궁을 마구마구 후드려 패셔도 좋아요,

원하신다면 바늘로 이 천박한 젖탱이를 찌르셔도 좋아요,

후장 보지에 슬라임을 집어넣고 마구 휘저으셔도 좋아요,

손발을 묶고 욕조에 던져서 바둥거리는 모습을 구경하셔도 좋아요,

전기 마법으로 더이상 비명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제 보지를 지져버리셔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발 지금 한 번만 보내주세요... 가고 싶어요... 제발...❤"


공포와 불안함과 절망이 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렸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몸을 눕히고 다리를 벌렸다.


"아...❤"


내가 앞으로 할 일을 눈치챈 그녀가 기쁨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 암캐의 보지를 쑤셔주세요❤!

후장 보지에 막대기를 쑤셔 넣어주세요❤!

부끄러움도 모르고 잔뜩 발기한 클리토리스를 때려주세요❤!

자지님을 기다리면서 벌렁거리는 제..."


끊임없이 천박한 말을 뱉어내던 에밀리는 입에 천이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집어넣어 말을 멈춘 나는 마침내 그녀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 보았다.

빠금히 벌어진 분홍색 꽃잎 사이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투명한 꿀이 흘러나와 꿈틀거리는 애널 꽃받침을 타고 엉덩이 줄기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액체를 손가락에 묻히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빨리 자신을 어루만져주길 원하며 옴죽거리는 분홍색 속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


내 손끝이 음부에 닿은 것만으로도 그녀가 몸을 떨었다.

도망가는 그녀의 몸을 붙잡아 갈라진 균열을 위아래로 쓰다듬자 그녀의 신음이 점점 커졌다.

내 귀에 들려오는 억누른 신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빨리 절정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뜨겁고 말랑말랑한 부드러운 균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가끔씩 작게 솟아오른 돌기를 건들여주길 수 차례.

아래에 깔린 천을 흠뻑 적시고 내 옷까지 살짝 젖을 정도로 애액을 뱉어내던 작은 조개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절정의 신호인 것을 눈치챈 나는 그동안 스치기만 했던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눌러 비볐다.


"---❤, ---❤❤, ❤❤❤, ❤❤❤❤❤❤❤-------!"


천으로 가득 찬 입 속에서 나오던 답답한 신음이 길게 이어지다 끊어진 순간,

그녀의 몸이 활처럼 꺾이며 튀어올랐다.

나는 그녀의 몸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부불어오른 조갯살을 좌우로 문질렀다.

쭉 뻗은 다리를 한껏 긴장시키고,

발끝과 어깨와 머리로 몸을 지탱한 채,

가장 부끄러운 부위를 벌려 내밀었던 그녀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푸하❤! 하악❤ 하악❤! 흐으응...❤"


그녀의 입과 숨을 막았던 천을 빼내자 그녀는 몸에 남아있는 쾌락을 뱉어내고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용사님, 이제 좀 진정 되셨습니까?"

"흐응... 부족해... 부족해요...❤ 더, 더 보내주세요❤

기절할때까지 보지를 북작북작 쑤셔주세요❤

손가락으로 잔뜩 만져져서 질척질척해진 보지를 더 꾸짖어 주세요❤

아직 안 만져져서 애달픈 이 큼지막한 젖보지도 뭉개질정도로 문질러주세요❤

앞보지도 뒷보지도, 주인님한테 애원하는 이 입보지도 마음대로 써주세요❤"

"용사님, 제발 조금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달라고 부탁하려던 나는 그녀의 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잠깐 사그라들었던 분홍색 빛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음문이 이렇게나 빨리 활성화 된다고?

이럴리가 없는데.

아니면 설마...


나는 급하게 용사님의 배를, 그녀의 자궁이 있을 위치를 문질렀다.


"아앙❤"


그 자극만으로도 용사님은 온 몸을 배배 꼬며 기뻐하셨지만 그런 반응조차 지금은 방해였다.

내 손이 땀에 젖어 반짝거리는 부드러운 배를 몇 번 쓰다듬자 작은 문양들이 떠올랐다.


"젠장..."


음문이 완전히 개화하기 직전에야 보이는 표식들.

완전히 여물어서 터지기 직전에야 나타나야 할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 문양들이 떠오르면 적당한 치료 없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을 잃어버린 인형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그 생명이 타서 사라지는 두가지 결말 뿐이다.


