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해도 좋아. 네 꿈이었으니."

'.....'


"하지만, 이건 내 꿈이기도 했다."

'......'


"날 죽이고 갈 거냐?"


데네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황색 주계열성의 빛이 데네브를 휩쓸고 지나갔다.


"우주선 개방 카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

'.....'


물론. 혼자서 우주에 나가봐야 순식간에 우주 먼지가 되겠지만.


이제 내 목에는 거대한 현상금이 걸릴 것이다. 

내가 만져 본 푼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그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악질적인 테러범에게 붙는 현상금.


나랑 계속 붙어 있는 것도 자살이나 다름없기에, 떠나도 좋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함장실로 돌아오니 거대한 심연이 조종석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통과하려면 며칠은 걸리겠지? 잠깐 생각을 좀 정리해 볼까.




난 방금 레이븐 공작가를 부쉈다.

그것도 행성째로.


정상인이라면 '레이븐' 이라는 이름과 악연을 맺을 생각조차 못 할 거다.

난, 태어날 때부터 악연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난 처음에는 일식인 줄 알았지 뭐니." 어머니가 말했다. 


"그 전까지 일식 한 번도 못 보셨어요?"


"난 다 비슷한 건 줄 알았지. 일식은 이렇게, 초승달 모양으로 가려지는데, 그때는 고리 모양으로 중심부터 서서히 작아졌으니까."


"언제쯤 다시 태양이 켜질까요?"


"모르지."


밖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우리 가족은, 잠을 자거나,


식사 준비로 사냥한 동물을 굽거나,


제1, 2 연소 마법으로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으거나,


오래 전, 태양이 떠 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듣거나 했다. 다른 일은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13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폐렴으로.


이제 우리 가족에, 열대 우림 속 나무 집이나, 과일이 열리는 나무나, 풀을 뜯는 말과 염소나, 태양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엄마의 빈 자리는 빠르게 메워졌다.


동생이 마법 배우는 걸 포기하고, 활을 연습하며 식량을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라도 쉬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이 불안정한 생활은 당분간 이어졌다.


'스캐빈저' 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먹을 음식과 불을 교환하자며, 대뜸 통조림을 가져왔다. 목소리에서는 기계음이 났다.


집의 불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연료가 얼마 없다고 했다.


그들은 이상한, 작은 돌을 꺼내, 동생에게 건네 주었다.


"불을 붙여 봐."


"못 해요. 전 궁수라... 저희 형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형. 붙여봐."


어떻게 하더라... 돌에 불을 붙이는 건....이건 무슨 돌이지?


"파이로자이트 원석이야. 머리가 좋은 놈들은 여기다 불을 붙이더군."

음...제 3연소마법을 써 볼까? 주문을 외우고, 돌을 붙잡고, 이 돌이 석탄처럼 타오르는 상상을 한다.


"오오...."

돌에서는 서서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푸른색을 띠던 결정은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찾은 거 같지?' '찾은 거 같아'. 하고 눈짓을 하고는,


"오오, 고마워, 소년. 이건 보답이야." 그들의 손에서 보라색 결정을 건네받았다.


"이게 뭔데요?"


"그건.... 그건 말이지,"

"널 우리 우주선에 데려갈 물건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온몸이 짜릿하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


냄새나는 파이프가 가득한 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목과 발목에는 수갑이 끼워져 있었다.


"정신이 드나? 여기는 우리 우주선이다. 앞으로 네 집이 될 곳이지. 오늘부터 네가 할 일을 안내해 주마. 따라와라."


그러고는 방독면을 쓴 남자는 내 머리에 권총을 가져다 대며, 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제대로 인수인계 받도록 해." 커다란 잠금과 자물쇠 여러 개가 달린 문. 여기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제 동생은요?"


그 남자는 순간 멈칫하더니, 날 복도의 벽에 밀치고는, 내 겨드랑이에 권총을 끼우고 쏘기 시작했다.


타앙-! "부들부들 떨리냐? 이 좆만아."


타앙-! "오줌이라도 싸지 그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마법이 써지지 않았다.


