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흐... 죽겠다..."


호텔로 돌아온 청년, 진혁은 들고 다니던 짐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적당히 고급진 침대 매트릭스는 크게 한 번 출렁이고서 푹신하게 그의 무게를 받아주었다.


침대에 몸을 묻은 진혁의 머릿속에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지친 그의 몸이 그 생각을 순식간에 밀어내 버렸다.


한동안 죽은 듯이 엎어진 체 가만히 있던 청년이 숨을 크게 들이쉬자

가벼운 솜이 두툼하게 들어가 있는 하얀 이불을 거쳐 들어오는 공기가 그의 코로 빨려 들어갔다.


'담배 마렵다.'


어느 정도 휴식을 마친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남자라면 멋있게 담배를 피울 줄 알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낭만으로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와 어지러운 냄새를 참아가며 배운 담배였건만

지금은 멋 같은 건 상관없이 짜증 나거나 힘들 때 한 개비씩 무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청년은 짜증 나면서 힘들었기에 그의 몸이 담배를 찾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이 양손으로 침대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엔 그대로 발코니로 나가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신고 다닌,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얀색 운동화가 무거웠기에

발뒤꿈치를 이용해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침대 옆에 놓여있던 가벼운 털슬리퍼로 갈아 신고 나서야

그는 마침내 널찍한 유리문을 열고 파리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진혁과 엇갈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무단 방문의 대가로 미묘하게 느껴지는 곡물 냄새를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청년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찾으며 난간 너머로 몸을 뻗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가 식당이었나?'


진혁이 서 있는 장소의 세 층 아래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있는 철제 환풍구에서 담배 연기처럼 내뿜어지는 그 연기는

얼마 올라오지 않아 서로 흩어지며 투명해졌다.


'냄새 꽤 괜찮은데. 그냥 호텔에서 저녁 먹을 걸 그랬나.'


진혁은 한 손으로 담뱃갑을 흔들어 빼낸 담배를 입에 물며 생각했다.


처음에는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기다란 샌드위치를 씹으며 저녁 거리를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길거리에서 나는 하수도 썩은 냄새를 맡은 순간 그럴 생각이 사라졌다.


'대로만 청소하면 뭐 하냐고. 골목 입구 지나갈 때마다 썩은 내가 나는데.'


예술의 도시라던가, 낭만의 도시라던가 그런 거창한 별명을 가진 파리였건만

하수도 냄새를 맡은 순간 후각이 민감한 진혁에게는 그저 이름값을 하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낮 동안에는 그렇게까지 냄새가 심하진 않았으나,

해가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하수도 냄새에

결국 진혁은 근처 식당 아무 곳에나 들어가

적당한 가격의 메뉴를 골라 여행 가이드에서 읽은 어설픈 프랑스어를 사용해 주문해서 나온,

옥수수 맛이 느껴지는 수프와 이름 모를 부드러운 하얀 빵, 그리고 구운 감자와 같이 나온 고기를 대충 먹고선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파리 여행에 피로와 짜증을 느끼며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잘 산 거 같네.'


진혁은 손에 든 지포 라이터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길거리 좌판에서 조금 나이 들어보이는 남자에게 산 물건이었다.


중고 매물인지 사용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거기서 오는 올드한 느낌과

몸통에 그려져 있는 하얀 월계수 로고가 마음에 들어서 30유로나 주고 산 지포 라이터는

평소에 그가 사용하던 플라스틱의 뭉툭한 느낌이 아니라 금속의 차가운 느낌을 한껏 내세웠다.


'나도 이걸로 간지나게 착 하고 켜면 좀 있어 보이겠지?'


괜히 스냅을 이용해 의미 없이 뚜껑을 찰칵거리며 지포 라이터의 감촉을 즐기던 그는

마침내 라이터의 원래 목적을 위해 부싯돌에 엄지를 올렸다.


칙, 칙.


'응?'


칙, 칙.


지포 라이터로 맛보는 첫 담배의 맛을 기대하며 진혁이 힘차게 부싯돌을 굴렸으나

라이터는 이리저리 불꽃만 튀길 뿐이었다.


당황한 진혁이 몇 번 더 엄지를 움직였지만

라이터에서는 여전히 주황색의 불꽃만 잠깐 나왔다가 사라졌다.


"아, 씨발..."


여행의 첫 하루 일정도 망치고, 기껏 하나 건졌다고 생각한 라이터까지 말썽을 부리자

진혁의 입에서 짜증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라이터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주머니에 거칠게 집어넣은 진혁이

한국에서 가져온 일회용 라이터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프슷."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이상한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우왓!"


무언가 그의 몸으로 날아왔다.


진혁은 순간적으로 그 물건을 받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으로 날아오던 물건이 위로 올라오는 손바닥에 맞아 위로 튀어 올랐다.

진혁은 허둥거리면서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허둥거리는 손에 몇 번 더 부딪히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무언가는

그의 주먹에 맞고서, 발코니 난간에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진혁의 발 근처에 떨어졌다.


"라이터?"


쪼그려 앉아 발 앞에 떨어진 물건을 확인한 진혁이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의, 초록색 반투명한 300원짜리 플라스틱 라이터였다.


"흐흐흐..."


플라스틱 라이터를 보고 의아해하던 진혁은 숨죽여 웃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옆 방 발코니 난간에 어떤 여자가 고개를 처박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자신의 추태를 누군가 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진혁의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미안해, 너무 웃겨서 그만."


