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도시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한가지 불문율이 있다.


타인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자기 삶을 살아가기만 해도 팍팍하니까 서로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상대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살며 푼돈 약간에 매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도.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곳에 살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도.


다 똑같이 말이다.


"..."


물론 내가 오늘부터 일하게 된 찰스 사무소 라고 하는 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잘 나가는 곳이라고 해서 뭔가 다를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도 다른곳과 별 다를 바 없구나.


사람들의 눈빛은 죽어있었고, 억지로 입꼬리만 올라간채 시시콜콜하고 재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벌이가 시원찮냐느니, 이번 의뢰는 돈이 좀 됐다느니, 이번에 어느 회사의 보호를 받는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느니.


대부분 돈, 돈, 돈. 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의 부상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서로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껍데기뿐인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에 귀를 닫고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한 순간.


"당장 내 눈앞에서 집어치워!!!"


옆 소파에서 누군가 갑작스레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리가 들린 곳에는 검고 칙칙한 가면을 쓴 남자가 악몽이라도 꾼건지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남자때문에 눈 붙이는 것도 실패했으니 대신 말동무라도 시키게 해야겠어.


나는 몸을 일으켜서 그의 옆으로 갔다.


"잠버릇이 고약하네요."

"잠깐 졸았을뿐이야. 넌 뭐지? 아, 네가 그 새로 온 녀석이군. 이 사무소에서 12명 빼고는 전부 최근 다 뒈진것도 알고 있지?"


물론 알고 있다. 보통은 그런건 다 쉬쉬하는데, 이 남자 특이하구나.


"그래서 너는 어떤 녀석이지? 어중이 떠중이가 여기로 들어온건 아닐테고."


그는 내게 도시에서 통용되는 대로 내 껍데기를 확인하려고 했고,


나는 그가 바란것과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해줬다.


"내 영혼이 심연의 바닥을 헤멜 때에도, 고통은 늘 곁에 앉아 나를 지켜주었으니 어떻게 고통을 원망하겠습니까."

"또라이 당첨이군."


또라이라니. 말이 심하네.


그가 원한대로 나를 가르쳐줬을뿐인데.


퍽, 퍽ㅡ!!


나는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좋아하는 시의 구절이에요. 괴로움을 떨쳐내기보다는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거든요."

"아윽.. 뒤통수찌그러지는 줄 알았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에게도 자신을 소개하라고 이야기해봤다.


"그 가면을 벗지 않고 있는 이유라도 있나요?"

"캐묻지 마. 서로 알거 다 알잖아."


자기 소개를 하자고 한 건 그쪽이면서.


나는 어디 회사의 누구입니다. 얼마나 잘났습니다 따위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야 이미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고.


"모르는데요."

"서류보면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기분 나쁘게 왜 존댓말이야. 그리고 방금 두 대 맞은건 찰스 사무소에서 너가 나가기 전에 돌려줄테니까 각오해."


이제서야 그는 제대로 된 자기소개를 했다.


빚진건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졌기에.


"세 대인데요?"


뻐억-!!!


"악!? 또라이 새끼.."


그에게 좀 더 빚을 지웠다.


이게 나와 롤랑의 첫 만남이었다.





**





나는 이후 롤랑과 함께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나와 롤랑은 1급 해결사 라고 불리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사무소는 그 해결사들이 모여서 일을 맡아주는 의뢰소 같은 거고.


해결사란건 도시에서 일어나는 온갖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람이고,


1급이란건 그 중 일반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이란것.


가장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여러 차례 하다보니 자연스레 좀 더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저는 종종 악몽을 꿔요. 정확히는 옛 일이지만요. 저는 옛날 어느 연구실에 붙잡혀서 매일 어떤 실험을 받았어요. 그 실험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요."


나에 대해 좀 더 제대로 된 자기소개를 할 수 있었다.


나의 불우한 옛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생겼다.