타앙-! "뭐, 동생? 게이 선원들 자지빨이로 안 만든 게 용하다. 이 병신새끼야."


타앙, 타앙-! "잊어버려, 상황 파악을 잘 해야 오래 살아남는다. 알았냐?" 

철컥.


"네...."

"좋아."


그 남자가 방문을 열자, 방 안에 누워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의 반은 화상 흉터로 덮여 있었다.


반대쪽 눈은 아름다웠지만,

마치 물 먹은 다이아몬드처럼 초점이 없었다.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찰랑거리는 금발은 그녀가 얼마나 웅장한 축복 속에 싸여 있던 사람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인사해라. 네가 그토록 찾던 네 후임이다."


"아.........?

아.........내 후임........."


"안녕하세요."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러더니 그 여자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평생 듣도보도 못한 욕. 귀족어인가?

확실한 건, 그녀는 지금 내게 "꺼져, 꺼져." 하는 경고를 내고 있었다.


"아...씨...시끄럽게, 개같은 년이......"

그 남자는 여자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여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맞고만 있었다.

"야. 야. 미친년아. 조용히 안 해? 지가 후임 데려다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지랄이야? 그냥 푹 잠이나 자라."


그러고는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주사기를 꺼냈다.


"잠깐만요!"


"왜?"


"그건....그건 놓지 마세요."


"응?......

.....

크하하하학! 하하하학.... 아주 신사분 나셨네 그래. 미안한데 너희 선배님도 이걸 간절히 원하고 있을걸? 안 그렇냐, 불쟁아?"

"......."


"마법만 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주사를 놓지 말아 주세요."


"크흐흐....그러던지 뭐. 자, 그러면 순정남이랑 알아서 잘 해 보시죠. 선배 불쟁이님."


수갑을 잡고,

"야. 신입. 마취제 하나 아끼는 대가로 풀어주는 거다. 허튼 수작이라도 부리면 그냥 뒤지는 거야.

저년 얼굴 보이지? 저번에 지 분수도 모르고,

불꽃놀이를 하고 싶다니, 집으로 보내 달라니 하면서 탈출하겠다고 설치다가 저렇게 됐어.

방금 내 말 기억하지? 오래 살아남으려면?"


"....상황 파악을 잘 해야 한다."


"그렇지."


그 남자는 수갑을 풀고, 방을 나갔다.



"한 번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깐 손 내밀어 보시겠어요?"

방금 전과는 다르게,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어쩌면 체념한 듯 내게 손을 건넨다.


그녀의 맥박을 짚는다. 가녀린 손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한 산맥이 두근거린다.

이 맥박이 사랑에 빠진 맥박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치유 마법을 쓰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그럼 네가 아프잖아."


"힘 닿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마취제를 못 놓게 한 건 저니까요."


여자는 누더기를 벗는다.

"아뇨, 아니요. 옷 안 벗으셔도 돼요."


".....괜찮으신지는 왜 물어본 거야?"


"그....치유 마법은 쓰기 전에 항상 상대방 동의를 받아야 해요. 양 손만 맞잡으시면 됩니다."

".....고마워." 살짝 웃었다. "여기서는 안 그래도 돼."


양 손을 잡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이 여자의 병마가 내 안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심장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온몸에 절망적인 북소리가 울려퍼진다.

혈관 속에서 피가 내보내 줘. 내보내 줘. 하며 비명을 지른다.

허파가 미친 듯이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한다. 이 여자는 지금껏 무엇과 싸우고 있었던 거지?


".....미안해. 많이 아프지?"

"괜찮습니다..."


삐- 하는 소리가 세상을 찢어 놓는다. 머릿속에서 나방들이 날아다닌다. 

깨질 거 같아. 부서질 거 같아.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고통은 파도가 부서지듯 잠잠해졌다.


"......고마워....."


"괜찮습니다. 혹시 다른 침대가 있는지..."

"내 침대 써도 돼."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리에 눕고 싶었다.


"그동안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응....너, 마법사야?"


"네."


"그렇구나...나는....불꽃놀이 마법밖에 모르는데....내가 너한테 뭘 가르쳐야 될지...."


