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지키고 세상을 구원하고 고향에 돌아갑시다. 아자, 아자, 아자!”

 

만세 삼세창 외치는 용사. 

말 자체는 참 좋은 말이다.

아카데미 출입문에 훈화 문구로 새겨 넣어도 될 만큼.


“다음 상대는 누구입니까!"


용사는 300명의 '아슈타르의 광전사'에게 검을 겨누면서 외쳤다.

힐러를 맡고 있는 수녀, 에밀리아는 용사가 정의의 편이라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피를 뒤집어 쓴 모습과 대조적으로 맑게 빛나는 눈이 참으로 기괴했다.

그 모습에 저 악명높은 아슈타르의 광전사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뽑아서 퇴비통으로 써도 시원찮을 놈.”


광전사들의 우두머리, ‘뽑도띡치’가 혓바닥을 내밀면서 말했다.

광기라고 하면 ‘아슈타르의 광전사들’이 원조였다.


아슈타르 지방을 본거지로 두고, 300명이 모여 이룬 전투 집단. 

광전사 전부가 속옷과 건틀렛, 무기만 장착하고 다닌다.

께름칙한 모습에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상대방은 전의를 상실한다. 

그리고 그중 광기의 으뜸을 뽑으라면 우두머리 뽑또띡치였다.

 

뽑또띡치가 거대한 도끼날을 땅에 꽂아 넣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허리를 꿀렁꿀렁거리는 기괴한 춤이다.


“어떠냐? 네 어머니 무덤에서 췄던 춤이다.”

 

놀랍게도 뽑또띡치의 이러한 행동은 계산 하에 들어간 것이다.

광전사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모두 연출이다.

심지어 이름까지.

상대방의 전의 상실을 목적으로 꾸며진 광기.

이른바, 가짜 광기다.


'미동조차 하지 않다니.'


뽑또띡치가 속으로 되뇌었다.

가짜 광기에 수 많은 용사와 기사들이 당했다.

그러나 눈 앞의 용사는 달랐다.

눈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저건 진짜다. 진짜 광기다.'


뽑또띡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초롱초롱.


용사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눈에 살기를 담은 안광은 봤지만, 초롱초롱한 안광은 난생 처음 본다.

뽑또띡치는 더욱 더 초조해졌다.

용사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미묘한 대치 상황에서 용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정의의 여신 이름 아래, 당신에게 엄벌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의 잘못된 결합물인 너는-."

 

신명나게 뽑아져 나오는 뽑또띡치의 욕설들.

부모와 고향을 모욕해도 용사는 차렷자세를 하고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욕을 하던 뽑또띡치가 되려 숨이 찰 지경이었다.


"잘 들었습니다. 제 첫 질문에 귀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무언의 동의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


당연하지만 욕설 배틀 같은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다.

용사는 혓바닥 대신 검을 휘둘렀다.

뽑또띡치는 급하게 도끼를 들어 받아 칠 준비를 했지만, 용사의 검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뽑또띡치의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으아아아악!”

 

단 한번의 패주도 없었던 아슈타르의 광전사들. 

상전사와 우두머리의 연이은 죽음으로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

그야, 자기들보다 더 미친 놈을 만났으니까.


용사는 총 두 번의 칼질로 전투를 끝냈다.

용사 파티는 승리와 기쁨의 고함을 지르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동화 속 용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용사다.

바른 말만 하고, 눈이 맑고, 절대 정의를 배신할 것 같지 않은 초인.


그러나 짐꾼을 포함한 11명의 파티원들 머리 속에 새로운 질문이 들어섰다.

비록 정의의 편이지만, 저게 인간이 맞는 건가?

용사의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 생겨났다.


“용사님. 고생하셨어요."

 

에밀리아만이 용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수건으로 용사 몸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에밀리아님은 다치신 곳이 없으십니까!"


수녀원에서 3년. 빛의 신전에서 1년. 용사 파티 합류한지 2주 째.

신출내기였던 그녀는 후위에서 재생과 방어 마법만 준비하고 있었다.

용사가 상황을 끝낸 덕에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용사님 덕분에 저는 생채기 하나 없는 걸요. 저는 용사님 뜻을 이해해요."


피에 굳은 용사 머리카락을 닦으면서 에밀리아가 연이어 말했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죽일 수 밖에 없었겠죠. 어설프게 제압했으면 더 많은 피를 봤을 거예요. 이제 저들이 도망치면서 소문을 퍼트릴 거고, 남부 지방에 있는 마왕군의 사기는 크게 꺾이겠죠."

"이해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용사는 맑은 눈을 빛내면서 미소를 지었다.

파티원들의 눈에는 그 미소가 너무 인위적으로 보였다. 


"원정을 계속 해볼까요? 다 함께 외쳐 봅시다. 정의를 지키고 세상을 구원하고 고향에 돌아갑시다. 아자, 아자, 아자!”