"그것 참 안됐네."


초기에 롤랑의 반응은 참으로 무미건조했다. 


일반적인 도시의 사람들과 별 다를바가 없었다.


그는 내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한가지 사건을 해결할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내 이야기를 해줬다.


"실험이 다 끝난 뒤에는 어느 쓰레기장에 버려졌어요. 사용 용도를 다 했다는거죠. 그렇게 버리면 모든게 끝날 줄 알았나봐요."

"그 실험때문에 그렇게 무식한 힘을 가진건가?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는 조금씩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약간이나마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화의 95%가 일에 관련된거라고 하면, 5% 정도는 나에 대해 알려주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살아남은 것은 복수에 대한 집념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한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래. 하긴 억울하기는 했겠어. 이 도시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지만."


높으신 분들만을 골라서 죽이는 어느 살인마를 해치우고 말해줬었고.



**



"그 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의지 할만한 것은 어린 저 자신과 능글 맞은 오빠뿐이었으니까요."

"오빠가 있었어?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


도시의 별이라고 불리는 해결사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로 선정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말해줬다.


약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납치하고, 핏줄을 빼앗아서 또 다른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 


이 사무소의 인원 중 둘을 이미 빈사상태로 만든 전적이 있는 괴물. 흡혈귀의 퇴치 의뢰.


사실 오빠 얘기는 더 늦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 일은 아무리 나라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서 해줬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죽기 전에 나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를 요구하고 싶어졌다.


"네. 좀 또라이 같은 오빠가요."

"또라이의 오빠라고 하면 상또라이겠군."


그는 그 말을 한 뒤 이전일이 생각난듯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안 때려요. 그보다 이제 롤랑도 이야기 이제 슬슬 이야기 해줄때가 됐잖아요."

"... 뭘?"

"왜 그 칙칙한 가면을 한시도 벗지 않는지요."


그는 그 말에 잠시 고뇌하듯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어졌다가 입을 열었다.


"난 연기전쟁에 참여했어."


연기전쟁. 


분명 이전에 각 도시의 에너지를 전반적으로 공급해주던 회사와 새로 생겨난 에너지 회사가 격돌한 전쟁이었지.


"그리고 연기전쟁에 참여해서 실컷 싸운 뒤 그 연기의 근원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지. 일을 마치고 기억 제거 수술을 받아서 그 정체가 뭔지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약하게 떨며 말했다.


"그 날 이후로 가면을 벗을 수가 없더라고. 내 편의가 저렇게 역겹고 끔찍한 것으로 이뤄진거였다니, 하면서 말이야."


꽤 인간적인 이유구나.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것은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데.


역시 물어보길 잘했어.


그는 이 도시에서 몇 안되는 인간다운 인간이구나.


"그렇게 된거였군요. 그래서 가면을.."

"쉿. 조용히 해. 이제 잡담시간 끝났어."


그의 말대로 이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끝났다.


흡혈귀와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



나와 롤랑은 협동해서 흡혈귀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얼마나 오랫동안 싸운걸까, 


그의 날카로운 장검의 날이 온통 핏물로 뒤덮이고,


내가 준비해온 무기들이 하나, 하나 고물덩어리로 전락하고,


우리가 입고 있는 신체 보호 기능을 겸비한 옷들이 반쯤 넝마짝이 될 정도가 되어서야.


"하하핫..!! , 재미있구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나를 죽인다는 망발을 내뱉을 수 있지."


우리는 흡혈귀를 거의 죽이기 직전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차분하게 연계해서 숨통을 끊기만 하면.


"흡..!"

"안ㄷ..!!!"


다만 롤랑은 나와 생각이 다른듯 했다.


그는 거친 숨을 헐떡이는 흡혈귀에게 달려들며 장검을 휘둘렀고.


"..!!!"


흡혈귀는 노렸다는 듯 흡혈귀의 뒤쪽에 가득히 고여있던 피 웅덩이로 순간이동했다.


