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돈 주고 사겠다는데 불만인가?"


뚱뚱한 남자가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경매장 가운데에 놓인, 인간 나이로 9~10살쯤 될 법한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노예라면 종족불명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로 유명한 귀족 밀렌이었다.


루테라와 베른힐, 대륙의 동서부에 자리잡은 두 국가는 꼬박 6년 동안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벌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던 와중 베른힐에서 보낸 사신이 국경 지역에서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이 불씨가 된 것이다.


결국 피로 얼룩진 베른힐의 승리로 끝난 전쟁은 죄없는 민간인들에게까지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떠오른 사업이 있으니, 바로 인신매매다. 원래는 음지에서 이루어졌지만 전쟁 기간 동안, 그리고 불과 1달 전에 끝난 지금 황실은 그런 데 신경쓸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남자가 서둘러 경매장을 떠나고 일주일 뒤, 겉보기에는 평범한 상가처럼 보이는 그곳에 비루한 옷차림의 엘프가 찾아왔다. 고향인 대삼림을 떠나 루테라에 살던 그녀는 동생과 함께 끌려왔다 겨우 탈출하여 거리에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었다.


비극은 위기의 순간 언니를 대신해 이목을 끈 동생이 인신매매단에게 잡혀가며 다시 한 번 일어났다. 슬픔과 죄책감에 잠겨 한참을 울부짖던 그녀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동생을 구해내리라 마음먹고, 우연찮게 노예에 집착하기로 유명한 귀족 밀렌이 어린 엘프까지 사들였더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주변에 깔린 경비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동안, 심상치 않은 행렬이 나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경매장이 비로소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밤을 꼬박 지센 엘프는 졸음조차 잊어버리고 경매가 끝날 때까지 나무 뒤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2시간에 걸친 경매가 막을 내리고, 무엇 하나 건지지 못한 귀족들은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역겨운 변태 녀석. 그렇게나 노예가 좋을까?"


"지난번엔 남자도 사 가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해대는 거야?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생긴 꼴 좀 봐."


한참 뒤에야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남자가 철창 안에 든 9명의 노예와 함꼐 나타났다. 다른 이들의 4, 5배가 넘는 가격으로 전부 사들인 여자 노예들은 인간 8명과 하피 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예들을 실은 마차 몇 대가 황급히 숲길로 들어서던 순간, 엘프는 순식간에 길로 뛰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야! 빨리 안 비켜?"


"멈춰 주세요! 밀렌 님께 할 말이 있어요."


"우린 장난칠 때가 아니야. 빨리 비켜!"


"무슨 일이지?"


마부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던 와중, 선두에 있던 마차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와 보름달처럼 둥그런 얼굴, 그리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미소의 남자. 그녀가 그토록 찾던 밀렌 에스더였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네, 당신이 밀렌 에스더죠? 최근에 저 경매장에서 노란 머리의 어린 엘프를 사들인 적 있나요?"


"응. 잠깐. 너 혹시..."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음에도 감정에 복받친 엘프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그 아이, 알레나는 하나뿐인 제 동생이에요. 혹시 아직 살아있다면... 제가 대신 잡혀갈 테니 풀어주세요. 아니, 저라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게요. 몸도 얼마든지 바칠게요. 그러니 제발, 제발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가만히 듣던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에 그녀의 말이 끊겼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밀렌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에는 어쩐지 슬픈 감정이 어려 있었다.


"네 동생은 무사해. 일단 여기 타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기도 전에 엘프는 전력으로 달리는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귀족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히고 훤칠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자 엘프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신은... 마티온 드 빌?"


드 빌 가문은 베른힐 옆에 붙어있는 또다른 국가, 로웬의 거대한 상단의 소유주다. 외동인 마티온은 전쟁이 끝나기 이틀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서 상단을 물려받은 후계자였다. 


"왜 여기에..."


아직도 얼굴에 부자연스런 미소를 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상단은 전쟁 중인 국가들에게 많은 물자를 팔며 특수를 누렸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계속되면 이득이라 생각한 마티온은 어느 날 부모와 생이별하여 노예로 팔린 여자아이를 길가에서 봤다.


기껏해야 12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를 지나칠 수 없던 마티온은 그녀를 즉시 사들여 정성껏 돌봐주었고, 대규모 인신매매의 실체를 알게 된 이후로 죄책감에 빠졌다. 자신과 상단도 어쨌거나 전쟁에 큰 기여를 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는 슬픔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했다. 이유야 어쨌건 대규모로 노예를 사들인다면 평판이나 황제의 시선이 나빠질 것이 뻔했기에, 그는 지인인 마녀에게 부탁하여 일시적으로 외모를 바꾸는 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서류를 위조하여 가짜 이름과 신분증, 거주지도 만들고 목소리와 미소까지 탐욕스러운 변태 귀족을 연기하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원칙상 대리인은 참가할 수 없으며 본인도 직접 가서 경매장의 실태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옆 나라에서 몰래 사들인 노예만 50명이 넘어갔고, 몇몇은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나절 동안 지름길을 달린 끝에 마티온의 저택에 도착한 엘프는 깨끗이 씻겨진 채 어느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노크와 함꼐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나타났다.


"언니..."


"알레나..!"


일주일 동안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동생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졌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두 자매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하녀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티온도 연기하며 억지웃을을 짓느라 근육이 굳어버린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몇 번이나 감사해하는 엘프를 꼭 안아주며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비록 오늘처럼 변장하는 게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한 달 뒤 두 엘프는 수소문 끝에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외모까지 바꿔가며 추악한 귀족인 척 연기하는 주인공 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