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분 뒤에 죽어야 했다

그것도 여러 사람한테 집단폭행을 당하다가 쇼크로 죽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때려치고 식당에서 점심이나 먹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죽지 않으면 앞으로의 미래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대로 흘러가지 않을테니 말이다


인류멸종 막는다고 앞으로 뼈빠지게 몇십년을 구를 게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깔끔하게 한번 죽는 것이 좋았다


참 개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진짜. 모처럼 외국에 왔는데 이게 뭐냐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이탈리아의 어느 빈민촌.

몬스터를 막을 수 있는 방벽 안에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치안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정말 구석탱이에 있는 데다가 그 규모도 작아서 관광객들이 잘 찾아오지도 못하는 이 좆같은 타지.


이런 곳에서 내가 거지차림으로 죽을 준비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앞으로 5분 뒤면 이곳에 봉사활동을 하러 올 사제, 안젤리카.

미래에 성녀라고 불릴 그녀의 힘을 깨우는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하... 왜 이딴 일로 힘을 각성하냐고 진짜."


성녀, 안젤리카

그녀는 어렸을때 한 거지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용돈을 남몰래 준 적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좋게좋게 끝날 일. 

하지만 이 일은 이후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트라우마이자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돈을 받은 거지 아이가 5분도 안되서 시체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때가 바로 안젤리카가 처음으로 이 세상의 악의와 모순, 그리고 인간의 추악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며 그녀가 강력한 빛의 힘을 각성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그녀의 이야기

하지만 아직 현실이 된 건 아니다.


이제부터 내가 그 미래를 만들어야 했다. 쳐맞아 죽는 거지 아이가 됨으로써 말이다


"하... 성녀 만나서, 돈 받고, 5분 뒤에 쓰레기들한테 쳐맞아 죽는다. 좋아 개같이 완벽한 계획이네."


계획은 싫을 정도로 완벽했다


성녀가 오고 가는 시각.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아이를 패죽이는 쓰레기들

그리고 쳐맞아 죽을 장소


이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세팅은 되어 있고 이제 거기서 엑스트라의 역할을 맡을 배우로 내가 들어가는 거라고 해야하나?


뭐 크게 뭘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2분.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네"


거지차림은 완벽하게 된 상태.

다만 지금 나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은 아이가 아니라 30대 아저씨라는 거다


돈을 받는 것까지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어른의 모습으로는 그 쓰레기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뭐 사실 바로 해결될 일이었다


"연령조작 - 9세"


연령조작.

내가 이상적인 미래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얻게된 특별한 능력 4개 중 하나


이 능력의 효과는 말 그대로 내 신체나이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으 머리야... 목소리 높아졌네. 키도 작아졌고."


연령조작 발동시 느껴지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나는 변한 신체에 적응하기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연령조작의 유효시간은 17분.


만약 17분안에 이 능력을 해제하지 않는다면 이 능력은 사라지며 난 영원히 이 변한 신체나이로 살아야한다


뭐 어린 몸이기에 최악은 아니겠지만 여러가지 귀찮은 일이 일어날테고 무엇보다 아직 나이 속여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17분 안에 일을 전부 끝내야 했다.


'개빡세네.'


하다못해 풀고 바로 다시 발동할 수 있었으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이 능력은 풀고 나면 32분 동안 못 쓴다.


진짜 앞으로도 많이 써먹을 능력인데 왜 이리 하자가 많은 건지

정말 계륵같은 능력이 아닐 수가 없다


"으...적응 끝."


아무튼 머릿속으로 능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스트레칭으로 어느정도 적응을 마친 나는 바로 성녀가 올 예정인 구역을 향해 달려갔다


바라는 이야기를 이루기 위해


.

.

.


"아껴서 써야돼. 알았지?"


"아...그...고맙습니다."


"괜찮아. 중간에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가렴."


"네..."


교회의 자선활동 중 하나인 무료배급이 일어나는 어느 광장.


이 넓은 광장에서 나는 어렵지않게 안젤리카와 만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상 아무것도 안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왔지. 이게 그 정해진 운명 그런 건가?'


요소만 갖춰지면 이상적인 미래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안젤리카에게서 돈을 받은 나는 그대로 광장을 빠져나왔다

날 따라오는 쓰레기 5명을 확인하면서


'다행히 잘 따라오는구만.'