그렇게 이동한 흡혈귀는 그의 뒷 목에 손을 꽂아넣으려 했다.


아마 저대로 목을 가격당한다면, 살점이 꿰뚫리면서 심장이 터지고 죽어버리겠지.


흡혈귀를 공격해서 막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도시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 상대를 죽게 두고 괴물을 처치해서 공적을 독차지했던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간다운 인간이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방법은 단 하나뿐.


"컥..."

"안젤리카!?"

"호오?"


나는 몸을 던져서 그 공격을 막아냈다.


가득 지친 흡혈귀의 기습은 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했다.


물론 아프긴 엄청 아팠다.


배를 그대로 관통 당하면서 나는 울컥, 피를 토해냈고.


"츠흡, 하아.. 향기로운 피 냄새. 오늘은 여기까지 해두겠어."

"이 개자식이 어딜."


흡혈귀는 최후의 기습이 통하지 않은 탓인지 손을 뽑아내고는 재빨리 도망쳤고,


롤랑은 그런 흡혈귀를 추격하려다가 멈칫했다.


분명 여기서 추격한다면 그 혼자서도 죽일 수 있을텐데.


둘 다 이곳 도시랑은 안 맞는 사람인가보다.


그는 피투성이 장검을 바닥에 버리고는 쓰러져 있는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이봐! 안젤리카! 내 말이 들려!?"


아, 이럴때 왜 내가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건지.


"... 너는 가난한 내 마음의 화롯가를 절대 떠나지 않았던 사람과 닮았다. 드디어 끝났네요. 수고했어요.."


그는 나를 떠나지 않고 지켜줬다.


이 팍팍한 도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을 정말 보기 힘든데.


그는 나를 생각해줬다.


내가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도 내 목숨을 구해줄 생각인 듯 보였다.


"K사 혈청이야. 이거면 살 수 있을거라고. 피보다 살점이 먼저 붙는다는 굉장한 회복제니까. 정신만 차리면.."


아, 그렇구나. 그럼 잠시 눈 좀 붙여도 되겠네.


너무 피곤하다.


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고,


그런 나를 본 롤랑은 자조하듯 내뱉기시작했다.


내가 죽을거라고 생각해서 말하는건가보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야. 도시에서 내가 가담하는 추악한 일들에 대해 떳떳하지 못했어."


그렇구나. 그런 이유였구나.


아까 자신이 누리는 편의가 말도 안되는 추악함덕분에 가능한것때문에 가면을 쓴다고 한 시점에서부터 대충 눈치채기는 했는데.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보일 자신이 없어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데.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데.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피눈물로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는데.


"...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해. 단순히 일이라는 핑계로, 사무소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괴물인게 아닐까. 언젠가 도시에서 죽어도.. 아무런 불평조차 할 수 없을거야. 그게 무서워서, 가면을 벗을 수가 없었어."


너는 아니구나.


너는 사람으로서 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구나.


자신만을 위하는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구나.


나는 그 점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런 네가 좋아.


아마 이런 사람이란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너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콰직ㅡ!


나는 주먹을 날려 롤랑의 검은 가면을 부숴버렸다.


"흐, 확실히 문제 있는 얼굴이네요."

"... 안젤리카??"


그의 차디찬 가면 안의 얼굴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흐른 자국이 보였고,


표정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사랑스러워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랄까.


다만 이대로 두면 그가 곧 부서질 것 같아 나는 충고를 해두기로 했다.


"왜 당신이 도시의 문제를 다 마음속에 담아두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

"서로 안고 갈 수 있는것만 안고 가자고요."


물론 이게 완벽한 해결법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 괴로워하진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너무 별개로 치부한다면 롤랑도 다른 도시사람들과 똑같아질테니까.


앞으로는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



흡혈귀 사건 이후 롤랑을 좋아하게 된 나는 여러차례 그에게 대시해왔다.


