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심장에 불치병이 생겼다는 걸 알고 병원에 입원한지 5년.
저는 오늘 어른이 되어서,



ㅡ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미안."
"왜?"


이런 딸이라.


"괜찮아."


이런 친구라.


"괜찮아."


괜찮아?
왜?


"살아만 있어줘."

미안해요.
당신은 살아가는 것조차 지옥일텐데.
나보다 더한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이 당신일진대.


"미안해."


그게 내 말버릇이었다.



나는 내 병명을 잘 모른다.
의사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으신 건 아닌데.
수많은 영어와 숫자의 향연에 난 그 이름을 외우길 포기했다.

날 죽이는 병이 원래 없는 거라면 차라리 모르는 채로 죽고 싶었다. 날 죽인 것에 이름이 붙길 원하진 않았다.



산다면,
아니, 이제와서 무슨 산다는 것인가.
고비라는 단어를 들은지도 어언 1년 째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이 준비해야한다고 했을 때.
난 아무런 감흥 없이 자살을 결심했다.



자살을 결정한다고 했지만, 덜컥 겁이 든 난 영락없는 사람이리라.
다만 무섭다고 결정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죽는 순간까지 병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매일 꺽여가던 용기를 부러뜨리기로 결심하고, 패기를 먹었다.
난 그 패기를 들고 몹쓸짓을 하려고 한다.



"저, 4월에 죽을래요."

등짝을 맞았다.
두드려 맞았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어울리리라.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웃음도 나왔으니 난 아마도 미친년이렸다.
부모님한테 저런 소리를 질렀으니 패륜아에 싸이패스라 해도 변명할 길이 없다.


미안해.
미안해.
이런 딸이라서 미안해.
그래도 말야.


"나 들었어."
"6월을 못 넘긴다며."

나도 내 몸을 안다.
올해는 무리겠구나.

몸은 이미 사형선고를 내린지 오래였다.
유예를 계속해도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단걸 알고있는데.



"나 후회하기 싫어."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사람답게.
행복하게.
추억할 물건들을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최고의 순간에.

"도와줄 거지?"


아빠는 승낙했다. 엄마도 애써 웃었다.
마음이 찢어질듯 아파서 나도 웃었다.

오늘부턴 울지 않는다.
행복할 일만 남았는걸.






내게도 버킷리스트가 있다. 수십번을 새로 적었을 버킷리스트의 첫번째는 이거였다


1. 학교가기


검정고시를 도와준 친구에게 감사했다. 친구와 함께 지원한 대학에서도 임시로 학생자격을 주셨다.


입학의 통지서를 보면서 친구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통지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그날의 일기에 붙여놓았다.



대학에 합격했으니 할 건 너무나도 많았다.
캠퍼스를 둘러보기 이전,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모든 장소,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생각보다 날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감사했다. 바랬던 추억이 훨씬 선명해졌다.


스무살이 되었건만 술은 역시 힘든가보다. 의사 선생님이 엄포를 두셨다. 고기 조금까지는 용서해주신다니 적당히만 먹기로 했다.






2월, 지금은 2월이다.

대학교에서 OT를 한다길래 친구와 함께 갔다.
생각보다 뭔가 별거 없어서 실망했다.

긍정회로를 돌리던 중 친구가 중얼거렸다.


"바다."
"?"
"바다로 가자."
"지금?"
"응, 부모님도 다같이."

겨울바다는 특별하다며 반나절을 내리 달린 동해바다는 정말로 특별했다.

시원한 바람
소금기 어린 바람
머리카락이 휘날려서
귀랑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너무 좋아서


패딩을 벗고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으로 냅다 달렸다.
맞바람이 너무 기분 좋았다.

단체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다 망가져서 못생긴 얼굴들이 사진에 담겼다.




3월입니다! 꽃샘추위가 사라지지 않은 3월이 되었습니다!

저희 동네는 그나마 따뜻해서 땅과 나무에 싹이 돋아났습니다. 머잖아 꽃도 피겠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학교의 유명인사는 아닌듯 합니다. 학과에선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요.
약간의 관심은 얻었으면 좋겠지만 유명해지길 원하는 건 아니니 잠자코 있기로 했습니다.

소영이는 소문은 빠르니 긴장하라고 합니다.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려 합니다.




소영이가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습니다.
소문은 정말로 몇 일만에 퍼져나갔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빨라서 놀랐습니다.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와...."
"봤냐?"
"봤어, 봤어."


어떻게 난 부잣집 아가씨를 친구로 뒀을까.
처음 본 규모의 돈에 정신을 놓았습니다.


아니, 저건 자본이라 해야하지 않을까?




요즘 저는 낭만에 빠져있어요.
감성적인 단어나 글귀를 보면 무심코 좋아요를 눌러버린답니다.
그 중 소설을 보다가 꽂혀버린 단어가 있어요.


당신의 하루를 빌려주세요.
입에 내뱉으라면 손발을 오그라뜨리는 한 문장이에요.
상상하는 순간마다 손가락이 저려요.

소영이한테 미쳤다고 생각하고 말해봤더니

"......"


저에게 욕을 쏟아냈습니다. 나쁜 년.
아니지 내가 나쁜년인가?