안젤리카가 나에게 돈을 준 것은 사실 그렇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물론 14살 먹고도 머리가 조금 꽃밭인 안젤리카가 약간 안일하게 나에게 돈을 준 것은 맞았지만

이 빈민촌은 의외로 사람 죽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나 교회가 사람 죽이는 것에 민감하니 말이다

경범죄나 가벼운 싸움 정도는 있어도 살인은 정말 거의 없었다


특히 아이를 건드리는 일은 한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 얘가 돈 좀 가진다고 문제가 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심지어 내가 받은 돈은 2만원어치도 되지 않은 용돈수준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지금 나를 따라오는 저 쓰레기들에게는 살인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저놈들은 악마 지망생이니까


'뭐 결국 실패하고 추악한 고블린이나 될 놈들이지. 악마가 되는 게 뭐 쉬운 줄 아나."


사람 몇명 죽인 걸로 악마가 될 수 있었으면 진작에 모든 인간이 악마로 변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예의 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이제 쳐맞고 죽을 곳.


그걸 알기라도 하는건지 저 쓰레기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누구세요?"


최대한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녀석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어졌다


그리고 


"저기..대ㅊ - "


퍽!


일방적인 폭력이 시작됐다


.

.

.


'더럽게 아프네.'


3분 후, 나는 예정대로 죽을듯이 쳐맞았다. 그리고 죽었다

쓰레기들은 내가 죽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떠났다. 


아마 내 시체를 유기함으로써 더 큰 악행을 쌓으려는 걸 거다

그 조금 밖에 없는 돈 까지 챙긴 걸 보면 확실하다


'그런다고 악마가 될 줄 아나. 그것도 재능빨인데'


아무튼 나는 시체도 됐겠다 바로 능력을 발동했다


'D-pheonix'


D-pheonix는 내가 가진 능력 중 유일하게 영어명인데 효과는 제일 심플하고 강력했다


하루에 2번, 

자연적인 노화이외의 방법으로 죽을 경우 죽지 않고 부활하는 것.

내가 지금 이렇게 떠드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었다


능력을 발동하자 검붉은 불꽃이 싸늘하게 식은 내 몸을 감싸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은 순식간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몇초 뒤


"아이고 삭신이야."


나는 내가 죽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근처에서 눈을 떴다


"여기는... 아 옆 건물이구나."


디 피닉스의 능력으로 부활할 때는 신체가 순식간에 이동해 원래 죽어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활한다


이것이 내가 쳐맞아 죽는 엑스트라 역할을 할 수 있던 이유였다.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사지멀쩡하게 되살아날 수 있으니까


'아 맞다. 내 시체 준비해야지.'


이번 엑스트라 역할은 성녀가 내 죽은 시체를 봐야 끝이 난다.

그렇기에 나는 3번째 능력을 발동했다


'시체 복사'.


하루에 3번, 과거에 죽은 자신을 똑같이 복사하는 능력.

시체를 남길 일이 많은 엑스트라 일에서 꽤나 유용한 능력이었다


더붙여 연령조작한 상태로 죽은 시체라면 그 모습이 영구적으로 유지되기까지 했다


'대충 1분전 내 죽은 모습'


퐁! 

털썩


능력의 발동이 끝난 후, 아까 내가 죽은 자리에는 내 어린모습과 똑같이 생긴 아이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위화감 거의 없음


아까 내가 쓰러져있던 자세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이정도면 별문제 없을 것이다.


"끝~... 이제 점심이라도 먹을까나."


모든 할 일이 끝났다고 판단한 나는 바로 연령조작을 해제하면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몇분 후


내가 갈아입을 옷을 숨겨둔 장소에 도착했을때쯤 한 소녀의 절규가 울려퍼지며 빈민촌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녀 안젤리카의 비명소리였으며

이번 엑스트라 역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

.

엑스트라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한번 쓰고 버려지는 캐릭터

주연 조연에 비해 별 볼일 없고 제대로 묘사도 안되서 기억에도 안 남는 역할


나는 현재 그런 엑스트라의 역할을 현실에서 열심히 몸을 갈아가며 수행하고 있었다


주인공 가족들 앞에서 목이 잘려죽는 행인부터 시작해

그냥 길을 막는 사람1

근처에서 어떤 일에 대한 소문을 떠드는 헌터3

그리고 이번 성녀 각성 사건의 거지 아이 까지


내가 수행하는 엑스트라의 역할은 중요도나 비중이 매 사건마다 천차만별일 정도로 다양했다.