"불꽃놀이요?"


"응. 그....왜...엔 파이로...하면서 시작하는 마법이야."


"아. 제 3 연소마법 말씀이세요?"


"아......글쎄? 너희는 제 3 연소마법이라 부르니? 그걸 파이로자이트에다 붙이면, 불이 붙어....

매일마다 밖에서 사람들이 파이로자이트를 가져다 주면...우리 일은 거기다 불을 붙여서 저기, 엔진실로 가는 배출구에다 집어넣는 거야."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나...나도 침대 쓸게. 조금만 옆으로...그렇지. 미안..."


"좀 편해지셨나요?"


"응. 머리 완전 개운해....열도 안 나고. 팔도 안 떨려."

"다행이네요."


가까웠다. 그녀의 날숨이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는 방향으로 돌아 누웠다.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가린다.

"그.....미안. 보기 싫지? 예전에 탈출을 해 보려다가. 불을 잘못 붙여서 얼굴에 화상 자국이 남았어. 남자들도 나 보고는 인상을 쓰더라."


"여기 남자들 싹 다 게이인 거 같아요. 제가 봤을 땐."


"에?"


"아녜요.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숨결을 자장가 삼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으으...아침이네."


"여기에다 불을 붙이면 되는 거죠?"


"응. 그...여기 들어왔다는 건 불꽃놀이 마법을 알고 있다는 거지? 따로 설명해 줄까?"


"아뇨. 주문은 알아요.

계속 불꽃놀이 마법이라 부르시네요."


"아....그...제 3 연소마법..."

"불꽃놀이라고 하죠.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


몇 시간에 걸친 지루한 작업이 끝났다.


"하아...오늘은 빨리 끝났네. 둘이라 그런가 봐."


"헉... 허어....이게 빨리 끝난 거면.... 평상시에는요?"


"그래서 마취제 맞고 잠들었다 일어났답니다."

"아."


"있잖아. 우리. 별 보러 갈래?"


"여기 별도 보게 해 줘요?"


"아니. 감시가 허술한 쪽이 있어. 할당량을 채웠으니까 몰래 빠져나가도 신경 안 쓸 거야."



큰 문의 자물쇠를 풀고, 좌우를 살피고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나,


담배 냄새 나는 선원실을 지나,


아주 작은, 작은 유리창이 있는 화장실로.


".....여기에요?"


"여기서 거대한 천문대를 바란 건 아니지?"


"그렇긴 해도...."


"이리 와 봐. 한 번 밖을 내다보렴."



오랜만에 보는 별. 고향에서도 보지 못했던 밤하늘.

끝없는 별들이 마치 가루처럼 세상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


"예쁘지?"


"네...."


"매일 일만 하다가 가끔 여기 올 짬이 나면.... 나는 여기 와."


"......"


"너, 이름이 뭐야?"

"네?" 나는 방독면이 내게 건네 준 신분증을 꺼냈다. "아니, 그 이름 말고. 진짜 이름."


"진짜 이름...."

고향에서도 아들, 아니면 형. 이라고만 불렸으니까. 딱히 이름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그....저는. 이름이 없어요."


".....그러면, 그 2404 어쩌고 하는 이름이 네 첫 이름이야?"


"그렇게 됐네요."


"알타이르."


"네?"


"예전에. 하늘에 떠 있던 밝은 별 이름이야. 지금이야 뭐 우주 시대니까... 앞으로 네 이름이야."

"....."


"선배님 이름은."


"베가."


베가. 난 그 이름을 오랫동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같이 볼래?"


"같이요?"


"응. 이리 와 봐."


베가는 나를 끌어당겨, 얼굴이 맞닿았다. 내 왼눈과 베가의 오른눈. 두 눈이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꼭 어젯밤 꾸었던 꿈 같았다.


베가의 숨결과 내 숨결이 섞이고 있었다.


세상엔 별들도 많았고, 그리고...


"......"

"......"


지금이라면 더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을지도.


우리 둘은 어느새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



긴 입맞춤.