아마 찰스 사무소의 13인 중 내가 롤랑을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정말 완벽한 쑥맥이었다.


"... 롤랑. 왜 찰스 사무소 인원 중 무려 둘이나 같이 온거죠?"

"맛있는건 같이 나누는게 좋잖아. 올리비에한테 물어봤더니 거기 스튜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지."

"... 미안하다."

"난 그냥 롤랑이 밥 한끼 같이 먹재서 온건데 이거 괜히 왔네."


고급진 레스토랑에 가자고 계획을 잡고 불렀더니 친구들을 같이 데려오지를 않나.


"... 둘이 사귀시는거죠? 그렇죠? 맞죠? 왜 또 나타난거죠?"

"왜 그러는거야? 걱정말라고. 추가로 표를 산게 아니라 내가 무려 이벤트에 당첨되서 얻은 표를 올리비에한테 준거니까."

"... 미안하다."


같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려는데 또 친구를 데려오지 않나.


"... 그냥 둘이 사귀세요."

"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나. 롤랑. 혼자 가라고."

"아니 나는.. 악!? 왜 때려?"


어렵게 같이 여행을 갈 계획을 잡아놨더니 출발 하는 당일 날 보니까 또 절친이 같이 왔지 않나.


늘 이런식이었다.


무언가 좀 더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해도,


그는 매번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


서로 계속 콤비로 활동은 하고 있었으면서.


분명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건 맞았는데 말이다.


답답한 남자.


그리고 그렇게 점점 지쳐가던 도중.


"..!!!💕"


내일은 해가 동서남북에서 뜨려나.


그는 처음으로 내게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했다.


정확히는 어디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자는 것이었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단 둘이.


이 점이 매우 중요했다.


나는 그와의 데이트 날, 평소보다 훨씬 꼼꼼히 외모에 신경을 썼다.


입술에는 옅게 립스틱을 바르고, 아끼던 옷을 입고,


워낙 비싸서 이전에 선물 받아놓고 손도 안대던 향수를 몸에 은은하게 뿌렸다.


과연 그와 갈 첫 데이트 장소는 어디일까.


고급진 레스토랑? 아니면 영화관? 그것도 아니면 뭘까.


그에게 너무 큰걸 기대하면 안되니까. 


망상은 이쯤하자.


나는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갔고.



"저기 정말, 이 길로 가는게 맞아요?"

"맞다니까..."

"지금 거의 한시간째 걷고 있는거 알아요? 대체 어디길래 이렇게 멀리까지 가요? 그리고.. 하아.. , 기대한 제가 잘못이죠. 그래서 뭘 먹으러 가는건데요?"

"..전."

"네?? 뭐라고 했어요?"

"아, 일단 가서 먹어보면 안다니까!?"


기대를 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해결사로 일할때 입는 옷을 입고 왔다.


뭐, 그래. 분명 도중 급한 일이 생기면 가야한다고 했으니까. 


이해 해주자. 이해 해줘야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거의 한시간씩이나 걸어서 전 하나 먹자니. 


수지타산이 너무 안맞잖아.


나는 그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상한거 먹이는거 아니죠? 어떤 쓰레기는 좋은 음식이라고 먹게 두고는 사실 이게 괴물의 고기로 만든거라고. 너도 이제 곧 너가 먹은 괴물이 될거라고 말했대요. 무섭죠?"

"말해두겠는데 그런곳아니야. 평범하게 맛있게 요리하는 곳이거든?"

"혹시 아나요? 그렇게 말하고는 뒤통수 쳐서 기절시키고 납치하는 곳일지."

"글쎄 그런게 아니래도."

"하아.. 그래요. 그래도 그쪽에서 먼저 어디 가자고 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기대는 해볼게요."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곤란한데..."


그래. 얼마나 고급진 전집인지 가보자.