이렇게 골때리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건 어느 한 소설 때문이었다.


15년전.

 아직 세상에 몬스터 같은 게 나타나지 않았을 무렵에 읽은 한 소설.


그 소설이 설마 미래를 예언하는 책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완결당시 이벤트로 한명한테 추첨으로 작품 설정집을 준다고 했을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재수없게 이벤트에 당첨되지만 않았어도 그 백과사전의 몇배는 큰 설정집이 알려주는 엑스트라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아무튼 그건 그거고.


가만히 있으면 인류멸종이란 것을 알아버렸기에 나는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이 1년간 엑스트라 역할을 잘 수행해왔었다.


그리고 다행히 모든 역할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일의 성공여부는 설정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실패하면 설정집에 적힌 글 중 실패한 일에 영향을 받는 설정이나 사건들에 빨간줄이 그어지기에 알기도 쉬었다.


그래. 실패하면 빨간줄.

그래도 다행히 수습을 한다면 빨간줄이 사라지기는 했다.


근데 만약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답은 [하얀색 글씨로 변한다] 였다.


바로 지금처럼


"씨발...좆됐다."


하얗다. 설정집에 적힌 글이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한 두문장이 아닌 한 페이지 전체가 말이다.


그리고 책의 온갖 곳에는 빨간줄이 그어져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진짜 이게 뭔데!!!!"


나는 재빨리 글자가 흰색으로 변한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 페이지에는 "강유생" 이라는 남자에 대한 것이 적혀있었다.


"하...씨발. 좆됐다."


강유생.

이 세상의 주인공인 이유라의 선배 헌터로써 초반에 활약하는 비중은 적지만 임팩트가 큰 조연이다


이유라가 막 신입헌터가 됐을 때 같이 임무를 수행하며 여러가지 요령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멘토이자 동료로 활동하게 되지만


그리즐리 아머베어 토벌 작전 중 홀로 고립된 이유라를 구출하다가 희생되는 그런 캐릭터.


"아니 시팔. 얘는 왜 뒤져있는 거냐고!!!"


지금 강유생의 모든 정보가 흰색글로 표시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갔다.


아마 며칠전 강유생의 [트라우마가 될 예정인 사건]에서 그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은 것일 테지.

내가 제때 엑스트라 역할을 못해기 때문에.


'망할 혹사나 했는데


나는 강유생 트라우마 사건의 엑스트라 역할을 포기했었다.


그의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이 성녀, 안젤리카의 각성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트라우마 사건과 달리

성녀의 각성이 일어나는 장소는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망할 몬스터가 득실대서 국가간 교류도 힘든 이 세상에서 하루 안에 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나는 강유생의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의 엑스트라 역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도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내가 필요한 엑스트라 역할을 안 한다고 해서 이렇게 꼭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역할을 담당할 엑스트라가 반드시 있지는 않기 때문이니까


내가 맡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아예 그런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문제없이 사건이 잘만 진행된 적도 꽤 있었다


특히 그 역할이 무슨 주연 앞에서 죽는 것도 아닌 그냥 [화장실 한칸을 차지하는 똥사는 사람] 같은 정말 사소한 일이면 더욱이 안해도 괜찮은 일이었는데...


"아니 화장실에서 똥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길래... 씨발."


아무래도 [화장실 칸 하나 차지하는 인간]이라는 역할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어쩌지?"


그가 없으면 이 세상의 주인공 이유라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더 나은 방향일 수도 있지만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일인데 운에 맡길 수 있을 리가.


이미 그 설정집과 소설을 통해 미래의 정답지를 알고 있는데 그 정답지를 버릴 이유는 없었다


"하...망할. 강유생 역할을 내가 대신할 수 밖에 없겠네."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엄청난 오류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강유생 역할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비중은 엑스트라나 다름없지만 임팩트가 있는 조연.

게다가 이번에 대신해야할 것은 잠깐이 아닌 못해도 5년이상의 타인.


이 갑자기 개같이 오른 엑스트라 난이도에 나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순조로웠는데

그놈의 똥사는 사람이 뭐가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망할 가을이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