이정도까지 왔으면 해결 방법은 세 가지 뿐이였다.


하나. 신성력으로 음문을 해주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고 안전하며 확실하지만 나는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성력을 가진 성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쓸 수 없는 방법이다.


둘. 음문의 마나 구조를 해체하여 성장을 멈춘다.

음문의 진행상태가 멈출 뿐, 달아오른 신체는 그대로겠지만 그래도 더이상 위험해지진 않는다.

그러나 앞선 방법과 마찬가지로 나는 마법을 쓸 줄 모르고 적합한 아티팩트도 없다.


마지막. 정액을 먹인다.

말 그대로 최후에나 쓸 수 있는, 당장의 죽음을 피하기 위한 차악.

음문의 진행상태가 되돌아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방법이고

계속해서 사용하다간 다른 방향으로 정신이 망가진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었다.


나는 이를 작게 갈았다.

공개 처벌을 시작한 날에 이정도로 음문이 진행되어 있다고?

재상은 자신이 용사님를 사려 했었다고 했었지만

당장 해주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공개 처벌을 받으며 강간당하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살아있어야지 무언가 할 수 있으니까.

죽는 것보다야 사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삶일지라도.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주인님, 저 또 죽을 거 가타여❤"


계속해서 이어지던 잡생각이 용사님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마법사나 성직자는 나중에 구하면 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더라도 동료들이 남아있으니 그들을 찾으면 어떻게든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때까지 용사님을 살려두는 것이었다.


"자지! 자지 주세요❤!"


급하게 옷을 벗는 날 보면서 용사님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밝은 목소리에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은 내 감정따위를 살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축 처진 기둥을 붙잡고 그녀의 애액이 묻은 손바닥으로 열심히 문질렀다.


제발, 제발 빨리 서라.


초조한 내 마음과 다르게 내 물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급한 마음 탓인지 구슬이 더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어디서 미약이라도 구해두는 건데.


"주인님❤"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발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를 용사님이 불렀다.

어느새 내 물건 바로 옆에 얼굴을 가져온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살짝 웃었다.


"에밀리가 도와드릴게요❤"


그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물건을 입으로 물었다.


"용사님... 윽!"


기겁하며 그녀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용사님이 이빨을 세워 구슬을 살짝 깨무는 바람에 실패했다.

자신의 강한 의사를 협박으로 나타낸 용사님은 곧바로 혀를 내밀어 내 기둥 뿌리와 고환을 핥았다.

입안 가득 남근을 물고, 받아들이지 못한 부위를 미끈미끈한 혀로 달래주는 용사님의 허리가 조금씩 움직였다.


"응, 응❤"

"흐... 윽..."


미끌거리는 간지러움이 흐를 때마다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것을 최대한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입기술에 점점 커지는 물건처럼 내 신음도 점점 커졌다.


"우읍❤ 츄폽, 츄폽❤ 츄르르릅❤❤ "


용사님은 어느새 완전히 발기된 내 양물을 온 머리를 움직여가며 빨고 있었다.

음경의 끝에서 투명하게 흘러나오는 쿠퍼액을 빨아들이면서,

혀끝으로 구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녀의 움직임에 허리가 저릿했다.

그것만으로도 금방 사정할 것 같았지만

나는 더 큰 쾌감이 쌓여 저항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간신히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아아앙❤ 싫어❤ 더 맛보게 해주세요❤

찐득찐득하고 하얀 정액 에밀리의 목 안에 븃븃하고 싸주세요❤"


내 손에 얼굴을 붙잡힌 그녀가 혀를 뻗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맛을 보려고 애쓰며 앙탈부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 안에 정액을 쏟을 생각이 없었다.


음문이 새겨진 여자가 한 번 쾌락을 맛보게 되면

다음 발정까지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하지만 접하지 못한 새로운 쾌락을 맛본다면,

한 번도 정액을 접하지 못한 신체에 정액을 넣어준다면.

그 주기를 상당히 늦출 수 있다.


용사님의 온 몸을 덮은 음문을 보았을 때 이미 용사님은 상당한 능욕을 견디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미 쾌락 고문자들에 의해서 더러운 것을 충분히 접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 곳.

단 한 곳 만큼은 아직 깨끗했다.