나는 롤랑과 같이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고,


그 뒤로도 약 10분을 더 걸어서 전 집에 도착 할 수 있었다.



**



"정말 여기가 맞는거죠?"


우리가 도착한 전 집은 겉보기에는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가게였다.


"좀 허름해 보여도 여기가 진짜 괜찮은 곳이야."


아니, 음식 맛 같은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정말 여기에요??"

"..."


정말 여기인가보다. 첫 데이트 장소.


그는 잠시 침묵을 이어가다가 주문을 했고.


"여기 모둠전 하나랑 파전 하나 그리고 쌀막걸리 한 병이요!"


이어서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둔감한 남자.


나는 그간의 섭섭함이 순간 폭발해버렸다.


"... 누가 첫 데이트 장소로 이런데를 와요??"

"푸으읍..!? 데, 데이트라고!?"


그는 크게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먹던 음식을 입밖으로 뿜어냈지만,


나는 터져버린만큼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 혼자 착각했나보네요? 아니 뭐, 늘 이런식이죠. 데이트를 하려고 불러내면 꼭 사무소 동료들을 불러서 움직이지. 저희가 둘이 움직이는 경우는 의뢰를 해결할 때 말고는 단 한번도 없었을걸요??"

"... 여기가 그렇게 별로인가?"

"보통 밥 한끼 먹으려고 한시간 넘게 걷진 않죠."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긴듯 보였다.


그래도 롤랑딴에는 나름 데이트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내가 쉬운여자다. 쉬운 여자야.


"그래도.. 처음으로 단 둘이네요. 처음으로 조금 데이트 같아요."

"아하핫.. 아무튼, 이, 일단 먹자고. 음식 식겠어."


그는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비록 허름한 대포집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와 단둘인게 어디인가.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전을 집어먹었다.


"음~ 여기 전 정말 맛있긴 하네요? 특히 파전이 예술이에요."

"그렇지!? 다들 미심찍어 해도 막상 먹어보면 진짜 좋아한다니까."

"맛있는 음식 이야기 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 그보다 누군가랑 같이 먼저 왔었나봐요?"

"알잖아. 그 친구."

"정말 둘은 질투 날 정도로 친하네요."


뭐어, 그래도 이번엔 단 둘이니까.


나와 롤랑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의 구절은 어떻냐든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든지, 요즘은 뭐가 가장 즐겁다던지.


내가 다른 사람과 하고 싶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며 술도 조금씩 마시고, 조금씩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네요. 낮술은 원래 잘 안하는데...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단 둘이 온거에요?"


나는 술김에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품고 있던 속마음을 내보였다.


"... 넌 눈치가 빠르니 알 것 같은데."


그는 얼굴이 조금 더 붉어져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온 보람이 있구나.


"직접 듣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어서요."

"... 그러니까.."


삐-빅!


삐-빅!


다만 야속하게도 운명은 내 편이 아닌가보다.


그가 차고 있던 뱃지에서 긴급 호출음이 울렸다.


왜 하필이면 이럴때.


"긴급 호출이네. 가봐야겠어."


그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 나가려고 했고.


"... 시간 없으니 한마디만 하고 가요."


나는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만약 여기서 그를 놓아준다면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여기서 내가 그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먹히지 않을까.


비록 그에게 자신도 좋아한단 말을 듣진 못해도 다음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알았어! 그래, 사실은..."


이런 허름한 곳이 아니라 근사한 곳에서 하고 싶었지만.


좀 더 아름답고 예쁜 곳에서 하고 싶었지만.


"좋아해요."

"... 좋아해."


나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롤랑도 거의 나와 동시에 좋아한다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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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롤랑시점으로 나오지만 아내인 안젤리카 입장으로 해보고 싶었음.
롤랑이 좀 심각하게 답답한 연애행각을 보여줘서 그에 맞췄더니 좀 고구마가 된건 아쉽다.
여력되면 2편까지는 쓸듯.