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해야 할 가을 밤은 군중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후끈후끈했다.

지난 십 년 동안 스파이를 심고, 동조할 이들을 모으고, 철저하게 준비하던 마왕의 계략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다.


연회로 떠들썩하던 황궁은 순식간에 들어닥친 마족과 인간들에게 점거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용사들이 결사항전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온 나라가 마왕의 손에 떨어졌고, 황제와 황후는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저기, 꼬마야!"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나자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악마들은 비교적 흔한 광경이 되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소년이 뒤쫓아오는 서큐버스로부터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서큐버스에게 잡히면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될 때까지 정기를 훕수한다고 들었으니까.


겨우 따돌렸나 싶었을 때 펄럭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박쥐 같은 날개를 펼친 서큐버스가 내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오, 오지...!"


"너 지갑 떨어뜨렸어."


그녀가 내민 손에는 부모님께서 선물해 주신,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지갑이 들려 있었다.


"주워주려고 한 건데, 부르니까 갑자기 도망가버리더라."


"아.. 고맙습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지 못할 동안 서큐버스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겁먹게 해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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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점에서 일하는 소녀, 나디아입니다. 마왕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허리를 휘게 하던 세금은 절반 정도로 줄었습니다. 더 이상 귀족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가게에는 낯선 손님이 와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강철 투구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음장 같은 한기가 느껴지는 언데드 기사입니다.


단번에 모두의 시선을 받은 기사는 태연하게 뚜벅뚜벅 걸어가 제가 있는 카운터로 왔습니다. 그 섬찟한 시선에 몸이 한 발짝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저기.. 요즘 아이들은 무슨 책을 좋아하나요?"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물음이었습니다.


"네?"


"7살짜리 친구 딸에게 생일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한 권 추천해주실 수 있습니까?


"여자아이라고 하셨죠? '백설 공주'는 어떠신가요?"


2m도 넘는 덩치의 기사는 부끄러운 듯 손을 꼼지락거렸습니다. 저는 해맑게 웃으며 아동용 서적이 꽂힌 곳으로 그를 안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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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집권한 뒤로 우리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성검과 무구를 포함해 위협이 될 만한 장비를 모두 압수당한 용사들은 씁쓸한 마음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었다.


"로렌 성녀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고향 아리우스에 있는 낡디낡은 성당.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함께 다니며 성녀의 꿈을 기르던 곳이지만, 시골에 있는 탓에 보수공사 한 번 받지 못했다.

나는 그 동안 모아온 돈과 마왕에게 받은 치료비를 포함한 보수금으로 이곳을 새로 짓고자 했다.


해가 뉘역뉘역 지는 저녁, 방금 도착한 집 앞에는 뜻밖의 악마가 서 있었다.


"잘 계셨습니까? 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마왕, 우리와 직접 싸웠던 마왕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대로 물려받은 집은 변함없이 포근한 분위기를 뽐냈다. 나는 수수한 평상복 차림의 마왕에게 허브티를 따라주었다.


"이 마을에 있는 낡은 성당 말입니다. 성녀님이 다니신다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악마에게 빛을 섬기는 우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황실에서 다른 종교를 일절 배척하던 것처럼 성당을 허물라는 거겠지.


"괜찮으시다면 새로 지으려고 합니다."


"네..?"


제 손으로 상처입힌 용사의 일원이 다니는 곳이고, 아직 뒤숭숭한 민심을 잡으려는 이유였다. 마왕은 여러 성당의 모습이 담긴 카탈로그를 건네었다.ㅍ


"변변찮지만 이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양식이 있습니까?"


모두가 알던 대로 제국은 마왕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어쩌면, 달라진 세상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