나는 아쉬워하는 용사님의 몸을 껴안고 침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의도를 읽은 그녀의 표정이 환희와 욕정으로 가득찼다.


가느다란 눈웃음을 짓고,

상기된 볼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며,

반짝이는 분홍색 입술을 혀로 살짝 핥는 그녀는 전에 보았던 서큐버스 퀸보다 훨씬 요염해보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에 손을 올리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렸다.

끈적하게 이어진 애액이 마치 극장의 커튼이 펼쳐지듯 우아하게 펼져졌다가 떨어졌다.

볼록 튀어 나온 부드러운 음순이, 곧 찾아올 수컷을 기다리며 부끄러운 속살을 살짝살짝 내보였다.


그 입구를 향해 둥근 끝을 가져간 나는 천천히,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허리를 밀어넣었다.


"흐으응❤"


아직 둔탁한 화살촉이 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용사님의 입에서 깊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의 작은 구멍 역시 마침내 기다리던 보상을 놓치지 않겠다는듯 나를 안으로 빨아들이며 열심히 유혹했다.

뜨겁게 미끈거리는 육벽의 감촉과

꽉 조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점막의 부드러움,

그 사이사이 예상치 못한 방해를 하며 저릿한 쾌락을 주는 주름의 모양.

당장이라도 끝까지 허리를 밀어넣고 싶게 만드는 유혹들을 애써 참아가며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내 분신에 무언가 느껴졌다.


처녀의 증표.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더이상 나아가면 되돌릴 수 없다.

이미 그녀의 순결을 더럽혀놓고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육체적인 흔적은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엽기적이지만 그녀의 안에 남자의 씨앗을 뿌리는 것 뿐이라면

이 상태에서 자위를 해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녀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언제나 잡고 싶었던 그 손이, 어둠 속에 주저앉은 나를 빛으로 이끌어줬던 그 손이.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겨냈다.


"올란."


한 줄기 섬광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언제나 그리워했던 목소리.

항상 듣고 싶었던 목소리.

그날, 내가 버리고 도망쳤던 그 목소리.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시야가 어지러지는 가운데, 그녀의 맑은 갈색 눈동자만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영원히 남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리라 생각했던 그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다.


"키스해줘요."


나는 홀린듯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감미로운 맛이 내 입술에 퍼져나갔다.

부드럽게 닫힌 입술이 거친 입술과 겹쳐졌고 그녀가 내 입술을 물기 위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입술을 벌리자 그녀가 입 안으로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흐름에 당황한 내가 움찔하자 이번엔 그녀가 숨을 빨아들였다.

거친 입술이 공기와 함께 작고 부드러운 입술사이로 빨려들어갔다.

자신의 안에 침입한 불순물을 입술로 살짝 깨물은 그녀는 침입자를 밀어내던 혀를 그대로 내 안까지 밀어넣었다.

내 안에 들어온 그녀는 내 혀를 유혹하며 춤을 추었다.

나도 모르게 그 춤사위에 이끌려 나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듯 입을 더욱 밀어붙이며 혀끝을 입술로 붙잡았다.

그녀의 만족스러운 신음소리가 내 입에서 뇌로 직접 울려 퍼졌다.

내 혀를 가볍게 빨아들이던 그녀가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동시에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의 잇몸을 핥고, 이빨을 간지럽히고, 천장과 혀밑 신경을 쓰다듬으면서

때로는 춤의 스탭처럼, 때로는 검을 주고 받는 발놀림처럼, 때로는 엉켜서 쓰러지는 이인삼각처럼

탐하는 것이 애정인지 쾌락인지 모를 정도로 진하게 키스를 주고받았다.


"하아...❤"


숨이 차올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이 차올랐기 때문인지.

약간 어지러울 정도가 되어서야 우리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녀와 나 사이에 이어진 타액으로 된 다리가 그녀의 하얀 가슴 위로 떨어졌다.


기뻤다.

행복했다.

기분좋았다.

사랑스러웠다.

혼란스러웠다.

마음아팠다.

미안했다.

슬펐다.


"올란."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굳어버린 내 얼굴을 그녀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표류하던 선원이 간신히 발견한 판자 위에 매달리는 것처럼 그녀의 손길에 매달렸다.


"울지 마요."


그제야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는지.

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들어와주세요, 올란."


그녀의 허락을 받은 나는 작은 막을 찢으며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