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신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명심해라.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세상에서 우연히 탄생한 부산물에 불과하다.

 

신은 우리를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

 

인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미생물과 다름이 없을 테니까.

 

아니어쩌면 그보다도 더 보잘것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호기심에 유혹당하여 스스로를 좀먹고 진리를 탐구하려는 우리 인간과 우주를 탄생시킨 신의 눈높이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탐구는 불요하다.

 

인간은.

 

아니인간을 비롯한 유사 인류 모두가 신에겐 흥미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는 단순한 질량 덩어리다.

 

.”

 

책장을 넘긴다.

 

내가 읽고 있는 건 아카데미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를 듬뿍 빨아먹고 있던 고드릭 연구일지라는 괴상한 서적이었다.

 

내용은 태양신을 믿는 솔라릭스에서 배척당한 어느 배교자의 일지로 채워져 있다.

 

흥미본위로 읽기 시작한 일지 내용은 예상과 다르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허무맹랑.

 

그리고 비관적이기 짝이 없는 내용투성이다.

 

대충 조사해보니학계에선 단순히 신에게 버림받은 광신자의 과대망상이라 치부하더랬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배교자의 종적과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그들도 궁금한 것이다.

 

망상의 출처와 근거는 무엇인지.

 

학자들이 호기심을 표할 정도로 고드릭 에드먼의 일지 내용은 굉장히 정교했다.

 

단순한 망상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사소한 설정 오류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자의 낭만을 자극하듯 배교자고드릭 에드먼은 일지 말미에 이리 적어두었다.

 

탐구에 굶주린 광기의 자식들은 보거라신의 보살핌 없는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우리는 여기서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이 보잘것없는 육지를 떠나 저 바다로저 하늘 너머로창조신께서 빚어낸 우주로!”

 

우리는 하늘 아래라는 좁디좁은 모형 정원의 닫힌 가능성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의심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미래로.”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교수님이 보셨다면 또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며 나무라시겠지.

 

하지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배교자가 말한 대로 신께서 정말로 우리 인간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우리는 어찌 지금까지 견뎌온 걸까?

 

그리고 인류의 끝은 과연 어떨까?

 

 

 

시간이 흐르고.

 

아카데미에서 졸업한 나는 우연히 숲의 신비로운 엘프와 연이 닿아 물었다.

 

인간의 미래?”

 

내 질문에 엘프가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 인간이 엘프에게 인간의 미래를 묻는 것만큼 우스운 질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좋아이참에 무지몽매한 인간 한 명을 계몽시켜준다고 쳐두지.”

 

태도가 조금 건방지긴 했지만엘프란 원래 그런 종족이니 그러려니 했다.

 

너희 인간은 생산성이 없어소모할 줄밖에 모르고 탐욕은 마수 마냥 끝도 없지.”

 

?

 

끝내 멸망을 자초할 족속들이다.”

 

언사가 조금 과격하지만나는 그녀에게 매우 동의했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내가 가장 몰두했던 건 과거를 통해 역산한 미래 시뮬레이트였다.

 

공교롭게도.

 

나와 교수님들이 피땀을 흘려가며 만들고 구성한 시뮬레이트의 끝은 항상 인간의 자멸이었다.

 

그래서 나는 엘프의 생산성에 관해서 물었다.

 

우리 말이더냐?”

 

엘프가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엘프는 모두 죽어서 자연으로 환원된다그 솔 뭐시기 가짜 신을 섬기는 녀석들과 다르지몸과 영혼 모두가 우리를 빚어낸 자연으로 돌아간다그뿐이다.”

 

엘프는 종교를 믿지 않았다.

 

맨날 종교 때문에 싸우는 제국과 성국을 생각하면 나는 저들이 살짝 부러웠다.

 

 

 

인간 도시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건 역시 인간과 드워프일 것이다.

 

드워프들의 손재주는 보통이 아니다천부적이다.

 

종족 단위로 이토록 손재주가 뛰어난 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역시 종족도 혈통의 일종인가?

 

부럽다.

 

덥수룩한 수염과 짜리몽땅한 키는 별로지만.

 

우연히.

