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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여기 있지?'


불현듯 자신이 있는 장소를 깨달은 진혁이 긴장했다.

호텔 직원이 갈아주고 갔을 침구류에서 미세하게 풍기는

장미향 섞인 약품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신 그의 앞에는

그가 한국에서 챙겨온 컵라면이 두 개 놓여있었다.


도보로만 이동했던 오전과 달리, 오후에는 지하철을 사용하여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시작으로 오페라 가르니에,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보고 난 뒤

센강을 따라 노트르담을 보고 근처 빵집에서 간식을 사서

파리 시청이 보이는 강가에 앉아 조금 이른 야경을 즐긴 둘은

약간은 쌀쌀한 파리의 공기를 천천히 거닐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혹시 라면 있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객실 복도를 걸으며 하루가 끝났음에 아쉬워하던 진혁에게 여자가 물었다.


"라면이요? 컵라면은 있는데..."


"잘됐네. 한 시간 뒤에 가지고 내 방으로 와."


"네?"


"라면 먹고 싶어졌어."


오기 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말을 남긴 그녀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정신을 반쯤 놓은 진혁은 자신이 들은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시킨 데로 씻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컵라면을 챙겼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옆방 문을 두드린 진혁을 맞이한 건 목욕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이럴 땐 일찍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짝 늦게 와야지."


아직 물기가 남아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녀가 말했다.


"아..."


"일단 들어와."


여자는 진혁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좀 쉬고 있어. 많이 걸어서 피곤하지?

난 머리만 말리고 올게."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티테이블에 컵라면을 내려놓고 그 옆 의자에 앉았다.


그 상태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맡은 후에야 정신을 차린 진혁이었다.


찰칵-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진혁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하얀 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호텔에서 지급하는 하얀색 목욕 가운만 입고 나온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진혁을 향해 침대에 걸터앉아 목덜미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이 머리카락을 위로 가볍게 쳐올릴 때마다

살짝 부불어 올랐다가 흩어지며 떨어지는 검은 실타래들이

그것을 지켜보는 남자의 가슴에 묘한 파동을 만들었다.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돌리며 머리카락을 완전히 풀어낸 여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혁에게 말했다.


"가져왔어?"


"아, 네. 여기요."


진혁은 그녀에게 컵라면을 내밀었다.


"그거 말고, 라이터."


"라이터... 아! 라이터!"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는

원래 오늘 건네주기로 했던 라이터가 자신의 방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라이터가 오늘 입었던 옷에 있어서... 지금 가져올게요."


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초록색 라이터를 찾아낸 그는

여자의 방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방에서 나왔다.


"앗."


그리고 굳게 닫힌 여자의 방문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드키가 없으면 밖에선 열 수 없는 문에 조각되어 있는 새가

뒷생각 안 하고 뛰쳐나갔던 진혁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난처해하던 진혁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찰칵.


"가져왔어?"


진혁이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네."


"줘."


여자가 조금 열린 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진혁이 그녀의 손에 라이터를 올리자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말했다.


"응, 이제 가 봐."


"네?"


"라이터도 돌려받았고, 하루 일정도 끝났고. 더 할 거 있어?"


"어, 그, 라면 같이 먹자고..."


"가져오라고 했지 같이 먹자고 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아..."


"장난이야. 들어와."


여자가 방문을 완전히 열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여자의 방으로 돌아온 진혁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컵라면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방을 둘러보았다.


"왜?"


"컵라면이 안 보여서요."


"내가 치웠어."


"치웠다고요?"


"응."


의자에 앉은 여자가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라면보단 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넌 배고파?"


"아뇨,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닌데..."


"그럼 앉아. 이야기나 하자."


여자가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쭈뼛쭈뼛, 자리에 앉은 진혁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얀 목욕가운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목둘레를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는 눈길을 말없이 받아주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어?"


"어, 음. 재밌었어요."


"어떤 게?"


"그냥... 같이 다닌 거리도 신선했고 관광지도 많이 돌아다닌 것 같아요."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지.

사실 오늘 돌아다닌 곳들은 밤에 보면 더 예뻐.

다음에 기회 되면 밤에 한 번 둘러봐봐."


"네."


"또 기억나는 건?"


"음... 아, 피자 맛있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나도 거기 정말 좋아해.

피자 자주 먹어?"


비가 온 뒤 모랫바닥을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여자가 자연스럽게 진혁과의 대화를 이끌어갔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천 하나만 입은 여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진혁도

점점 대화에 빠져들면서 나중에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을 했다.


"... 그랬더니 걔가 막 팔을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아하하하!"


진혁이 친구의 흉내를 내며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걸 본 여자가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대화를 하던 도중에 눈이 부시다면서 천장 조명을 끄고 서랍 위에 올려진 무드등을 켠 여자는

객실 냉장고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꺼내 두 사람 사이에 놓고서 잔을 채웠다.

