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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진혁은 호텔 복도에서 초조하게 초록색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넘겼다.

예전에 읽은 남성용 패션 잡지를 떠올리며 나름대로 신경 써서 코디를 해온 그는

혹시라도 여자가 이상하게 보진 않을지 염려하면서 쉼 없이 머리를 매만졌다.


계속해서 자기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혹시라도 뭐가 묻어있지 않을까 살피던 진혁은

자신을 지나쳐 간 신혼부부가 '여친 기다리나 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귀가 살짝 빨개진 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번엔 멋을 위해 착용한 손목시계와 주변을 계속 번갈아 바라보며 또다시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이상 남아있었다.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올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진혁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 찰칵, 하고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발을 반쯤 돌렸던 진혁은 곧바로 여자의 방문을 향해 돌아섰다.


"기다렸어?"


하얀 블라우스를 연청색 청바지 안에 넣어 입고, 검은색 크로스백을 맨 체 마찬가지로 검은 가죽 로퍼를 신고 나온 여자가 방문을 닫으며 물었다.


"아뇨! 방금 막 나왔어요."


"방금?"


"네. 지금 막 나왔어요, 저도."


약 30분 전부터 복도를 서성이던 진혁이 거짓말을 했다.

여자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진혁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 입을 열었다.


"흠. 마이너스 10점."


"네?"


당황한 진혁에게 여자가 말했다.


"나는 나보다 10분은 일찍 나와 있는 남자 좋아하거든."


부담을 덜어주려는 말이 오히려 감점 요소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진혁은 뒤늦게 사실대로 말했다.


"아, 어... 사실 30분 전부터 나와 있었어요."


"진짜?"


진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예요."


"마이너스 100점."


"네?"


"지각보다 거짓말이 더 나빠."


그녀의 말에 진혁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조금씩 맺혔다.

어떻게 해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처럼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사고는 뾰족한 답변 대신 땀만 삐질삐질 흘려보낼 뿐이었다.


진혁의 손목에 매달린 시계가 가장 긴 팔을 한 번 돌릴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진혁을 보며 여자가 말했다.


"잘못했으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네?"


"잘못했으면 해야 할 말이 있잖아?"


여자의 말을 곧바로 해석하지 못한 진혁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뒤늦게 그 뜻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


"네..."


"그럼 됐어."


여자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그렇게 솔직하게 사과하는 거야."


"어, 그..."


좋아한다는 단어에 또다시 얼굴이 확 달아오른 진혁을 보며 여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너 진짜 알기 쉽다. 재밌네."


인생 경험이 풍부한 상대에게 마음대로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 남자가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기보다 큰 키를 이용해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숨기려는 그 행동을 본 여자는

그를 충분히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왼발 뒤꿈치를 축으로 몸을 가볍게 빙글 돌렸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아, 네."


진혁은 총총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여자의 옆에 나란히 걸음을 맞추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는 진혁이 타는 걸 기다렸다가 1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익숙해 보이는 행동에 진혁은 그녀가 이곳을 자주 온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두 사람을 태운 금속 상자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몸이 살짝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호텔 밥 먹어본 적 있어?"


짧은 부유감이 사라진 후 여자가 물어보았다.


"아뇨, 처음이에요."


"어제저녁은?"


"밖에서 먹었어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서..."


"뭐 먹었는데?"


"음... 빵이랑, 옥수수 수프랑, 감자랑, 구운 고기였는데, 이름을 모르겠네요."


"이름을 모르는데 주문은 어떻게 했어?"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했어요."


"뭔지도 모르면서 주문 한 거야?"


"네... 너무 피곤해서 그냥 아무거나 먹고 들어가자고 생각했거든요."


"흐음."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띵-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비에는 체크아웃하는 사람들과 체크인하러 들어오는 사람들,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과 손님들을 맞이하는 호텔리어들,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서양인과 하와이안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동양인 가족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었나 보네."