네, 저는 나쁜년이에요.


소영이는 그런 말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라고 합니다.
소영이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서 저런 소리를 합니다
알고 있으니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죠.


답답할만도 합니다. 4년 된 짝사랑을 지켜보는 건 상상도 못할 만큼의 지옥일 거예요.
그냥 짝사랑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건데.

걔는 날 좋아하고, 나는 거리를 둘락 말락 하고.
분명 잘라버려야 하는 건데 저한테 향한 감정을 저는 끊어낼 수가 없어요.
끊어내려 해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악질인 거겠죠.



이번의 사건 역시 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의,"


당신의 하루를 빌려주세요.
소영이가 알려줬구나.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그만큼의 충족감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만큼 미안함과 죄책감은 배로 불어났어요. 그것들은 저를 짓눌렀죠


4년간 미뤄왔어.
1달도 안 남았어.
가능하면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근데 하루로 충분할까?
그동안 참아온 만큼 선을 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참는 것은 부모님과의 약속을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건 아주, 아주 괘씸한 생각인 거예요.

뜨거운 한숨을 쉬고,
또 쉬고.


"제 하루를 가져가주실래요?"


드디어 말했습니다.
그리고 키스를 했죠.

너무나도 달콤했어요. 죽을지도 모를 것 같을 정도로 두근거렸어요.
고백도 제가 말하니 조금 빨간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새빨간 불같았어요.


그렇게 이틀이 날아갔죠.


"좋았어?"
".......좋았어..."
"와...."


이 정도로 진도 빨리 간 커플은 너희들이 최초일 거야. 응, 그러게. 소영이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건전한 진도는 다 나간 것 같아요.


"건전한 진도가 어디까진데?"
"....잡기..."
"뭐?"
"손잡기."

이소영이 기함했다. 손잡기가 마지막인가?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손잡기는 아니지 않아?

"보통 허그까진 가지 않나?"
"허그부터 야한 거 아니야?"
"......중딩 때부터 상식이 결여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억까야 그거."
"어 그래."


나쁜 놈.


그날이 오까지, 단 보름




남은 시간은 부모님과 보냈습니다.

평일엔 밤산책을 하고, 별을 보고.
주말엔 여행을 나갔습니다.


가끔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아깝게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제 물건을 정리하며 제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겼어요.


목표로 한 날이 일주일조차 남지 않았을 때엔 병이 생각보다 빨리 악화됐습니다. 평소 하던 기침에서 피를 보았어요. 몸도 안 좋아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휠체어 생홀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기사를 보았어요.

[양주 백석읍, 벚꽃 '만발'.]

"벚꽃, 벚꽃."


드디어 오는구나. 드디어, 피는구나.
이번 주말, 활짝 핀 벚꽃을 보러 갑니다.

봐서, 보고 나서, 저는.


이 땅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껴두던 옷을 꺼냈습니다.
저번달에 사둔 모자, 원피스,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하늘은 맑았습니다, 따듯한 바람이 스쳐지나갔어요.
다행히 오늘은 컨디션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무거운 발을 가볍게 옮기며 산책을 계속합니다.
꽃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담았습니다.
이 곳에 제 흔적을 담았습니다. 언제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원하는, 최고의 순간을 여기에 담았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허물어졌습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나봐요. 끝까지 버텨준 제 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울지마."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이 말을 제가 하게 될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잔인한 일이지만, 갑자기 생긴 미련이 생기기 전에 처음 먹었던 패기를 되살렸습니다.
지금 제가 떠나는 건 비극이지만, 병 떄문에 제가 갑자기 떠나버리는 건 더한 비극이니까.


주사를 맞았습니다.
이제 작별인사를 합시다.


"고마워."
"응."
"고마워."
"응..."
"정말 고마워. 소영아."
"우리 계속 친구 맞지?"
"우리 계속 친구야. 사랑해, 내 소중한 친구."


친구와 작별을 고하고,


"곧 따라갈게."
"오지마."
"나 차인 거야?"
"아니야. 이번엔, 내가 찾아갈게."
"기다리고 있을게."


연인과 이별을 고하고,
마지막.


전력으로 달려서 서로를 끌어안았어요.
서로가 으스러질듯이 붙잡았어요.


"엄마가 많이 사랑해."
"나도... 엄마 많이 사랑해."
"저쪽 가서도 행복해야해?"
"응. 알았어."


"우리 딸."
"아빠..."
"우리 딸 한번 안아보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아빠가.. 우리 딸 많이 사랑하고.."
"....."
"고맙고, 감사한단다."
"......"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응."
"좋은 꿈 꾸렴."



따뜻한 품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추억들과 함께,
소녀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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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소재를 주신 개최자님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챈에서 여주물이 왠말이냐 싶겠지만 챈에선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이 과반수를 넘지 않을까 싶어 여주물로 한번 적어봤습니다.
너무 어두운 소재라 어둡게 끌고가면 해피엔딩의 모양새는 절대 안 나올 것 같아서 이렇게 끄적이네요.

솔직히 마지막에 카페인데도 눈물 찔끔 짜면서 써버렸어요. 쪽팔리는군요


감사합니다. 2화나 외전은 없습니다.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