 

나는 도시 발전 프로젝트에서 책임자 위치에 있는 드워프 기술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엘프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미래?”

 

나는 그에게 엘프는 인간이 자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말했다.

 

그가 수염을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뭐어, 재수 없는 년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군. 세상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으니까.”


그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쪽도 아카데미 졸업생 나부랭이면 농사를 하면 지력이 소모되는 건 알고 있겠지?”

 

나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다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대지에 자원은 무진장 많다.”

 

드워프 치프가 표현한 무진장이라는 건진짜 말 그대로 무진장 많다는 뜻이다.

 

드래곤도 평생 다 못 쓸 적재량이지.”

 

드래곤의 평균 수명은 하늘을 나는 파충류답게 대충 천 살 정도 되던 걸로 기억한다.

 

녀석들도 평생 다 못 쓴다고 하니 새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부유한지 느껴진다.

 

게다가 앞으로 우리 기술이 앞으로 더 발전하면 그동안 다룰 수 없었던 자원을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모그나이트 원석처럼?

 

그래.”


치프가 10년 전 대발견을 회상하며 큭큭 웃었다.

 

예전엔 모그나이트 원석을 단순히 시퍼런 돌멩이로 치부했지만지금은 달라.”

 

고향에서 구슬치기 놀이로나 써먹던 돌멩이에 설마 그러한 가치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그나이트 원석.

 

발전된 드워프 기술로 정제한 뒤마력을 불어넣으면 온갖 중장비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마법 동력원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또한 무한하지 않지모그나이트 원석을 써먹겠다고 네라 왕국이 무리한 개발을 추진하다가 드래곤에게 썰린 건 기억하나?”

 

모그나이트 기술의 선두주자로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며 국토를 확장하다 드래곤 네스트를 건드린 머저리들이라면 당연히 기억한다.

 

그와 같은 일이 앞으로도 반복될 거다.”

 

기술은 발전한다.

 

지금 병기는 드래곤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에 그치고 있지만훗날엔 모른다.

 

인류가 도마뱀의 역린을 뚫고 그 모가지를 떨구는 일도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거다.”

 

인류가?

 

뭘 그리 신기하게 바라보나욕망의 탐구자.”

 

욕망의 탐구자.

 

나도 모르는 사이 쪽팔리면서도 근사한 것 같은 별칭이 생겼다.

 

드워프의 손재주는 신기할 정도로 대단하지이를 다루기 위한 발상도 마찬가지야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없으면 모그나이트 기술을 비롯한 드워프 산업이 이토록 빠르게 발전할 수 없었을 거라며 치프가 덧붙였다.

 

뭐어그런 의미에서 그 막대기 년들 말이 얼추 맞기는 해.”

 

지금이 순간에도 드워프들은 땅을 파고 있다.

 

발견의 짜릿함을 그들은 이해하고 있다.

 

다시 느끼기 위해서.

 

인간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은 뭐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미지의 지하세계로 파고들고 있다.

 

종교쟁이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여는 거라며 반대한다만.”

 

알다시피언젠가 끝이 오겠지.

 

지옥이 도래하든.

 

아니면 세상의 끝에 도달하든.


과연 내가 그 끝을 볼 수 있으련지.

 

 

 

수인족은 수인족이라는 범위로 묶어서 표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인종이 다양하다.

 

사실 난 그냥 인간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같은 인간도 피부가 까맣다고 마족이라 믿고 업신여겼던 걸 생각하면수인도 그냥 인식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특히 여우족처럼 꼬리가 매력적인 친구들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

 

겨울엔 나도 여우족 친구 한 명 사귈까?

 

퐉스련들 같으니라고.

 

하여튼.

 

도시 확장 공사 중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공사팀이 멍청하게도 사슴족 드루이드의 터전을 건드린 것이다.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을 텐데.

 

.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기록관으로서 현장에 끼어들었다.

 

난장판이었다.

 

나는 나무뿌리가 우리 중장비를 깔아뭉갤 정도로 두껍고 큰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엉망이 된 중장비를 보며 나는 반장 녀석의 모가지가 드디어 날아가겠구나 생각했다.