저 별빛이 칼같이 날아온다 해도. 지금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으리라.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떤 날은 설탕같이 달콤했고, 어떤 날은 석탄같이 칙칙했다.

그녀를 2401이 아니라 베가라고 부르는 게 즐거웠던 날도,

치유를 걸었을 때 고통이 흘러오지 않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날도,

두 손바닥만한 유리창으로 별을 바라보던 날도 하루, 이틀 속에서 지나갔다.


"스캐빈저는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우주선 타고 다니는 사람들."


"그냥 무법자들이지. 뭐. 가끔씩 높은 사람들의 의뢰를 받기도 하고."


"높은 사람들이라면?"


"왜. 알 만한 사람들 있잖아. 유티 후작가. 메이워스 후작가. 그래, 레이븐 공작가."


"베가 씨도 귀족이었어요?"


"응. 나는 그냥 하위 귀족. 아버지가 작은 행성의 남작이셨어."


"...귀족으로 살 때, 기억나요?"


"너무 어릴 때라.

아, 그때 기억나....예전에, 아버지랑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갔었는데, 정말 예뻤어...

아빠가 주문을 외우니까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라서, 하늘 위에서 터지면서 별처럼 보였어."


"그랬군요."


.....

"넌 어디 출신이야?"


"아, 저는 그, JBNPIA-18 행성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냥 이제 얼음 행성이에요."

"어. 거기."


"아세요?"


"응. 알지....아. 레이븐 공작가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


"네? 무슨 일이..."


"개인적인 상처를 들춰냈다면 미안해. 아니, 몰라? 레이븐 가문?"


"네...전혀?"


"거기, 예전에 레이븐 가문에서 손수 멸망시킨 곳이야."


네?


"아니에요. 거기, 태양이 꺼져서 멸망한 행성이에요. 얼음 행성으로 변하기 전에는 사람 사는 곳이었어요."


"태양이 꺼지는 거 말야...봤어?"


"얘기는 들었어요. 일식처럼 꺼지는 게 아니라. 고리 모양으로 해가 꺼졌다고."


"그거 말야.... 사실,

레이븐 공작가에서, 태양광 장비 설치하겠다고, 태양을 가린 거야.

그 행성에서 이제 더 이상 금이 안 나오니까.... 멸망시켜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나 봐."


"아....하하.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천재지변이었어요. 엄마와 가족사진으로만 본 아빠는, 내 동생은, 부자의 변심 따위로 죽은 게 아니에요.


"슬프게도 사실이야.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여기 그때 당시 사진이랑, 뉴스 기사 내가 스크랩해 둔 거 있어."


나는 광인처럼 그 뉴스를 뒤졌다. 사진을 보았다. 고리 모양. 정말로 태양이 고리 모양으로, 중심부터 검어지고 있었다.


항성의 근처에서 찍은 사진을 봤다. 사각형 태양광 판이 조립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뉴스 기사는 전 우주 최대 규모, 최초로 항성을 완전히 뒤덮은 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날, 많이 토했다.


소리를 지르다,


쓰러지고,


토하다가,


쓰러지고,


미친놈처럼 일어섰다, 앉았다가, 쓰러지고, 벽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바닥에 머리를 찧다가, 쳐맞다가 마취제를 맞고 쓰러졌다.


분을 삭인 지 하루, 이틀...


감정에는 차츰 평온이 자리잡았다. 분노와 평온이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알까? 거센 분노는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미안해...괜히 얘기한 거 같네."

"....."


"이 배 전체가 레이븐 공작가의 계약 수주 여부에 달려 있어. 제일 큰 고객이라서, 함장도 각별히 신경쓰나 봐.

여기 탄 사람들, 그러니까 너나 나나 포함해서...대부분은 끌려온 사람들이지만."


---------------------------------------------------------


1년이 조용하게 지났다.


베가는 1년이 된 기념으로, 별을 보러 가자고 말했다.


그때와 똑같이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다 베가가,


"있지, 불꽃놀이 마법 말야....공중으로 쏴 본 적 있어?"


"아뇨. 여기서 보여주시기에는, 너무 좁지 않아요?"