물론 아무도 복창하지 않았다.


* * *

 

마왕군 토벌을 위한 원정은 1년이 넘었다.


용사 파티는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을 넘고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싸움보다 자연재해 때문에 원정이 끝날 수준이었다.

모두가 추워서 눈을 까 뒤집고 있을 때, 용사 혼자서 눈을 맑게 빛내며 웃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동사할 겁니다. 밤이 오기 전에 중턱을 넘어야 합니다. 

그 뒤에 대피할 동굴을 찾아야 합니다! 힘냅시다!"


저체온증이 파티원을 천천히 잡아 먹고 있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보다 더 잔인했다.

온도를 높이기 위해 마법사가 화염마법을 써도 답이 없었다.

눈보라 속에 담긴 서리바람은 마탑의 차기 탑주 자리를 노렸던 마법사의 불꽃마저 꺼트렸으니까.


"이 설산은 마왕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지옥이 분명해."


원소 학파 교장의 손녀로 자부심 가득했던 마법사는 이제 부정적인 소리만 계속 내뱉었다.

살인적인 추위에 영민했던 마법사는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후회스러운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더 열심히 연구했다면... 9서클이 됐다면..."


에밀리아는 저 말을 들은 것이 375번인지 376번인지 헷갈렸다.

결국 파티원들이 내놓은 모든 해결책은 무산되었고, 오로지 정신력만 가지고 산을 넘어야 했다.


"나 안해."


탈주 선언을 가장 먼저 내뱉은 건 탱커 드워프였다.

대방패를 쓰던 믿음직한 탱커였다.

최전선에서 감내하던 스트레스도 분명 탈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맑은 눈의 미친 새끼, 아니 용사는 선두에 서서 눈길을 헤집고 가고 있었다.

드워프는 설산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도 안해."


줄줄이 드워프를 따라 하산했다.

여기서 절반이 포기했다.


"할아버지... 저는 글러 먹었어요..."


마법사도 떠났다.

한편, 에밀리아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과거를 떠올렸다.

원정에 나서기 전, 여신의 동상 앞에서 맹약을 걸었던 그 날.


'원정이 끝날 때까지 용사의 옆을 지키겠습니다. 함께 세상을 구하겠습니다.'


수녀의 맹약은 절대적.

맹약을 거는 순간 맹서에 그 말이 기록되며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

그걸 깨는 순간 죽음보다 더 지독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힘냅시다! 아자! 아자! 아자!"


파티원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용사는 군소리 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조력자였던 마법사의 탈주에 용사는 조금도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더 키우고 그 놈의 삼세창을 외쳤다.


"에밀리아 님. 갑시다!"


용사와 눈이 마주친 에밀리아는 맑은 눈을 빛내는 용사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최선이었다.


* * *


이제 세 명만 남았다.

용사, 에밀리아, 여기사

나머지는 죽거나 탈주했다.


물고기보다 망령들이 더 많은 사해(死海)를 건넜다.

시체 냄새는 끔찍했다.


이것도 힘든데 밤에는 암흑 정령과 망령들이 습격했다.

낮에는 크라켄과 뼈만 남은 고래가 배를 덮쳤다.


사해에 진입한지 아마 30일 째 되는 날.

후미까지 물이 들어 왔을 때, 에밀리아는 나무 양동이로 물을 퍼내면서 중얼거렸다.


"씨발, 좆같은 심해괴물 새끼들 진짜 너무하네요."


에밀리아는 자기가 말을 하고도 깜짝 놀랐는지 황급히 자기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여기사는 크라켄의 촉수를 잘라내기 바빴다.

맑은 눈의 용사만이 에밀리아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에밀리아님! 힘 냅시다!"


용사는 에밀리아가 들고 있던 양동이를 빼앗아서 물을 순식간에 다 퍼냈다.

반파 된 배를 수리하기 위해, 여신의 가호를 받은 검을 나무 판자 대신 쓰고 있었다.

그런다고 물이 안 들어오나.


* * * 

 

남은 건 이제 두 사람.

용사와 에밀리아 둘 뿐이었다.

선두에 걷고 있던 용사는 에밀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끝이 보입니다. 에밀리아님. 손을 놓지 마세요."


미궁의 끝, 심연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초롱 초롱.

 

여신의 부여한 권능, 극한의 어둠에도 시야를 제공한다.

'고양이의 눈'이라고 이름 붙인 능력이었다.

걷고 있던 용사는 어깨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이 사라졌음을 감지했다.


“이상 없습니까?! 에밀리아님!”

"네."


피로가 가득 담긴 에밀리아의 목소리.

원정을 시작한지 어느덧 1년 반이다.