 

당신이 도시성에서 보낸 책임자요?”

 

반장과 입씨름하던 드루이드가 현장 일꾼들과 다른 내 행색을 보더니 물었다.

 

나는 책임자는 아니고기록관이라 답했다.

 

아아흙과 바람의 기억을 읽는 자입니까?”

 

단순한 기록관일 뿐인데 드루이드의 입을 통하니 뭔가 거창한 게 되어 있었다.

 

그냥 서기라고 할 걸 그랬다.

 

, 잘됐소! 기록관 처자! 내 잠깐 좀 쉬게 저 빌어먹을 집시들 말 상대 좀 해주게나!”

 

정말 귀찮았지만이 양반이 지금 여기 있어봤자 도움 하나도 안 될 거 같아 고갤 끄덕였다.

 

하핫말이 통하는 젊은이구만!”

 

대머리 작업반장이 떠나고드루이드가 신기한 듯이 내 눈빛을 살폈다.

 

짙은 안개로 가득한 눈이구려.”

 

나쁜 거냐고 물었다.

 

그대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인간은 자연과 달리 자비를 베풀 줄 아니 말일세.”

 

신기하다.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뜻인가?

 

엘프들과 사뭇 다른 드루이드의 표현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그 처자들이야 삶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니 연연하지 않는 것이지.”

 

하긴.

 

죽어서 영혼까지 자연에 이바지하겠다는 자들이다.

 

무엇보다자연의 하루는 우리와 같지 않소.”

 

서로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마치 몇백 년을 사는 엘프와 우리 인간으로 치면 최소 일곱에서 여덟 세대는 거쳐야 비빌 수 있는 천 년 먹은 드래곤처럼.

 

자비심 없는 자연의 복수는 천천히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오지.”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연의 흐름을 은총이라 여기며 멋대로 굴고는 한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욕구가 크기 때문이오.”

 

욕구?

 

인정 욕구정복 욕구그리고 단순히 탐욕스러운 욕구 또한 마찬가지.”

 

수인족은 이성보단 본능에 강하다.

 

발정기처럼 아예 본능이 이성을 침식하는 주기도 따로 존재한다.

 

인간은 아니다.

 

이성을 유지한 채 순수하게 그 욕구를 채우고자 계속해서 세계를 확장해간다.

 

뭐든 멈춰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오.”

 

하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는다.

 

존재조차 불분명한 신을 만들어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억지로 점철된 합리성 아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드루이드가 배꼽까지 닿는 기다란 수염을 매만졌다.

 

인간은 언젠가 멸할 것이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질 수 있겠다며 엉망이 된 터전을 본 그가 껄껄 웃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죽음처럼 무엇 하나 남기지 않는 미래가 그는 두렵지 않으냐고.

 

멸이 말이오?”

 

내 질문에 짙고 두꺼운 눈썹이 들썩이며 회색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찌 멸을 두려워하오생사의 순환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종족 또한 마찬가지리다.”

 

어차피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자연히 받아들여라.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하며 그에 매몰되진 말고.

 

그의 충고였다.

 

 

 

종교쟁이는 귀찮다.

 

어디를 가든 반드시 한 명 이상이 존재하는 게마치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의 잡초 같다.

 

게다가 나처럼 공직자 제복을 걸치고 있으면 도망쳐도 끝까지 쫓아오는 악질이다.

 

시주님?”

 

돈도 많으면서 사제란 족속들은 이 가난한 공무원한테서 꼭 삥을 뜯더라.

 

감사합니다.”

 

금화를 건네자 사제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고갤 숙인다.

 

더럽게 잘생겼네.

 

아카데미 시절여자 후배들이 맨날 교회 오빠라고 입에 달고 살던데 그 말대로다.

 

듣기로 배교자의 지식을 연구하고논문까지 쓰셨던 그 욕망의 탐구자십니까?”

 

세상에.

 

치프가 장난으로 떠들었던 표현이 이젠 태양신을 섬기는 무리에게도 퍼진 모양이다.

 

좆됐다.

 

태양신을 섬기는 고위 사제가 물었다.