"그러면 말이야, 거기 가자. 방에 붙어 있는 비상탈출선. 거기는 밖으로 분사할 수 있는 곳 있으니까."


2인용으로 만들어진 비상탈출선.


베가는 내게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불꽃놀이의 모양을 보여 주었다.


별 모양, 민들레? 모양, 하트 모양....


"있지. 알타이르. 나는 말야.....너한테 제일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어."


"고마워요."


"아냐. 고마워할 것 없어. 나도 여자니까....

매일 밤에, 네가 먼저 잠들면 가끔 생각하곤 해. 


알타이르는 뭘 좋아할까?


알타이르는 뭘 예쁘다 할까?


그리고...


알타이르는, 어떻게 하면 날 예쁘다 할까?"


베가의 얼굴이, 빨개졌다. 


"있지, 알타이르. 나는....


혼자였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아니, 혼자였을 때에는 좋았던 순간이 없었어. 지금은 매일매일이 좋아.


예전에, 네가 처음 내 방에 왔을 때....난 이제 죽고 네가 날 대체할 줄 알았어.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때 막....


예쁘지 못한 말을 하고....


그....


미안해...."


베가의 눈에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흑...흐으윽....흐으으으앙....


미안해. 알타이르...."


베가는 어떻게든 눈물을 그치려 하고 있었다.


지금 미안하다는 말은 딱히 어울리는 말이 아니겠지.


"그, 나는....얼굴도 흉하고...


알타이르한테.... 첫인상이 나쁠 거라고 생각했어...


알타이르는 처음 본 날 나를 행복하게 해 줬는데...

나는...


그래도...

그래도...

알타이르....


나 말야....


진짜...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고백을.... 받아주시겠어요?"


베가는 스스로의 고백이 최악의 고백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랑고백이 아니라, 고해가 아닌지, 첫인상이 나쁜 이유를 해명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베가."


"응?"


"그때 처음 만났던 날.

몸이 부서질 것 같았던 날 말야."

"...응."


"난 매일매일 그날로 돌아가야 한다면 말야,

그렇게 하겠어."


"그만큼 사랑해. 베가. 진심이야. 그리고 말야.

매일매일 나한테 예쁜 얼굴을 보여줘서, 고마워."


지금, 우리 둘은 가장 예쁜 꿈을 함께 꾸고 있는 걸지도.


베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긴 입맞춤.


우리는 비상탈출선을 벗어나, 방의 침대로 돌아왔다. 베가와 누더기같은 옷을 입고 함께 매일을 누운 그 침대.


그날 서로의 옷은 우리 사이를 막지 못했다.

밤은 유난히 길고도, 짧았다.

서로의 불규칙적인 호흡을 번갈아 쉬며, 베가와 나는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사랑하고 있었다.


---------------------------------------------------


데네브가 태어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이름 짓는 건 베가가 잘 하니까, 딸아이의 이름은 데네브로 하기로 했다.

베가를 똑 닮은 아이였다.


베가는 가끔, 데네브의 얼굴을 꼭 붙잡고, 그대로 응시하곤 했다.

어쩌면 나에게 자신의 '예뻤던 시절' 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뻐하는 듯 했다.


데네브에게 아빠와 엄마의 내력은 철저히 숨겼다.


스캐빈저호 안에는 이상한 기류가 퍼지고 있었다.

이번 계약 들었어? 들었지. 레이븐 공작가 의뢰라며?

이...이게 다 선수금이야? 계약 완료금 아니고?


의뢰 내용이 뭔데? 아, 문화재 회수? 밀본조 행성에서? 맙소사...그건 거의 강도잖아?

그러니까 우리한테 맡기신 거겠지.

그나저나 밀본조까지 가기는 어떻게 가? 거기 완전 멀잖아.

아, 거기 말야... 가는 길에, 파이로자이트만 잔뜩 쌓여 있는 지대가 있어.

한 번 채굴하면 밀본조까지 갔다 오고 나서도 몇 백 년은 족히 태우는 양이라더라.


따라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배급도 늘었다.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데네브는 아무것도 몰랐다.

