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는 개념이 없다.


개념이란 것들이 자신의 직무를 내팽개치고 도망다니는 까닭이다.


개념이 없어서 생기는 일이라는 게 단순히 듀얼리스트가 게임 도중에 오리카를 제작해서 사용해버리는 정도라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가끔씩 '죽음'이나 '질서'같은 기본 개념이 도망치면 큰 문제가 된다.


한 명의 개인이나 하나의 마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격리나 말소 따위의 방식으로 처리하면 되니까.


하지만 일족의 가계나 문명에 뿌리내린 종족 레벨로 그런 일이 번져나가는 경우가 생기면 특히 골치가 아프다.



"…젠장, '죽음' 이 새끼 내가 언제 날 잡고 제대로 조져버려야지."



아마 죽음이 직무를 유기한 예시로는 흡혈귀가 가장 유명할 거다. 상위 혈족으로부터 그 특성을 물려받는 흡혈귀의 특성이, 죽음이 직무를 유기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급격하게 몸집을 불렸으니까.


그런 경우가 생기면 맞물려있는 개념을 '확장해서' 빈 개념을 채워야한다.


죽음의 트롤링이 만들어낸 불멸불사의 존재가 있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다. 한줌 핏물이 되어도 다시 재생한다.


그렇다면, 이때는 '죽음'의 정의를 다시 내려서 빈 자리를 채워야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뇌사는 죽음인가? 뇌가 살아있지만 생각만 할 수 있는 식물인간의 상태라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사회적 죽음은 죽음의 계통 중 하나인가, 혹은 단순히 상징이며 은유일 뿐인가?


죽음은 비가역적으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한때의 상태일 뿐인가?


다시 여기 불멸불사의 존재로 돌아가보자. 이 생물체는 한줌 핏물이 되어도 다시 재생한다. 그렇다면, 그 '한줌 핏물'이 되어있을 때의 상태를 살아있다고 표현할 수 있나?


뇌에 철골이 박혀있을 뿐이라면? 생명 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그 연료가 될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개념을 확장한다. 개념의 대체제를 찾는다. 복원할 수 없다면 훼손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개념을 고정시킨다. 이제 흡혈귀는 심장에 말뚝을 박아넣으면 죽는 존재가 되었다. 흡혈귀에게 죽음이 가역적인 상태라면, 단순히 그 상태를 연장시키면 그만인 일이다.


그것이 나의 업무다.


개념이 직무를 유기해서 개판이 난 세계를 조율하는 것.



"조율자님, 새로운 업무가 생기셨어요. 어떤 세계를 담당하던 개념이 직무를 유기해서, 그 세계를 운영하던 여신이 도움을 요청했네요."

"젠장, 또 뭔데?"


"이번에는 '정의'네요."



그나마 철학으로 상대가 가능한 녀석인가.


규모가 세계 단위인 건 빌어먹을 일이지만, 이번 일은 잘하면 금방 끝나겠어.



"그런데 그 세계가 '정의'의 힘으로 싸우는 히어로에 의해서 유지되는 세계라는 모양이네요."



…이 빌어먹을 회사 내가 꼭 때려치고 만다.


나는 신분증에 적혀있는 사명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사훈에 눈길을 한번 주고, 사무실을 나섰다.


일할 시간이다.



[주식회사 판도라]


『이곳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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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가 우리에게 희망만은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