정의로 가득 찼던 용사조차 정신이 흔들릴 만한, 가혹한 원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서 있는 에밀리아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후우' 


용사는 심호흡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힘 냅시다. 에밀리아 님."


용사는 심호흡을 하고 단단함을 담아 말했다.

자신이 흔들리면, 그녀는 더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제 둘만 남았고, 둘이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이 원정의 끝을 마주해야 한다.


"아, 그래요?"


건성으로 돌아오는 대답.

에밀리아가 무심하게 말한다.


"용사님은 안 힘들어요?"

"저도 사람인 만큼 힘듭니다. 저 여신이 창조한 생명체나 골렘 같은 거 아닙니다. 

정박아도 아니고요. 그냥 눈이 좀 크고 맑게 태어났고, 매순간 용사로써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에요."

"헛소리."


의심 섞인 목소리에 용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현실을 부정한다는 건 최악의 징조다.

이미 에밀리아의 정신은 산산조각 난 것일까.


"에밀리아 님,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희망이 어디 있어요? 꺼내서 보여줘 봐요."


어떤 역경도 용사의 걸음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냉담한 에밀리아의 목소리는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에밀리아 님."

"왜요."


용사는 에밀리아의 손을 잡았다.

온기라도 전해준다면, 이 의지가 전해질 것이다.


"딱 세 걸음만 더 나갑시다. 힘들면 걸음을 세어 보세요. 에밀리아 님."

 

에밀리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용사는 무작정 걸었다.


한 걸음.


"정의를 지키고."


두 걸음


"세상을 구원하고."


세 걸음.


"고향에 돌아갑시다."


삼세창을 외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현실은 참 잔혹하다. 

세 걸음 이후, 마왕이 짠, 하고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계속해서 걸어야만 했다

대화는 단절됐다.

용사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그녀의 마음이 부서질까봐 두려웠다.


고요함 속에서 용사는 결심했다.

마왕과 혼자 싸운다면 승산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지금 에밀리아의 상황을 보면 더 이상 겉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돌려 보내자. 

고향에 돌아 갈 수 없을 지라도, 에밀리아가 살아 남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에밀리아 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에밀리아가 보인다.


"저는 베른과 플로라의 아들. 카일입니다."


카일은 맑은 눈이 아닌,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죽을 때까지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품 속에서 마석을 꺼내...


"어? 왜 없지?"

"이거 말이에요?"


에밀리아가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마석이 들려 있었다.

원래 용사 카일의 품 속에 있어야 할 마석이.


"사해에서 흑기사 잡고 얻은 순간이동 마석이잖아요. 소환진을 그린 곳으로 이동하는 마석. 미궁 들어가기 전에 소환진 몰래 그려놓은 거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어, 어..."


에밀리아가 통쾌하게 웃었다.


"저 어차피 맹약 깨면 큰일나요. 용사님이랑 끝까지 같이 있어야 돼요. 이 마석은 용사님 눈 붙인 틈에 슬쩍했죠."

"그, 그럼 죽은 눈을 하고 있었던 건..."

"용사님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인데. 옆에서 배운 거죠. 장난 좀 쳐 봤어요. 맨날 나만 용사님한테 휘둘리는 것 같아서."


에밀리아가 용사 옆에 나란히 선다.


"근데 저 말이에요. 정신 나간 건 맞아요. 제정신으로 마왕 모가지 따면 그게 비정상이지."

"잠시만요. 에밀리아 님."


못 따라가겠다.

한 번도 타인에게 기세를 빼앗긴 적 없던 용사 카일은 자신이 완전히 휘둘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주도권을 빼앗긴 게 얼마만 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장난 한번 친다고 몇 시간 동안 죽은 눈 하고 풀 죽은 태도를 연기한다고?


'미친 거 아니야?'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쳤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보다 더 미친 놈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10년 넘게 정의를 대변하는 용사였으니까.


"근데 딱히 나쁘다고 생각 안해요. 솔직해진 거죠. 후딱 마왕 조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요.

저는 성녀 칭호 달고 평생 놀고 먹고 할래요. 어차피 남편이 역사에 남을 용사니까 성녀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방금 뭐라고요?"

"아자, 아자, 아자!"


두 팔을 들어 올린 에밀리아가 과장된 모습으로 카일을 흉내낸다.

말뜻을 이해한 카일의 표정이 당황에서 행복으로 바뀌었다.

카일은 그녀의 말을 복창했다.


"아자, 아자, 아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심연의 끝자락에 도달했고 마왕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왕에게 덤벼들었다.

마왕은 덤벼드는 미친 남녀를 보면서 기겁했다.


* * *


마왕과 싸우는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

정의로운 용사 카일의 머리 속에 돌연 물음표가 떠올랐다.

설산에서 마법사가 떠날 때, 에밀리아가 어떤 표정을 지었지?

물음표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사해에서 여기사가 어떻게 죽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