 

시주께서도 신은 없다고 믿으십니까우리 인간에게 구원은 없고 파멸뿐이라고 말입니다.”

 

예의가 아니지만난 사제의 질문에 질문으로 돌려주었다.

 

당신은 신을 믿느냐고.

 

하하우문이군요.”

 

누가 태양신 모시는 사제 아니랄까 봐.

 

태양처럼 밝고 환한 미소는 모처럼 살짝 샘솟았던 내 지적 욕구를 팍팍 깎아내기 충분했다.

 

 

 

드래곤.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연의 지배자이자 화신이라 불리는 거대한 비만 도마뱀.

 

과거엔 신으로도 불렸다.

 

뭐어그 명성이 무색하게 요즘은 몇몇이 인간에게 격추당하기도 했다.

 

인간과 드워프가 제휴한 기술의 발전은 두렵다.

 

물론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사실 드래곤 격추는 드래곤의 도움을 빌린 것이다.

 

저쪽도 파벌이네 뭐네 어지간히 싸우더라.

 

역시.

 

지적 생명체는 전부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욕구로 똘똘 뭉친 족속이다.

 

사실그냥 내가 그러길 바란다.

 

또 네년인가? 질리지도 않고 또 내 레어에 찾아왔군. 역시 욕망의 탐구자란 건가?”

뭘요.”

 

이젠 익숙한 별명을 가벼운 으쓱임으로 흘려넘기며 기록을 훑는다.

 

드래곤.

 

무려 천 년 이상을 살아가는 무리답게 그들의 레어는 지식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고드릭에 관한 기록도 아카데미 도서관이나 왕실 기록창고보다 더 자세하다. 그가 발견하고 연구했던 과거의 유물, 그리고 천체의 원리를 탐구한 연구서적이 여기엔 다 있었다. 종교쟁이들로부터 그가 보호했다고. 역시 종교쟁이는 문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물었다.

 

그쪽도 우주에 가본 적 있어요?”

있지.”

 

설마 저 노인네한테서 긍정이 돌아올 줄 몰랐던 터라나도 모르게 고갤 들었다.

 

잘생긴 남자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그가 검지를 위로 치켜세운다.

 

하늘 너머.”

 

드래곤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진공의 영역이 있다며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드래곤조차도 넘는 게 불가능한 영역이라.”

 

신기하다.

 

드워프의 기술로도 도달할 수 없는 저 심해조차 드래곤은 닿을 수 있다던데.

 

우주는 무리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책장을 덮었다.

 

정복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진 않았어요?”

하하핫!”

 

내 건방진 질문에 지혜의 성소드래곤이 이마를 짚고 한참을 웃다 물었다.

 

내 역으로 그대에게 묻지.”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처럼 맹렬히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나를 훑는다.

 

이 몸이 굳이 왜 멍청하게 드래곤의 레어를 들쑤시는 저능아들에게 협력했겠느냐?”

 

하늘을 가리켰던 검지가 내게 뻗어온다.

 

눈을 가리던 앞머리를 녀석이 쳐내자 흐릿하던 시야가 말끔해지고녀석의 얼굴이 더 또렷이 보였다.

 

.”

우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리라.”

 

눈을 감는다.

 

더 넓은 세상은 무엇이지?

 

아직 드래곤조차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땅?

 

어인족이 살고 있다는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심해 어딘가?

 

아니면 죽음만이 가득하다는 북방의 설원?

 

전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 뻥 뚫린 녀석의 레어는 밤이 되면 장막을 아름답게 수놓은 반짝이 가루들이 즐비했다.

 

별의 개척자.”

 

그건 분명.

 

배교자라 불리는 고드릭의 연구일지 겉표지에 적혀 있던 표현이자 제목.

 

하지만 네 시간은 나보다도 더 유한하다.”

상관없어요.”

 

드워프 말대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자원은 무진장 많다.

 

전부를 써먹어 이 세상을 거덜내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리라.


그러지 않으면 남은 건 멸망뿐이니까.

 

미래.

 

건방지게도 신께서 창조했다는 저 우주 너머로.

 

미물의 반란이다.