그렇게 도수가 높은 술은 아니었지만 분위기에 취하기에는 충분한 양의 알코올이었기에

두 사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러다가 막, 으악?!"


관객의 성대한 호응에 달아오른 남자가 더욱 크게 몸을 움직이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하하하! 뭐 하는 거야, 정말!"


"하하하하!"


덜컹거리는 의자를 양손으로 붙잡은 그는, 남자의 몸개그에 더욱 크게 웃는 여자를 보고 따라서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두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벌써 마지막 잔이네."


여자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진혁도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부딪혔다.

상큼한 포도향과 잘 마신다는 여자의 칭찬은 진혁에게 그 자체로 훌륭한 안주였다.

간신히 차갑다고 부를 수 있을 온도와 희미하게 남은 청량감을 삼킨 둘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여자가 먼저 조용히 미소 지었고, 진혁도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오늘 낮에 네가 했던 말 기억해?"


"낮에요?"


"너에게 하루는 줄 수 없지만, 하룻밤은 줄 수 있어."


"네?"


실없이 웃던 진혁의 표정이 굳었다.


"되묻는 버릇 고치라고 했지?"


"아, 그, 죄송해요.

근데 지금 뭐라고...?"


여자가 허리춤에 묶인 끈을 위로 잡아당겼다.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나비의 날개가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진 순간,

서로 교차되어있던 그녀의 가운이 힘을 잃고 아래로 살짝 쳐졌다.

아직은 그녀의 몸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약간의 움직임만 주어진다면 틈새가 벌어질 것이었다.


"말 그대로야. 네가 원한다면, 하룻밤은 빌려줄게."


여자의 말이 혼란스럽던 진혁의 감정을 하나로 뭉쳤다.

울컥, 이유 모를 짜증이 솟아난 그는 그대로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뱉었다.


"저는...!"


"화내지 마.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하루를 빌려달라 했는지 아니까."


그의 감정이 다 나오기도 전에 여자가 그것을 끊어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라도 돼. 모르는 게 좋은 거고."


진혁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웃는 듯, 무표정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얼굴에서

감정과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진혁은 너무나도 미숙했다.


애매하게 달아오른 취기가 그의 머리를 안쪽에서부터 쿡쿡 밀어 올렸다.

어지러운 생각과 그 생각조차 흩어버리는 취기가 그를 괴롭혔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진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내가 싫어서 그래?"


약간의 침묵 이후, 여자가 말했다.


"... 누나가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싫어요."


"나랑 자고 싶지 않았어?"


"..."


진혁의 두 손이 천천히 말려들어 갔다.


"솔직히 말해 줘."


"그거랑 이거는 달라요."


"응, 맞아. 다르지.

네가 나한테 가진 호감이랑, 내가 너한테 가진 호감이 다른 것처럼."


"누나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그럼 어떤 사람인 줄 알았는데?"


"... 좀 더 어른스러울 줄 알았어요."


여전히 무표정한 눈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이게 어른스러운 거야.

너처럼 순수한 모습은 이미 다 닮고 닮아서, 무미건조하게 사는 거."


"저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나잖아요."


"그래도 충분히 차이 나지."


"몇 살인데요?"


"스물셋."


여자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진혁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니잖아요."


"응. 아니지."


"저 가지고 노니까 재밌어요?"


"..."


처음으로 여자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이미 비어버린 잔을 잡고 검지로 테두리를 좌우로 쓰다듬었다.


"어쨌든, 이미 난 너한테 라이터를 돌려받았어."


천천히 투명한 유리를 따라 호를 그리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널 빌린 하루는 이미 끝난 거야."


"... 그래서요?"


"선택권을 가진 건 너뿐이라는 거지."


여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방이 조용해졌다.

여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았다.

거품인지 물방울인지 알 수 없는 하얀 점들이 미끄러운 벽에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그보다 약간 아래에는 바닥에 고여버린 투명한 노란색 웅덩이가 전등불을 반사하며 추하게 빛났다.


품고 있던 탄산도 냉기도 모두 잃어버리고

상쾌함은커녕 애매한 미지근함만 간직한 체

말라붙어버리거나 어디론가로 흘러가 버리는 길만 남아버린

그런 잔여물이 남의 빛을 빌려 지저분하게 반짝였다.


"저 처음이에요."


진혁이 말했다.


"누가 마음에 들어서 잘 보이고 싶어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요,

그 사람이랑 같이 돌아다닌 것도 처음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둘이서 술 마시는 것도 처음이고요."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여자는 여전히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를 향해

진혁이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그러니까 못해도 불평하지 마요."


약간의 오기가 담긴 대답을 들은 여자가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