진혁이 떨어진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에

웃음을 삼키는 데 성공한 여자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사과했다.


"어, 아니, 아니에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한 소리 쏘아주려던 진혁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바꿨다.


조금 짙은 눈썹에, 꼬리가 살짝 올라간 큰 눈, 작지만 날카로운 콧날 밑에 있는 작은 입술.

갸름한 턱선과 밤인데도 하얗게 빛나는 얇은 목선.

위에서 내려오는 달빛을 받아 어둡게 반짝이는,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검은 머리카락.

도시의 주황색 빛을 받아 물들은 가볍고 얇은 하얀 긴 소매 티셔츠.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돋보이는 검은 바지를 따라 훑어 내려가려던 진혁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급하게 눈을 들어 올렸다.


'보는 거 들켰나?'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진혁에게 여자가 말했다.


"필요해 보여서."


"네?"


"라이터."


여자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손가락으로 진혁을, 정확하게는 그가 들고 있는 라이터를 가리켰다.


"아, 네, 어, 그, 감사합니다."


얼빠진 모습으로 감사를 표한 진혁은 몸을 살짝 돌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짧게 뱉어낸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은 채 진혁을 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진혁이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시선을 살짝 피하자 그녀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진혁은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도시를 향해 몸을 돌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 동작은 어딘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담배를 어떻게 폈더라?'


진혁의 머릿속이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그는 자신이 평소에 어떻게 담배를 피웠는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담배는 어떤 각도로 쥐었는지, 발은 어떻게 두고 있었는지,


'왼손은... 어... 주머니에 넣으면 건방져 보이려나?

난간을 잡아야 하나? 이상한가? 아예 기대고 피우면 좀 낫나?

근데 난간이 좀 낮은데... 차라리 의자에 앉을까?

아닌가? 의자가 너무 깊어서 눕는 것처럼 보이려나?'


밑도 끝도 없이 생각을 반복하던 그는 문득 왼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손을 바라보았다.


'아, 맞다. 이거 어떻게 돌려주지.'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를 인식한 진혁이 여자를 살짝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 먹을 때 돌려줘."


그녀가 진혁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아, 네."


진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그에게 라이터를 던져준 여자도 몸을 돌려 살짝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야경을 내다보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는 여자와 달리

그는 계속해서 옆눈으로 여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예쁘다'라는 간단한 단어로 시작한 그의 관심은 조용히 몸집을 불렸다.

몇 살일지, 이름은 뭘지, 뭐 하는 사람인지,

남자 친구는 있을지, 혼자 왔을지.


혼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굴리며

계속해서 여자를 곁눈질하던 진혁과

어느 순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여자의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


"어, 그, 한국인이세요?"


갑자기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은 진혁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런 진혁의 모습이 재밌는지 옅게 미소 지었다.


"나 너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네?"


"몰랐어?"


그녀의 대답을 듣고 놀란 진혁에게 여자가 놀리듯 되물었다.


"네..."


"버스도 같이 탔는데."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린 진혁을 보며 여자가 쿡쿡,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더욱 난처해하는 남자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말했다.


"부럽네."


"네?"


"스무 살? 스물한 살?"


"네? 아, 그, 스무 살이요..."


"좋을 때네."


여자는 생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그쪽도 별로 나이 차이 안 나 보이는데요."


진혁이 약간 늦게 나름대로 쥐어짜낸 아부성 발언을 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진짠데..."


머쓱해진 진혁이 미련하게 말을 덧붙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멍청해 보이는 행동만 반복하는 것 같았기에

그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며 반쯤 남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몇 살로 보이는데?"


진혁이 담배 연기를 뱉음과 동시에 여자가 물어보았다.


"네?"


"내가 몇 살로 보여?"


진혁은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물... 네... 아니, 셋?"


속 보이는 그의 말바꿈에 여자가 또다시 소리죽여 웃었다.


"그럼 스물셋으로 하자."


"몇 살인데요?"


"스물셋."


누가 봐도 자신을 놀리는 대답을 들은 진혁이 약간 자존심이 상해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그럼, 내일 보자."


여자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바깥에 홀로 남은 진혁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하... 멍청인가 진짜..."


담배 연기를 뿜어낸 그는 머리를 세게 긁으며 어벙하게 보였을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다.


관광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하루였다.

처음으로 나서는 해외 관광이라 들떴던 만큼 제대로 망친 하루가 더 속상했다.

헛된 명성만 가득한 도시와 헛바람만 잔뜩 들은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친 진혁은

마지막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고선 야외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꽁초를 괜히 강하게 짓누르며 비볐다.


'한 대 더 피울까.'


한 개비로는 마음을 달래지 못한 그는 주머니 속 담뱃갑을 찾아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옆 발코니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고 보니,"


진혁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진혁, 임진혁이에요."


"진혁... 이름 좋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럼 내일 여덟 시에 같이 아침 먹으러 가자."


자신의 볼일을 마친 여자가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려던 그녀가 행동을 멈추고 진혁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


진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묘한 대치에 진혁이 속으로 무언가 잘못했나 작은 걱정을 하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너 마음에 들어."


"네?"


"그러니까 그냥 누나라고 불러."


말을 마친 그녀는 진혁이 무언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또다시 홀로 남은 진혁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몇 번 흔들어 담배를 꺼냈다.


'나, 너 마음에 들어.'


그것을 입에 물려던 진혁은 여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실룩였다.

몇 번 웃음을 참으며 담배를 물려던 그는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으며 그냥 방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