레이븐 공작님 완전 부자인가봐~  나도 레이븐 공작님 곁에서 일하고 싶다~ 거릴 뿐이었다.


우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타이르. 당신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응."


"의뢰는 레이븐의 모행성에 우주선이 착륙하는 순간 끝나니까. 그때 불을 붙이겠다는 거지?"


"...."


"난 당신이 가능할 거라고 봐."


"그 후가 문제지. 모든 우주선은 2인용이니까."


"아마 현상금은.....

직접 점화하는 쪽에 더 크게 붙겠지?"


"내가 직접 점화할게. 당신이 데네브를 데리고 떠나."


"....."

"....."


"다시 만나야 한다면, 어디서 만날까?"


"알타이르. 내가 얼마 정도 더 살 거 같아?"


"다시 만날 정도로는."


"...바보야. 정말."


"그러면, 세포라의 행성에서 만나."


"아, 그...레이븐이랑 척을 진 집안 말이지?"


좋은 선택이었다. 레이븐을 부수고 온 사람들을 세포라에서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높은 자리에 오를지도.



계획 당일.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모든 선원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문화재를 지키는 몇 명 빼고.


순찰만 피하면 일은 완벽히 진행될 것이다.


"베가. 준비됐지?"


"응. 문을 열어 줘. 열쇠는 없고, 당신의 마법으로 열릴 거야."


"시작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손끝에 집중한다. 모든 문턱은 열리기 위해서 존재하나니.

그리고 문이 열리고....


온 우주선에 경고음이 울려퍼졌다.


젠장. 자물쇠가 아니라, 이게 진짜 함정이었나? 이제는 별 수가 없어.


"베가, 빨리! 파이로자이트를 찾아!"


"누군가 연료 보관실에 침입했다! 빨리 제거해!"


이제 은신 마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해결책은 보호막 마법.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나와 문을 막아선 보호막에 미친 듯이 기관총을 쏴 댔다.


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불꽃놀이.


우리가 너의 단순 변심으로 죽어야 한다면, 너도 우리의 반항에 죽을 수 있어야지.


파이로자이트에서 곧이어, 엄청난 연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베가! 탈출해!"


그러나, 베가는 이동하지 않았다.


"베가?"


베가.

안돼. 널 놓치고 갈 수는 없어.


베가는, 파이로자이트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응...자기, 나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널 두고 갈 수는 없어."


"데네브...

데네브.... 나랑 정말 똑같이 생긴 아이니까. 걔를 잘 부탁해. 어서 가. 비상탈출선 뺏기기 전에."


무엇일까?


무엇에 홀린 듯,


나는 그대로 베가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는 비상탈출선이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치 초인적인 힘이 솟아나는 듯 했다.


베가. 베가.


널 살려야겠어.


난 너 없이 못 사니까.


우주선은 혼돈의 도가니 속에 빠지기 시작했다. 문화재. 돈. 그 다음으로 우리를 담고 있는 우주선이 세상을 태워 버릴 듯 불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주선은 레이븐의 행성에 충돌하고, 일시적인 충격이 가해져 기폭할 것이다.


"불쟁이 놈들을 잡아라!"


데네브가 타고 있는 우주선에, 베가를 억지로 싣고 문을 닫,


닫히지 않는다. 왜 이러지? 문이....


아, 아까 열쇠 마법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베가. 일어나 봐. 문을 닫아야 해."


"으윽..."


"나 지금 문을 못 닫아. 자기가 닫아 줘야 해."


"알타이르. 우주선 2인용이라니까... 안에 설비도 딱 2인용이야. 2인 장기항해용이라고."


베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탈출선을 빠져나갔다.


"베가! 베가!"


"세포라에서 봐. 건투를 빌어. 자기.

곧 만나게 될 거야."


----------------------------------------------------------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안 떠났구나. 데네브. 장하다."


"아니요. 아빠 말대로라면....그 사람이 우리 집의 원수가 맞으니까...."


"고맙구나. 매일마다 자두 한 알을 배급해 주는 아빠가 아니라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엄마를 찾아주는 아빠는 될 수 있어."


"고마워요. 아빠."


그렇게 우주선은 미지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