은은한 음식 냄새가 나는 식당을 향해 움직이는 흐름에 합류하며 여자가 물었다.


"네. 진짜 피곤했어요. 가는 곳마다 사람은 미어터지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어휴..."


"관광지가 다 그렇지 뭐. 여기도 그렇잖아?"


"확실히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네요."


"한창 바쁠 때니까. 저기 앉자."


가는 손가락이 아예 끄트머리는 아니지만, 중앙에선 살짝 먼, 그렇기에 구석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가리켰다.

하얀 의자를 소리 없이 빼내서 앉은 여자는 꽃병에 담긴 빨간 꽃 한 송이 옆에 세워져 있는 메뉴판을 잡았다.


"못 먹는 음식 있어?"


"아뇨, 딱히 없어요."


"오믈렛이랑 팽 오 레, 어때?"


"빵울레?"


처음 듣는 이름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여자가 설명해줬다.


"비에누아즈리... 아니,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구나.

물 대신 우유를 넣은 설탕빵인데, 부드러워서 아침으로 먹기 괜찮아."


"한 번 먹어볼게요."


"그래. 음료수는?"


"우유 있나요?"


"따뜻한 거, 차가운 거?"


"차가운 걸로요."


"그럼 우유 한 잔이랑 커피 한 잔. 그렇게 시킬게."


"네."


메뉴를 정한 여자가 메뉴판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직원을 찾았다.

곧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호텔 직원이 자리로 다가오자 그녀가 프랑스어로 음식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알 수 없는 대답을 남기고 떠난 후,

메뉴판을 원래 자리에 되돌린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진혁에게 물었다.


"왜?"


"아뇨, 그냥... 멋있어서요."


"고마워."


싱긋, 짧게 웃은 여자에게 이번엔 진혁이 물었다.


"파리에 자주 오세요?"


"최근엔 반년에 한 번씩 오는 정도야."


"와, 엄청 자주 오시네요."


"그래?"


"저는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 본 거예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남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여자가 탁자 아래로 다리를 꼬았다.


"처음으로 왔는데 자유 여행으로 온 거야?"


"자유 여행은 아니고, 패키지 여행인데 굳이 가이드 안 따라다녀도 되는 걸로 왔어요."


"세미 패키지?"


"네."


"그것만 해도 대단한걸. 준비할 게 많았을 텐데."


"예전부터 꿈꿔왔거든요."


"그럼 꿈을 이룬 거네? 어때, 직접 이뤄본 꿈은?"


"..."


"별로야?"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진혁을 대신해 여자가 말했다.


"네... 생각한 것보다 별로예요."


"기대치가 꽤 높았나 보네.

파리에 대해서 뭐 들은 거라도 있었어?"


"파리보다는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에, 뭐랄까... 로망 같은 게 있었어요."


"예술의 국가, 자유의 국가. 그런 느낌?"


"네."


"다들 그렇게 낚여서 이곳에 오지. 그리고 실상을 보고 반드시 한 번은 실망하고."


"누나도 그랬어요?"


"나? 음, 아마 그랬던 거 같아.

서양 하면 유럽, 유럽 하면 프랑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내가 생각하던 유럽은 어디에도 없더라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유럽은 <베르사유의 장미>속에나 있던 거야.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화려하진 않아도 아름답고 멋있긴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여자가 말을 한 번 멈추고 몸을 살짝 앞으로 숙여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그 몸짓과 그녀의 멈춘 말에 집중했다.

멈춘 말의 뒷부분을 궁금해하는 눈빛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하루 빌려줄 수 있어?"


"네?"


"인생의 로망을 실천하러 왔는데, 실망만 하고 가면 안 되잖아?

그러니 여행 선배로서 너에게 파리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같이 다니자고요?"


"응. 싫어?"


"아뇨! 좋아요!"


살짝 떠보는 대답에도 펄쩍 뛰며 대답하는 진혁의 모습에 여자가 조용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