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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방문을 열고 나온 여자가 생긋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도대체 어떤 얼굴로 여자를 봐야 할지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까지도 고민하던 진혁이 무안할 정도로 평온한 인사였다.


"네, 뭐... 누나는요?"


"허리가 아프고 아직도 뭐가 들어있는 느낌이야."


"어..."


"농담이야."


어제 첫 경험을 했음에도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 남자를 놀린 여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근데 있잖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나 기다린 거야?"


"네?"


진혁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우리 오늘은 만나자고 약속 안 했잖아."


"엇."


당연히 오늘도 그녀와 같이 아침을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진혁이 당황했다.


"뭐야, 진짜 나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부터?"


"15분 전부터요..."


"그래?"


여자가 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으응~, 내가 어제보다 5분 늦게 나왔구나?"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다시 진혁을 바라보았다.


"뭐, 이렇게 된 거 아침이나 같이 먹자."


"네!"


여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다시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이번엔 바게트와 크루아상에 햄과 치즈, 과일샐러드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친 여자는 일정한 리듬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기, 누나."


그녀를 바라보던 진혁이 여자를 불렀다.


"응?"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어떤 거?"


"누나 이름이요."


탁.


그녀의 손톱이 탁자와 부딪히며 딱딱한 소리와 함께 멈췄다.


"알아요. 알려주기 싫은 거.

누나가 보기에 제가 부족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도 저는 누나랑 좀 더 잘해보고 싶어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런 거야?"


"모르겠어요. 그치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누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여자가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치가 이어졌다.

진혁은 속으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여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침내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너한테 날 알려주지 않는 거야."


"왜요?"


"네가 상처받을까 봐."


여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는 밝고, 순수하고, 착해.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엄청난 매력이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매력.

그리고 그런 건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릴수록 빨리 사라져.

그러니까..."


"그럼 어제는 왜 그랬는데요?"


진혁이 여자의 말을 자르며 따졌다.


"상처 주기 싫다면서요.

하루 종일 끌고 다니면서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마지막까지 같이 하고선,

이제 와서 상처 주기 싫으니 아무것도 안 알려준다고요?

누나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정말 상처를 안 받을거라고 생각했어요?"


"..."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받은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진혁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해봤자, 그가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행동을 저질렀다.

게다가 중간에 몇 번이나 멈출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그를 더욱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마치 그녀를 잊지 말라는 것처럼.


"... 미안해."


간신히 사과 한 마디를 쥐어 짜낸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주눅 든 모습이 진혁의 마음을 꼬집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질책하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


사과하기 위해 잠깐 입을 벌렸던 진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긴 했지만, 사과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에는 처음으로 본 여자의 약한 모습이 신경 쓰였다.


"... 어제 한 말,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피자 가게에서 했던 말,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계속 거리를 두는 거예요?

누나가 사라져도 제가 찾을 수 없게?"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를 보던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누가 보더라도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음식을 들고 걸어오던 직원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진혁에게 주변 상황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상대만 보이는 그는 테이블을 돌아 그녀의 옆에 섰다.


"나 봐요."


"..."


진혁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여자의 손을 확 잡아 들어올렸다.

강제로 그녀의 손을 편 남자는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렸다.

차가운 감촉을 느낀 여자가 손을 확인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을 주먹 쥐게 하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임진혁, 스무 살, 한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아직도 거기서 살고 있고, 조만간 대학교 기숙사 들어갈 거예요.

부모님은 두 분 다 계시고, 형제자매는 없어요.

믿는 종교는 없고, 취미는 책 읽는 거랑 음악 듣기랑 컴퓨터 게임.

특기라고 할 만한 건 딱히 없어요.

여자 친구는 한 번도 사귄 적 없는데, 원나잇 경험은 한 번 있고요,

그리고 누가 그랬는데, 알기 쉬워서 재밌데요."


자기소개를 마친 진혁이 당황한 채 굳어버린 여자에게 말했다.


"누나는 싫다고 했지만, 전 꼭 누나의 하루를 빌려야겠어요.

어차피 죽을 거면 그 하루 나한테 빌려줘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는 죽고 싶지 않을 때까지, 저한테 매일 하루를 빌려주세요."


말을 마친 그가 여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거두어들인 손을 펴자 오래된 지포 라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 동안 그 라이터를 보던 여자가 다시 진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멋진 어른이 아니야."


"저도 누나가 생각하는 만큼 순진하진 않아요."


"글쎄, 내가 보기엔 충분히 순진한데."


"누나도 제가 보기엔 충분히 어른스러워요."


"어제는 아니라면서."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게 어른이라고 어제 배웠어요."


"후회할 거야. 첫 연애는 평생 기억에 남으니까."


"첫 경험도 평생 기억에 남잖아요."


"그건 그렇지."


여자가 살짝 웃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라이터를 다시 손에 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먹 쥔 손으로 남자의 목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읍!"


갑자기 키스를 당한 남자의 엉거주춤하게 있던 손이 천천히 그녀를 껴안았다.


짝, 짝,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


누군가 박수를 치자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두 사람에게 휘파람과 박수를 보냈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진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상대의 무드가 깨진 걸 알아차린 여자가 그를 놓아주고 물었다.


"부끄러워?"


"네..."


"나도.

10년도 넘게 파리를 오갔는데, 이런 건 처음이네.

그래도 뭔가 영화에 나오는 프랑스 같지 않아?"


살짝 붉어진 귀를 능숙하게 가리면서 여자가 여유 있는 척을 했다.

그녀의 허세에 속아 넘어간 진혁은 여자를 만족시키려면 꽤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 그런데 파리에 10년 넘게 다녔다고요?"


"응."


"누나 진짜 몇 살이에요?"


"스물셋."


"누나..."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자신을 부르는 진혁을 본 여자가 웃었다.


"농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