 

나야 뭐.

 

내 후대가 어떻게든 대신해주지 않을까?

 

.

 

후원자가 드래곤인데.

 

자리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켠다.

 

요 며칠 레어에 틀어박혀 자료들만 챙겨 읽었더니 가슴이 결린다.

 

몸풀이를 마치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그에게 물었다.

 

자아그럼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

 

드래곤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를 어깨에 들쳐멨다.

 

꺄악!? 뭔데요!?”

우선 그거다우리 후대부터 양산하도록 하지!”

무ㅅ… 미친!?”

“100년이 걸려도 좋고 1,000년이 걸려도 좋다!”

 

별의 개척자.

 

우리가 아녀도 우리의 혈족이 그 칭호만은 반드시 손에 넣으리라.

 

아니 이 무슨!”

엉덩이가 토실토실한 게 참 많이도 낳게 생겼군좋아!”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드래곤이 껄껄 웃었다.

 

미치겠네.

 

 

 

* * *

 

 

 

신이라는 우상은 사라졌다.

 

우주.

 

그 경이로운 세계에선 신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는 먼지보다 작은 입자 미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설사 신이 존재하더라도 고드릭 말대로 우리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았다.

 

집단 지성이 품은 욕망의 탐구에는 끝이 없었다.

 

이 작은 행성으로 만족하지 마라.

 

천체와 천체를 엮은 자그마한 태양계 시스템으로 만족하지 마라.

 

그 너머로 나아가리라.

 

행성을 피해 어떤 천체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지점에 손을 모아 자그마한 도형을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생겨난 검은 공백 너머로 끝없이 확대하면 셀 수없이 많은 별이 보인다.

 

우주의 구름성운.

 

무수한 별들의 집합체성단.

 

마법으로도 탐지되지 않는 무언가암흑 물질과 별그리고 검은 동공 같은 무언가.

 

이 모든 게 합쳐진 은하.

 

은하계.

 

슬슬 출발하죠.”

어디까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낭만적이군.”

낭만에 취해서 조종석 떠나면 이주민 함대원이랑 우리까지 다 뒤지니까 알아서 하시고.”

여전히 까칠해늙어서도 매력적이야.”

 

점점 느끼함만 더해지는 멍청한 남편을 뒤로하며 수면실로 향한다.

 

우주엔 마나가 없었다.

 

드래곤이 우주를 넘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마나가 없으면 드래곤은 제 몸도 간수하지 못하는 좀 오래 산 덩치 큰 도마뱀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마나 그 자체인 드래곤을 일부러 마법진에 갈아 넣었다.

 

대부분 드래곤 사회에서도 얘네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죽이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어 일단 감시 아래 봉인이란 이름의 긴 겨울잠에 빠졌던 녀석들이다.

 

다행히 지금은 곱게 갈려서 우리 우주선의 훌륭한 동력원이 되어주었다.

 

시공 마법이 적용된 수면실 캡슐을 확인한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해 이젠 펜을 쥐기도 어려워진 손이지만자식의 얼굴을 어루만질 힘은 있었다.

 

아니자식이 맞나?

 

모르겠다.

 

손주든 후손이든 뭐든 맞겠지일단.

 

하여튼.

 

마법은 참으로 훌륭하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지성을 다방면으로 발전시켰다.

 

몰랐던 지식이 태어남과 동시에 마법의 레퍼토리 역시 더 늘어났다.

 

시공 마법과 별의 마법까지. 다들 응용력이 참 뛰어나다.

 

마도사들은 5년에서 10년 주기로 점점 더 빡세지는 시험과 지식을 보며 고통을 호소했다.

 

마나를 보존하는 방법을.

 

정령을 보존하는 방법을.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족이 인정한 욕망 아래 인간과 드래곤의 주도로 우리는 우주로 나왔다.

 

미지는 두려움을 유발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러니까.

 

우리 별의 개척자로서 위대한 걸음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

 

내가 죽더라도 끝나지 않을.

 

 

 



본격 SF는 아닌 느낌이긴 한데.

뭐, 아님 말고.


걍 마음 가는 대로 막 써봣음 오랜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